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페스트’의 한 장면. 프로스페로의 마술로 인해 무장 해제를 당하는 퍼디넌드(윌리엄 해밀턴, 1750~1801).
표류하던 배는 어느 황량한 섬에 상륙한다. 그 섬에는 마녀의 아들인 괴물 캘리번과 마녀를 거역했다가 나무에 갇힌 요정 에어리얼이 살고 있었다. 프로스페로는 마법의 힘으로 캘리번을 굴복시키고 에어리얼을 나무에서 구해내, 둘을 시종으로 부리며 마법의 힘으로 황량한 섬에 저만의 화려한 세계를 건설한다.
한편 나폴리 왕 알론조는 어느 날 아들 퍼디넌드, 프로스페로의 동생 안토니오와 함께 튀니지에서 열린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이들을 실은 배가 섬 근처를 지날 때 프로스페로는 마법의 힘으로 폭풍을 일으킨다. 배는 침몰하고, 배에 탄 이들은 겨우 목숨을 건져 프로스페로의 섬에 상륙한다.
이들 중 퍼디넌드는 난파 직후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혼자서 프로스페로가 사는 동굴에 오게 된다. 거기서 프로스페로의 딸 미랜더를 만나고, 미랜더는 이 잘생긴 젊은이와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프로스페로는 퍼디넌드에게 일부러 궂은일을 시켜 그의 의지를 시험하며, 미랜더를 향한 그의 연정이 순수한지 알아본다.
나폴리 왕 알론조는 극의 마지막에서 지난날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친다. 프로스페로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동생 안토니오도 함께 용서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다정하게 체스를 두는 퍼디넌드와 미랜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알론조는 두 연인을 축복한다.
프로스페로는 일행과 밀라노로 돌아가기로 한다. 침몰했던 배는 마법의 힘에 의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채 해안에 정박해 있었다. 프로스페로는 요정 에어리얼에게 뱃길에 잔잔한 파도와 순풍이 일게 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그를 풀어준다. “너의 마지막 일이야. 그 일이 끝나면 넌 공중으로 자유롭게 날아가거라.”
버추얼 리얼리티
셰익스피어가 말년에 쓴 ‘템페스트(Tempest·폭풍우)’의 줄거리다. 이 작품의 매력은 역시 마법의 힘으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데에 있다. 나폴리 왕의 일행이 풍랑을 만나 난파하는 것 자체가 마법, 즉 가상이면서도 현실인 상황이다. 마치 액자 속의 액자처럼 그 가상현실 속에 또 다른 가상이 펼쳐진다.
‘템페스트’의 미랜더(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49~1917).
“너희들 죄 많은 세 인간들아, 이 속세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운명의 여신이 아무리 퍼먹여도 게걸거리는 저 바다조차 너희 놈들을 토해놓게 하셨다. …신의 선언을 들을지어다. 이 황량한 무인도에서 반드시 너희들 머리 위로 천벌이 떨어질 것이나 피할 길은 단 한 가지, 진정으로 참회하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는 길밖에 없느니라.”
리얼 버추얼리티
여기서 프로스페로는 ‘신’이 된다. 인간사가 신의 연극인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을 프로스페로는 연극에 비유한다. “에어리얼, 하늘의 괴조 역은 참 잘했다. 음식을 채가는 장면도 근사했다. 대사도 내 지시대로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잘했다. 단역의 요정들도 생동감을 줬고, 내가 시키는 대로 제각기 역할을 순종하여 잘해주었다.”
‘선원들을 위한 지침서’ (Mariner’s Mirrour, 1588).
“저는 영지를 회복하였고 절 속인 자들도 이미 용서하였으니 제발 여러분의 마법으로 절 이 무인도에 잡아두질랑 마십시오. 부디 여러분의 박수갈채로써 이 몸의 족쇄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친절한 숨결이 제가 타는 배의 돛을 배부르게 해주지 않는다면 저의 기도는 실패로 끝나는 셈입니다.”
