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을 칠한 듯 화려한 색, 재질에 따라 수백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색. 바로 황칠만의 자랑거리다. 그러나 황칠은 조선 말기에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원료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위 계층의 거듭된 진상 요구에 급기야 황칠나무를 베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약 200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황칠이 최근 몇몇 장인들의 손에 의해 복원되고 있다. 그 가운데 황칠장인 구영국 (45·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씨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 구 씨가 황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5년. 나전칠기와 전통 공예에 빠져 있던 구 씨는 전북 김제 금산사에 들렀다가 노스님에게서 약간의 황칠 수액을 얻게 된다. 그 뒤 황칠 수액을 도료로 사용하기 위한 구 씨의 노력은 시작됐다. 황칠에 대한 전문서적도 없고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서 희미한 역사적 사실만을 근거로 한 연구가 수월했을 리 없다. 지방 어느 곳에 황칠공예품이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즉시 달려갔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황칠 수액을 정제해 다양한 색상이 나오도록 첨가제를 넣고 농도를 맞추는 기술을 터득한 구 씨는 본격적으로 황칠공예의 맥을 잇기 시작했다.
황칠은 어떤 인공 도료도 견주기 힘들 정도로 색상이 뛰어나며 한지, 부채, 문갑, 의류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에 접목이 가능하다. 그러나 황칠 수액의 공급이 달리는 탓에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 1ℓ의 가격이 무려 2000만원을 호가한다. 황칠 수액은 제주도와 남서해안 도서지역에 서식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하는데, 나무 한 그루에서 평균 8.6g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양이 적다.
구 씨는 “황칠공예가 우리의 전통 예술로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책 출간과 후진 양성 등에 힘쓰겠다”며 “일반인들을 위한 황칠공예품 전시회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약 200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황칠이 최근 몇몇 장인들의 손에 의해 복원되고 있다. 그 가운데 황칠장인 구영국 (45·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씨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 구 씨가 황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5년. 나전칠기와 전통 공예에 빠져 있던 구 씨는 전북 김제 금산사에 들렀다가 노스님에게서 약간의 황칠 수액을 얻게 된다. 그 뒤 황칠 수액을 도료로 사용하기 위한 구 씨의 노력은 시작됐다. 황칠에 대한 전문서적도 없고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서 희미한 역사적 사실만을 근거로 한 연구가 수월했을 리 없다. 지방 어느 곳에 황칠공예품이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즉시 달려갔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황칠 수액을 정제해 다양한 색상이 나오도록 첨가제를 넣고 농도를 맞추는 기술을 터득한 구 씨는 본격적으로 황칠공예의 맥을 잇기 시작했다.
황칠은 어떤 인공 도료도 견주기 힘들 정도로 색상이 뛰어나며 한지, 부채, 문갑, 의류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에 접목이 가능하다. 그러나 황칠 수액의 공급이 달리는 탓에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 1ℓ의 가격이 무려 2000만원을 호가한다. 황칠 수액은 제주도와 남서해안 도서지역에 서식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하는데, 나무 한 그루에서 평균 8.6g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양이 적다.
구 씨는 “황칠공예가 우리의 전통 예술로 다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책 출간과 후진 양성 등에 힘쓰겠다”며 “일반인들을 위한 황칠공예품 전시회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