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친동생 김란식의 무덤
그러나 잠시 즐거움도 있었다. 신심 깊고 착한 안동 김씨 처녀와 결혼한 것이다. 하지만 세 식구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1864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오갈 데 없는 그에게 1866년 병인박해로 참혹한 시련이 또 닥쳐왔다. 그는 비교적 박해가 덜한 전라도로 내려왔다. 먼저 이곳으로 내려온 7촌 조카인 김현채 가족 및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북 정읍시 산내면 먹구니란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그곳은 회문산 깊은 골짜기로 초근목피 말고는 먹을 것이 없었다. 땅을 개간하고 조를 심었지만 굶주림을 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몇몇 신자가 굶어죽기도 했다. 김란식은 토종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나중에 솜씨가 늘어 50통에 이르렀다. 그는 처자식 없이 수도자처럼 홀로 살다가 1873년에 세상을 떠났고, 먹구니마을에서 회문산 정상 쪽으로 1km쯤 떨어진 양지바른 언덕에 묻혔다.
올 2월14일,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이곳을 답사했다. 신태인성당의 김봉술 신부님과 박찬주 사목회장이 동행해주셨기에 찾을 수 있었지, 물어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눈이 쌓였는데도 김란식과 7촌 조카가 묻힌 무덤만큼은 편안해 보였다. 회문산의 험한 산세가 이곳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또 후손이 없는 묘지치고는 관리가 아주 잘돼 있었다. 근처 가리점마을 신자들이 관리를 해온 까닭이다.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가리점마을로 이사 온 정행례(70세) 할머니에 따르면 이미 당시에도 김란식의 무덤을 신자들이 돌보았다고 한다.
김란식이 살았던 먹구니마을 터(늙은 감나무가 마을 터임을 알려준다).
그가 살았던 먹구니마을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잡목에 묻혀 있다. 고목이 된 감나무들만이 그곳이 한때 마을 터였음을 말한다.
김란식 무덤을 찾은 신태인성당 김봉술 신부(왼쪽)와 필자.
부디 이곳에 김란식과 이름 없이 살다간 신자들을 위한 기념관(기념비)이 세워져 ‘무자손천년향화지지’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