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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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연구소로 간 과학계 큰 별

타계한 ‘국민 과학자’ 김정흠 교수 … 한국 1세대 물리학자로 과학 대중화 이끈 선구자

  • 박성래/ 전 한국외대 과학사 교수

    입력2005-10-12 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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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연구소로 간 과학계 큰 별
    10월2일, 김정흠(金貞欽, 1927~2005) 전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가 타계했다. 언론들은 단지 ‘물리학자 김정흠’의 부음을 보도했을 뿐이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그를 물리학자보다 ‘국민 과학자’로 기억해왔다.

    학력과 가르쳤던 과목으로 구분 짓자면 김정흠 교수는 틀림없는 물리학자다. 그는 1927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51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53년 고려대에서 강의를 시작했지만 바로 미국에 유학, 로체스터대학에서 원자핵물리 이론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61년 고려대 물리학과로 돌아와 정년퇴임하는 92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물리학자 김정흠 교수를 나는 우리 역사상 조금 다른 자리에 매김하고 싶다. 그는 일상적인 교수라는 위치보다는 훨씬 큰 발자취를 한국 과학 대중화의 역사에 남겼기 때문이다. 대략 짐작하겠지만 한국은 원래 근대과학을 자생(自生)적으로 착근해낸 나라가 아니다. 서양의 관심 밖에 있던 우리나라에는 서양과학의 물결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늦게 미쳤다. 일본은 18세기에 이미 서양과학을 받아들였지만, 1900년 이전의 조선왕조에는 근대과학이란 없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1945년 광복 때까지도 한국에는 근대과학이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 이전에 조선인으로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한 이공계 졸업생은 겨우 204명에 그칠 뿐이다. 그마저도 남북 분단으로 인해 그 반 정도가 북으로 넘어가버렸다. 미국 등 서양에서 공부한 조선인도 있었지만, 광복 후 귀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정흠은 바로 그 남쪽에 남은 몇 명의 ‘물리학자’들의 훈도 아래 광복 뒤의 첫 국산 물리학자로 교육받은 인물인 셈이다. 당시 그에게 물리학을 가르친 한국인 교수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을 뿐, 대학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런 인재들이었다. 이들 광복 전과 직후의 세대를 나는 ‘1세대 한국인 물리학자’로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들 1세대 과학자는 광복 후 과학의 본바닥인 서양에 유학하여 차츰 실력을 기르게 된다. 김정흠이 미국 유학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1세대 한국 과학자들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들이 더 나은 실력을 가지고 귀국하여 가르친 세대, 즉 ‘2세대 과학자’들이 한국의 과학 수준을 조금씩 높여나갔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박성래는 어디쯤에 속할까. 나는 김정흠 교수가 귀국한 61년에 같은 대학의 같은 학과를 졸업한 그의 10년 후배로, 나 역시 제대로 된 교수 아래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내 또래들도 이제는 모두 정년퇴직했지만 우리 세대에서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기대한 것은 무리였을 터다. 70년대 이후 국외에서 공부한 한국인 과학자 집단에서 수준 높은 학자들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 61년 귀국한 김정흠이 물리학보다는 과학 대중화에 더 열을 올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60년대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과학에 관해 가장 많은 글을 썼고, 많은 방송에 출연한 인물이다. 30년대에 이미 시작된 과학 대중화 운동이 70년대에 다시 불붙었을 때, 김정흠은 그 최전선에 섰다. 77년 조직된 과학저술인협회는 그런 운동의 대표격이었다. 초기 부회장을 맡았던 그는 이후 회장을 역임(1982~88)했고, 자신의 사재까지 넣어 ‘과학저술상’을 만드는 등 수많은 사업을 벌여나갔다.

    과학자의 사회 참여와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헌신했던 그는 늘 “수입의 10분의 1을 책 사는 데 투자하라” “남들보다 5분 더 일하라”며 후배들을 독려했다. 사실 내 기억으로도 그는 대단히 부지런했고, 박학했다. 우리는 과학계의 걸출한 스타를 잃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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