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보성고 전경.
10월1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3회 자랑스러운 보성인’ 시상식 및 정기총회. 이날 이성락(47회) 가천의대 총장과 허동수(50회) GS칼텍스 회장이 ‘보성인상’을 받으면서 축제의 분위기는 고조돼가고 있었다. 그런데 원로 교우 유희춘(39회) 한일이화 회장이 단상이 올라 이렇게 말하자 한순간에 숙연해졌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400여명의 교우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갑자기 보성고 내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를 들고서 종로 거리를 숨가쁘게 달리던 86년 전 보성고 학생들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현상윤·염상섭·이상·조정래·김진명 등 걸출한 문인 배출
“학교를 세워 나라를 버틴다(흥학교이부국가·興學校以扶國家).”
내년 9월5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 보성고는 1906년 대한제국의 군부대신인 석현 이용익 선생이 ‘교육구국’이란 기치 아래 건립한 학교다.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 황제가 하사한 것. 주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건립했던 이전 학교들과 달리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보성고는 이후 ‘민족사학’의 구실을 톡톡히 했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1919년 3·1운동 때는 교주 손병희 선생과 당시 교장이었던 최린 선생이 민족대표 33인 결성을 주도했고, 장채극·전옥영 등 보성 학생들은 운동 대열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194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이 극심해지던 때 문화유산의 해외유출을 막으며 민족문화를 수호해왔던 간송 전형필 선생이 현 재단인 동성학원을 설립해 학교를 인수했다. 간송 선생의 민족문화 사랑은 그대로 보성 학생들에게도 이어졌다.
이와 같은 ‘교육구국’의 개교 이념, 3·1운동 정신, 민족문화 사랑은 100년을 이어온 보성인의 3대 정신이다. 하지만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온고지신(溫故知新)’. 한국의 혼과 얼을 지닌 세계인 양성이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하는 오늘의 보성 정신이다.
학생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문집들. 보성고 도서관 3층에 설치된 ‘보성과 한국문학’ 전시관. ‘제13회 자랑스러운 보성인’ 시상식에 400여명의 교우들이 모였다(왼쪽부터).
사실 보성은 문학인만 유명한 게 아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16회)과 원로배우 김승호(27회)를 비롯해 도올 김용옥(55회), 가수 김세환(57회), 조성모(85회), 영화배우 문성근(62회), 탤런트 길용우(64회), 박상면(76회) 등이 대표적이다.
보성이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계에 특히 강세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보성고가 위치한 지역구(송파구 을)의 국회의원이기도 한 한나라당 박계동(61회) 의원은 “보성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유로운 학교였다”며 “명문이지만 ‘딴따라짓’도 이해되던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보성고는 개교 이래 단 한 번도 두발 제한이 없었던 학교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9년까지 보성고의 교장을 맡았던 서원출 선생의 교육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 선생은 두발 제한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학생들이 교표를 달지 않게 했으며, 중학생들은 반바지 교복을 입게 했다. 영화관에도 마음껏 다닐 수 있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송영수(46회) 전 한진중공업 사장은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군사문화에 대한 항거였다”고 회고했다. 아이들이 죄수도 아닌데 왜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하냐는 것.
이성락 가천의대 총장도 “의학계에서 창조적인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보성에서의 자유로운 학풍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한국현대미술관회 이사이기도 한 그가 미술을 좋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인문학을 중시한 보성의 교육 때문이라는 것.
소설가 김진명 씨는 “내 소설의 주제의식인 애국에 대한 신념은 보성의 정신에서 나왔다”고 강조했다. 또 “보성은 국어 교육이 무척 잘 이뤄진 학교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포함해 시 100편 이상을 외웠다고 한다. 시조나 ‘적벽부’와 같은 한시도 외웠고 다양한 문학작품들도 많이 읽었다고. 당시 국어 교사들이 ‘문학은 대학입시의 수단이 되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들 역시 문학 자체를 즐겼다고 했다. 이런 학풍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정규 수업과는 별도로 매주 글쓰기 지도를 하는 것은 물론 교지를 비롯한 다양한 문집 편찬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보성의 교기(校技)는 유도다. 학생들 중 70%는 초단을 따고 졸업한다. 사실 보성을 빼놓고는 한국 유도를 논할 수 없다. 1926년 창단된 보성의 유도부는 합법적으로 일본을 이기기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모임이었다. 그리고 수차례 일본까지 포함된 ‘전국대회’에서 당당히 일본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런 정신은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원희(90회) 씨는 “모든 운동이 그렇겠지만, 유도는 특히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고 강조했다.
보성의 유도부를 대표하는 사람은 이원희 씨를 비롯해 아테네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장성호(86회), 시드니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정부경(87회) 그리고 전 국가대표 유도팀 감독이자 현 보성 유도부 감독인 권성세(66회) 씨 등이다. 특히 권 감독의 지휘 아래 이 세 선수들이 활약했던 때는 각종 대회에서 48연승을 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기는 것에 익숙했어요. 신화와 같은 기록에 흠을 낼 수 없었어요. 자부심도 대단했죠. 보성 교표가 새겨진 유도복을 입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그 자체만으로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에서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던 제 배짱은 보성 유도부에서 키워진 것입니다.”(이원희 씨)
지금까지가 ‘온고’의 의미라면 보성고의 발명반 운영과 해외교류 확대는 ‘지신’의 의미다. 2000년부터 운영된 발명반은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각종 경연대회에서 233차례나 수상했고 특허 13건과 실용신안 23건, 의장 1건 등을 출원했다. 지금까지 발명반 학생 중 17명이 발명 특기자로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
또 보성고는 올해 일본과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학생들이 직접 나라를 선택했다. 앞으로도 단체 수학여행의 개념을 없애고 학생들 스스로가 정한 주제별로 가고자 하는 외국을 탐방할 수 있도록 진행할 예정이다.
발명반 3학년인 권민재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젠 국내대회뿐 아니라 국제대회도 제압할 수 있는 뛰어난 발명품을 만들겠다”고.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종로 거리를 달리던 86년 전, 뜨겁게 젊던 보성고 학생들의 모습과 다시 한 번 오버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