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정복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 질문에 생명과학자들은 “가능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모호하게 답한다. 암 발생원리를 밝히고, 이를 차단할 단서를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변수들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생명현상은 복잡하고,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생명과학자들은 암 정복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암 발생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한 유전자를 찾아냈고, 그들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대의 한가운데에는 지난 10년간 생명과학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온 스타 유전자 p53이 있다.
생체 단백질의 세계에 ‘아카데미상’이 있다면, 오스카의 주인공은 단연 p53단백질(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드는 지도이므로, 유전자와 단백질은 같은 개념으로 쓰임)이다. p53만큼 끊임없이 과학자들의 구애에 시달리고, 또한 수없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생체 단백질이 또 있을까?
‘세포 내 청소부’ 연구 할수록 미궁
p53이 스타덤에 오른 것은 1994년. 그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악성 뇌종양과 p53의 관계’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다. 사실 p53의 존재가 확인된 건 80년대 말이다. 23개 염색체 중 17번째에 들어 있는 유전자인 p53이 암 환자에게서는 유독 손상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보고되면서 암 발생과 어떤 종류의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추측이 제기됐다.
마침내 존스홉킨스 대학의 파트 포겔슈타인 교수에 의해 p53의 스타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포겔슈타인 교수는 일본 교토대학 바이러스 연구소의 하타나카 소장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뇌종양과 p53의 관계를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뇌종양 세포에 p53을 넣으면 혈관을 만드는 단백질인 bFGF의 활성이 둔해지면서 암세포 성장이 멈춘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p53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p53이 암을 억제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고장 난 p53만 수리하면 암 환자가 벌떡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온 세계가 들떴다. 게다가 암 환자의 절반은 이 p53이 돌연변이를 일으켰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밝혀져 암 정복의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p53 유전자를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법이 각광받게 됐고, 94년부터 97년까지 무려 220건에 달하는 p53 유전자 치료 임상실험이 집중적으로 시행됐다.
p53이 암과 관련 있는 것은 이 유전자가 세포의 자살 혹은 노화를 사주하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포의 탄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세포의 죽음이다. 생명체는 외부 환경에 의해 손상돼 복구가 어렵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세포는 스스로 사라지게끔 자살(아포톱시스·올챙이의 꼬리가 사라지는 현상 등이 해당된다)을 유도하는데, 바로 p53이 손상된 세포의 자살에 관여하는 중요 유전자(세포 청소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암은 세포 내 청소부인 p53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생기는 질병이므로 이를 정상화하면 암 조직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게 연구진들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과학계의 기대와 달리 p53은 쉽사리 정복되지 않았다.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p53과 암 발생의 관계가 명확해지기는커녕 이 과정에 관여하는 수많은 단백질들이 발견되면서, 연구가 오히려 미궁에 빠진 것이다.
2001년 p53을 활성화하는 p53BP2 단백질이 실은 ASPP2라는 큰 단백질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는가 하면, 같은 해 p53을 억제하는 기능을 가진 sir2라는 유전자군이 발견됐다. 또 2003년에는 p53과 협동해 세포 성장을 억제하는 H2AX와 PUMA 등이 발견됐다. 이어 2004년에는 p53의 정상적 활동을 방해하는 MDM2 단백질, YY1 등이 추가로 정체가 밝혀졌다.
이처럼 혼란을 거듭하던 p53 관련 연구가 돌파구를 찾은 것은 세포 간 네트워크에 대해 과학자들이 이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방향을 전환하면서다. p53을 통해 생체 단백질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을 절감한 과학자들이 세포들의 네트워크, 즉 세포 간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연구진 p18 정체 밝혀내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최근 MDM2와 p53을 조절하는 약물에 대한 연구논문이 소개되기도 했다.
우리 연구진도 p53과 관련해 세계적인 수준의 성과들을 내놓고 있다. 올해 초 서울대 약대 김성훈 교수팀이 p53을 조절하는 유전자인 p18의 정체를 밝혀내 학계를 놀라게 했다. p18은 지금까지 단백질 합성에만 관여하는 비교적 비중이 작은 유전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 교수의 연구에 의해 p53을 진두지휘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김 교수팀은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아예 p18을 겨냥한 항암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계에서는 앞으로 10년 안에 p53을 타깃으로 하는 새로운 항암제가 일반에 공개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특히 이 항암제는 기존의 항암제와 달리 부작용도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0년간 p53에 쏟았던 과학자들의 열정이 앞으로 10년 동안에 결실을 맺을 거라는 전망이다.
생명은 인간의 짧은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신비롭다. 그러나 이 비밀을 밝히려는 인간의 노력 또한 집요하다. 따라서 암과의 싸움에서 인간의 승리를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p53의 정복. 지난 10년간의 기나긴 싸움이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아섰다.
