내 이름은 진수다. 얼마 전 아이들에게 선물한, 작가 유은실의 동화집 ‘만국기 소년’의 주인공도 진수다. 전학생 진수는 장기자랑 시간에 세계 각국의 이름과 수도를 무표정하게 줄줄 왼다. 그가 그런 희한한 ‘장기’를 갖게 된 까닭은 주차장 한구석 컨테이너 박스에 살 만큼 가난해, 집에서 읽을 책이라곤 지도책 한 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동화집을 읽은 뒤, 부모가 있음에도 그들의 관심과 배려에서 배제된 아이들의 솔직한 시선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사회 양극화가 끝 간 데 없을 만큼 극심해진,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이 풍진 세상에서 빈곤, 특히 빈곤의 대물림은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진면모를 잃게 한다. 그 탓에 힘없는 아이들은 거리로 내몰려 정처 없이 떠돈다. 부모가 있음에도 방치되는 ‘방임 아동’ 문제를 짚어보려 한 속내 역시 어른들의 ‘실종’된 관심이나 배려와 무관치 않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 씨도, 자기 집 인근에서 끝내 시신으로 발견된 양지승 양도 이웃이, 나아가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파국과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탄식은 언제나 때늦은 것. 이어지는 탄식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생채기만 늘고 병들어간다. 취재에 도움을 준 한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갓 핏덩어리에서 벗어난 24개월 된 아이를 온종일 어린이집에 맡겨두는 부모도 있었다. 그 아이의 정신건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정상적이지 않은가”라며 혀를 찼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찌 중차대하지 않으랴! 그러나 분명 더 중요한 것은, 아직 험난한 세파에 맞설 여력이 없는 ‘바람 속 먼지’ 같은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적극적인 조력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정성을 쏟고 고심을 거듭하며 아이들을 기른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언저리에선 자신의 아이들을 이 땅 어디에나 지천으로 널린 자생식물쯤으로 여기는 무심한 부모들도 적지 않다. 아이들은 스스로 홀씨를 날리고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아니다. 물과 영양분, 공기를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챙겨줘야 하는 새싹이다.
아이들이 ‘방임 아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다른 이름을 지녀서야 되겠는가. 그들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한 우리의 이름은 절대 ‘부모’일 수 없다.
이 동화집을 읽은 뒤, 부모가 있음에도 그들의 관심과 배려에서 배제된 아이들의 솔직한 시선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사회 양극화가 끝 간 데 없을 만큼 극심해진,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이 풍진 세상에서 빈곤, 특히 빈곤의 대물림은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진면모를 잃게 한다. 그 탓에 힘없는 아이들은 거리로 내몰려 정처 없이 떠돈다. 부모가 있음에도 방치되는 ‘방임 아동’ 문제를 짚어보려 한 속내 역시 어른들의 ‘실종’된 관심이나 배려와 무관치 않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 씨도, 자기 집 인근에서 끝내 시신으로 발견된 양지승 양도 이웃이, 나아가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파국과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탄식은 언제나 때늦은 것. 이어지는 탄식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생채기만 늘고 병들어간다. 취재에 도움을 준 한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갓 핏덩어리에서 벗어난 24개월 된 아이를 온종일 어린이집에 맡겨두는 부모도 있었다. 그 아이의 정신건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정상적이지 않은가”라며 혀를 찼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찌 중차대하지 않으랴! 그러나 분명 더 중요한 것은, 아직 험난한 세파에 맞설 여력이 없는 ‘바람 속 먼지’ 같은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적극적인 조력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정성을 쏟고 고심을 거듭하며 아이들을 기른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언저리에선 자신의 아이들을 이 땅 어디에나 지천으로 널린 자생식물쯤으로 여기는 무심한 부모들도 적지 않다. 아이들은 스스로 홀씨를 날리고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아니다. 물과 영양분, 공기를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챙겨줘야 하는 새싹이다.
아이들이 ‘방임 아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다른 이름을 지녀서야 되겠는가. 그들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한 우리의 이름은 절대 ‘부모’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