디지털 바니타스
“이제 저의 마법은 무너졌습니다.” 이 대사와 함께 프로스페로는 섬 위의 가상에서 밀라노의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온 그의 현실은 ‘여러분의 마법’에 걸려 있는 또 하나의 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대 위의 프로스페로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어떤가? 혹시 그들 역시 누군가의 마법에 걸려 있는 건 아닐까?
액자 속의 액자 속의 액자. 이것이 ‘템페스트’에 구현된 바로크적 가상현실의 세계다. 바로크의 시대감정을 특징짓는 말 중의 하나가 ‘바니타스(vanitas)’.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이 세계 자체가 실은 한바탕의 꿈, 한 편의 연극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그 유명한 4막 1장의 대사를 보자.
분노의 세 여신에게 둘러싸여 있는 ‘겨울 이야기’의 퍼디타. 뒤편에 있는 것은 공기의 요정 에어리얼(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1741~1825, 스위스·위). <br>셰익스피어.
마법의 책
이게 어디 17세기만의 일인가? 현실이 가상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닌가.
컴퓨터의 영상은 가상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가? 나 역시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상이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는 이런 디지털 바니타스의 SF적 반영일 것이다.
프로스페로가 동굴 안에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캘리번과 에어리얼과 수많은 요정들을 부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마법의 책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노예 캘리번은 프로스페로를 해치우려는 난파선의 선원들에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어쨌든 잊지 말고 마법 책을 빼앗아야 돼요. 책만 뺏기면 그놈도 별 수 없다고요. 나와 마찬가지로 바보에 지나지 않아요. 요정 하나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죠.”
세계를 창조하는 그 ‘마법의 책’을 오늘날 우리는 ‘프로그래밍’이라 부른다. 프로그래머가 명령어로 쓴 텍스트를 우리는 모니터에서 ‘세계’로 체험한다. 그 가상의 세계 속에 취해 있다가 가끔 그림이 깨지고 그 뒤로 명령어가 뜰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게 누군가가 쓴 마법의 책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환상과 이성
‘템페스트’의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존 디(John Dee, 1527~1608)를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수학자이자 점성술가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진기한 정보로 자신의 서재를 늘려가는 게 취미였다. 하지만 그의 서재는 민중의 손으로 불태워졌다. 그 서재가 마술의 산실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끔 ‘마법사가 아니냐’는 구설에 올랐던 다 빈치처럼 당시에 과학적 마인드를 가진 이들은 종종 ‘마법사’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긴 과학이나 마술이나 신의 비밀을 훔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존 디의 시대는 미술사에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르네상스 양식으로부터 바로크 양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유행한 특정의 미술양식)’에 해당한다. 그 시대는 중세-르네상스의 환상과 근대의 냉철한 과학정신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환상’과 ‘이성’의 결합이 ‘마니에리스모’의 매력이다. 유비적 환상과 인과적 사유의 공존은 바로크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아, 우리가 아는 17세기의 과학자들은 동시에 화학적 결혼의 신비를 진지하게 믿었던 연금술사이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과학이 마술이요, 마술이 곧 과학이었던 이 마니에리스모-바로크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꿈의 세계다.
“모든 짓을 마법의 힘으로 할 수 있었다만 오늘로써 그 마법은 포기하겠다. 이 마법 책은 측량용 납덩이가 내려가 닿아본 일도 없는 심해의 수심 속에 가라앉히겠다.”
극의 마지막에 프로스페로는 자신의 마법을 포기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르네상스의 은유적 상상에서 근대의 인과적 사유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기념하듯이, 프로스페로가 마법의 책을 버리는 장면은 르네상스의 환상에서 근대적 이성으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듯하다. 17세기 이후 환상은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법의 책은 부활했다. 환상과 과학이 결합된 새로운 마니에리스모의 문명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팬터지는 테크놀로지라는 마법의 힘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반면 미디어 혁명의 시대에 사람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현실의 가상성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21세기는 네오마니에리스모의 시대가 될 것이다. 프로스페로의 마법은 계속된다. 셰익스피어는 디지털로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