이 질문에 생명과학자들은 “가능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모호하게 답한다. 암 발생원리를 밝히고, 이를 차단할 단서를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변수들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생명현상은 복잡하고,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생명과학자들은 암 정복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암 발생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한 유전자를 찾아냈고, 그들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대의 한가운데에는 지난 10년간 생명과학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온 스타 유전자 p53이 있다.
생체 단백질의 세계에 ‘아카데미상’이 있다면, 오스카의 주인공은 단연 p53단백질(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드는 지도이므로, 유전자와 단백질은 같은 개념으로 쓰임)이다. p53만큼 끊임없이 과학자들의 구애에 시달리고, 또한 수없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생체 단백질이 또 있을까?
‘세포 내 청소부’ 연구 할수록 미궁
p53이 스타덤에 오른 것은 1994년. 그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악성 뇌종양과 p53의 관계’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다. 사실 p53의 존재가 확인된 건 80년대 말이다. 23개 염색체 중 17번째에 들어 있는 유전자인 p53이 암 환자에게서는 유독 손상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보고되면서 암 발생과 어떤 종류의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추측이 제기됐다.
마침내 존스홉킨스 대학의 파트 포겔슈타인 교수에 의해 p53의 스타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포겔슈타인 교수는 일본 교토대학 바이러스 연구소의 하타나카 소장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뇌종양과 p53의 관계를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뇌종양 세포에 p53을 넣으면 혈관을 만드는 단백질인 bFGF의 활성이 둔해지면서 암세포 성장이 멈춘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p53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p53이 암을 억제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고장 난 p53만 수리하면 암 환자가 벌떡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온 세계가 들떴다. 게다가 암 환자의 절반은 이 p53이 돌연변이를 일으켰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밝혀져 암 정복의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p53 유전자를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법이 각광받게 됐고, 94년부터 97년까지 무려 220건에 달하는 p53 유전자 치료 임상실험이 집중적으로 시행됐다.
p53이 암과 관련 있는 것은 이 유전자가 세포의 자살 혹은 노화를 사주하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포의 탄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세포의 죽음이다. 생명체는 외부 환경에 의해 손상돼 복구가 어렵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세포는 스스로 사라지게끔 자살(아포톱시스·올챙이의 꼬리가 사라지는 현상 등이 해당된다)을 유도하는데, 바로 p53이 손상된 세포의 자살에 관여하는 중요 유전자(세포 청소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암은 세포 내 청소부인 p53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생기는 질병이므로 이를 정상화하면 암 조직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게 연구진들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과학계의 기대와 달리 p53은 쉽사리 정복되지 않았다.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p53과 암 발생의 관계가 명확해지기는커녕 이 과정에 관여하는 수많은 단백질들이 발견되면서, 연구가 오히려 미궁에 빠진 것이다.
2001년 p53을 활성화하는 p53BP2 단백질이 실은 ASPP2라는 큰 단백질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는가 하면, 같은 해 p53을 억제하는 기능을 가진 sir2라는 유전자군이 발견됐다. 또 2003년에는 p53과 협동해 세포 성장을 억제하는 H2AX와 PUMA 등이 발견됐다. 이어 2004년에는 p53의 정상적 활동을 방해하는 MDM2 단백질, YY1 등이 추가로 정체가 밝혀졌다.
이처럼 혼란을 거듭하던 p53 관련 연구가 돌파구를 찾은 것은 세포 간 네트워크에 대해 과학자들이 이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방향을 전환하면서다. p53을 통해 생체 단백질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을 절감한 과학자들이 세포들의 네트워크, 즉 세포 간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연구진 p18 정체 밝혀내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최근 MDM2와 p53을 조절하는 약물에 대한 연구논문이 소개되기도 했다.
우리 연구진도 p53과 관련해 세계적인 수준의 성과들을 내놓고 있다. 올해 초 서울대 약대 김성훈 교수팀이 p53을 조절하는 유전자인 p18의 정체를 밝혀내 학계를 놀라게 했다. p18은 지금까지 단백질 합성에만 관여하는 비교적 비중이 작은 유전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 교수의 연구에 의해 p53을 진두지휘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김 교수팀은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아예 p18을 겨냥한 항암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계에서는 앞으로 10년 안에 p53을 타깃으로 하는 새로운 항암제가 일반에 공개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특히 이 항암제는 기존의 항암제와 달리 부작용도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0년간 p53에 쏟았던 과학자들의 열정이 앞으로 10년 동안에 결실을 맺을 거라는 전망이다.
생명은 인간의 짧은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신비롭다. 그러나 이 비밀을 밝히려는 인간의 노력 또한 집요하다. 따라서 암과의 싸움에서 인간의 승리를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p53의 정복. 지난 10년간의 기나긴 싸움이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