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열풍을 이끄는 사람들. 이창환 군, 지관순 양, ‘퀴즈쇼 최강남녀’ 진행자 박수홍 씨, ‘퀴즈의 힘’ 진행자 이금희 씨, 장학퀴즈 출연자들과 차인태 씨가 진행하던 흑백 TV 시절 ‘장학퀴즈’(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퀴즈 바람을 증명하는 가장 큰 특징은 프로그램 수의 증가. KBS는 ‘퀴즈 대한민국’을 비롯해 ‘도전! 골든벨’ ‘우리말 겨루기’ ‘라이브러리 도전 역사 퀴즈’ ‘스타 골든벨’ 등 다섯 개의 퀴즈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나이와 세대 넘어 폭넓은 사랑
MBC도 ‘생방송 퀴즈가 좋다’ 종영 이후 한동안 퀴즈 프로그램을 편성하지 않다가 1월 말 ‘퀴즈의 힘’을 선보였다. 퀴즈 프로그램 사상 최초로 무제한 도전 방식을 도입한 이 프로그램은, 고교를 졸업한 지 7년 이상 된 동문 일곱 명이 팀을 이뤄 출전하게 함으로써 ‘아이러브 스쿨’ 열풍 이후 오랜만에 다시 고교 동문회를 들썩이게 하는 등 사회적 파급 효과까지 낳고 있다.
SBS도 3월 ‘퀴즈쇼 최강남녀’를 통해 퀴즈 열풍에 동참했다. 제목에 ‘쇼’라는 단어를 붙인 데서 보듯, 이 프로그램은 퀴즈에 ‘커플 쇼’적인 요소를 상당 부분 가미한 것이 특징. 청춘 남녀가 출연해 짝을 지어 문제를 풀게 한 뒤, ‘커플 체인지 퀴즈’를 통해 새로운 짝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등 퀴즈를 통해 ‘연애’ ‘배신’ ‘경쟁’의 드라마를 만들어가게 한 점이 색다르다.
TV처럼 정식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라디오 프로그램들 역시 다양한 경품을 내걸고 ‘퀴즈’ 코너를 만들어 청취자들의 귀를 붙들고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방송되고 있는 퀴즈 프로그램을 모두 세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
사실 퀴즈가 이처럼 국민적 관심을 끈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 퀴즈 프로그램의 효시인 ‘MBC 장학퀴즈’는 1973년 첫선을 보인 뒤 ‘개발 엘리트’를 갈망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큰 인기를 모았다. ‘장학퀴즈’의 최종 우승자는 ‘소년 영웅’ 대접을 받았고, 대학 진학 등 이후 행적까지 세세하게 기사화되곤 했다.
각 방송사의 대표 퀴즈 프로그램들. KBS ‘퀴즈 대한민국’, SBS ‘퀴즈쇼 최강남녀’, MBC ‘퀴즈의 힘’(왼쪽부터).
흥미진진 여정 ‘이벤트’로 진화
네이버에서 퀴즈 전문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퀴즈 마니아 임창백 씨는 이런 현상에 대해 “현대인의 개성과 퀴즈의 매력이 자연스레 결합되며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세상에는 교과서 안의 지식만 묻는 퀴즈는 인기 없어요. 그건 ‘공부’만 하면 습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퀴즈 마니아들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지적 자극, 다양한 호기심을 통해 하나씩 쌓아나가는 ‘별난 지식’을 좋아합니다. 어느 순간 가볍게 스쳐 지나갔던 것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의 짜릿한 느낌, 그리고 마침내 내 상식을 확인했을 때의 환희 같은 건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모르거든요.”
그래서 임 씨에게 퀴즈는 ‘지적 게임’이다. 문제를 맞히는 것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아나가고 끊임없이 또 다른 영역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흥미진진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대학생 시절 ‘퀴즈 아카데미’에 ‘자하연’이라는 팀으로 출연했던 ‘퀴즈쇼 최강남녀’의 김경림 작가도 비슷한 의견을 낸다.
“진짜 퀴즈 마니아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문제, 어려운 문제를 더 좋아해요. 호기심과 도전 의식, 성취욕과 뿌듯함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니까요. 누구나 신문·방송·인터넷을 통해 ‘잡학박사’가 되어 있는 요즘, 퀴즈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해주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용인 정신병원 최소현 박사는 퀴즈가 갖고 있는 ‘긍정적 스트레스의 힘’을 강조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극을 원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격렬하거나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다가오면 안 되거든요. 딱 필요한 만큼의 기분 좋은 스트레스가 퀴즈풀이예요. 틀려도 부담 없고, 알면 신나는 수준의 자극을 주니까 인기를 모으는 거죠. 따분한 것과 복잡한 것을 모두 싫어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적절한 오락입니다.”
실제로 ‘퀴즈의 힘’에서 4연승에 성공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용산고’ 팀의 조정현 씨의 하루하루는 요즘 ‘즐거운 스트레스’로 충만하다.
“연세대 앞에 독수리다방이 없어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오잖아요. 그럼 대학 앞에 있는 유명 다방에 대한 걸 다 찾아봐야 하는 겁니다. 올해가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하면 그의 국적 최초 작품 대표작 등을 다 훑는 거죠.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는데, 또 한편으로 너무 재미있어요. 퀴즈에 그 문제가 나와도 좋고 안 나와도 좋고. 힘은 드는데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거 자체가 좋은 거죠.”
막대한 상금 또 다른 ‘로또’ 비판도
그래서 진정한 퀴즈 마니아들은 퀴즈피아(http://cafe.naver.com/quizphia.cafe), AI퀴즈(www.aiquiz.com) 등 관련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스스로 문제를 내고, 다른 이들이 출제한 퀴즈를 풀며 지적 자극을 즐긴다.
하지만 최근의 퀴즈 열풍에 대해 우려의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퀴즈가 방송과 만나면서, 막대한 상금과 경품을 획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로또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퀴즈 대한민국’의 경우 최고 우승상금이 5810만원에 이르며, ‘퀴즈의 힘’은 무제한 도전 방식을 통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상금을 가져갈 수 있게 돼 있다. 퀴즈 프로그램마다 ‘이공계 지원 장학금’ ‘모교 장학금’ 등으로 상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토록 하지만, 그래도 출연자들의 ‘한 방 심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문화평론가 강명석 씨는 “퀴즈쇼는 기본적으로 실력과 운이 상호 작용하는 한 편의 영웅 드라마”라며 “평범한 사람이 한순간의 극적 행위로 ‘돈’이나 ‘명예’를 거머쥐는 자본주의적 ‘영웅 신화’를 보여주는 게 퀴즈 프로그램의 본질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점점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최근의 ‘퀴즈 열풍’은 장삼이사들의 지적 호기심이 거대 자본과 만날 때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으로 변화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