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466호 법정에서 배심원 모의재판을 연 가운데 참석한 배심원들이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법조인을 보는 일반인의 시각은 이중적이다. 존경의 대상이면서도 개혁을 요구한다. ‘한국 법정에서 만인(萬人)이 평등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상당수가 “평등하게 대접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법조인을 선망하는 이유에도 명예와 존경뿐 아니라 군림하는 듯한 ‘사회적 지위’가 영향을 미친다. 유능한 인재가 고시낭인(浪人)으로 추락하는 것도 고시 합격이 곧 신분 상승으로 이어지는 닫힌 구조 탓이라는 지적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벼락 판사’가 된 ‘젊은 영감’의 판결에 권위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심심찮은 법조 비리에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의심도 가시지 않는 게 사실이다. 후배 판사가 변호사가 된 옛 선배를 고려하는 전관예우 탓이다. 법률 소비자들은 재판에 이기기 위해 ‘비싼’ 전관 변호사를 찾으면서도 판사, 검사, 변호사가 기수 따져가며 “형”, “동생” 하는 걸 꼬집는다. 법조인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이러한 이중적 잣대는 법조인의 명예를 깎아내린다.
1월18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한승헌 이해찬·이하 사개추위)가 출범했다. 사개추위는 지난해 말 활동을 마친 사법개혁위원회의 안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사법제도를 국민의 편에서 바꾸겠다”는 취지로 조직이 만들어진 건 여러 차례다. 1993년엔 대법원이 사법제도개선위원회를 세웠으나 ‘개혁’이 아닌 ‘개선’도 이루지 못했다. 95년엔 범정부 차원에서 법조학제위원회가 구성됐고, 99년에도 새법개혁 기구가 꾸려졌으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1000명 선으로 늘린 것 외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사법개혁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법조인들의 밥그릇 지키기 때문이었다고 꼬집는다. 그런데 요사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사개추위에서 활동하는 한 인사는 “각론에서 차이를 보일 뿐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됐다”고 했다. 사법개혁이 결과물을 내놓을 가능성이 과거보다 높은 것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사법개혁의 산고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사법개혁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초심대로 성공한다면 소비자들은 어떤 혜택을 누리게 될까.
#배심제나 참심제 도입 땐 재판 풍경 싹 바뀌어
배심제 혹은 참심제의 도입은 재판 시스템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배심제와 참심제는 국민이 재판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속 법정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배심제는 10여명의 배심원단이 유무죄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법관이 형량을 결정하는 미국식 제도. 참심제는 2~3명의 참심원이 법관과 함께 유무죄 여부와 양형을 따지는 독일식 제도다. 일반 국민이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1월18일 서울 종로구 수송빌딩 앞에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
이에 따라 부장판사 출신이라든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배경이 영향을 미치기 어려워지고 재판에서 얼마나 조리 있게 증거를 제시했느냐가 중요해지면서 전관예우의 틈이 사라질 수 있다. 조서의 중요성이 과거보다 줄어들면서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관행도 바뀔 전망이다.
그러나 법조계 안팎에선 배심제 혹은 참심제 도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재경 법원의 한 판사는 “재판에 국민이 참여한다는 것은 당위성으로 보면 나무랄 데가 없지만 인정에 의한 판결 등 걱정되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법학계에서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법관들이 국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재판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재판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개추위는 2007년부터 시험적으로 일반 국민을 재판에 참여케 해, 이들에게 권고 수준의 권한을 주고 문제점 등을 파악한 뒤 도입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2012년께 완성된 제도를 시행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젊은 판사’ ‘전관예우’가 줄어든다
일본에서는 판사가 변호사로 변신하면 삐딱한 시선을 받는다. 한국은 법원에서 고위직에 오를수록 변호사로 개업하면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 인맥이 넓은 데다 전관예우라는 관행 덕이다.
사법개혁이 성공하면 이 같은 풍토가 줄어들 전망이다. 법조일원화가 이뤄져 일정 기간 변호사나 검사로 활동한 법조인들이 판사로 임용된다. 사회 경험이 적은 ‘젊은 판사’가 줄어드는 것이다.
사개추위는 해마다 변호사 및 검사 출신 법관 임용을 늘려나가 신규 법관 모두를 변호사 검사 중에서 뽑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2003년 10월28일 열린 사법개혁위원회 1차 회의.
물론 딜레마는 있다. 변호사의 수입과 판사의 수입이 엄연히 다른 상황에서 신임 법관으로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이 몰릴 수 있다. 또 사법연수원 수료와 동시에 판사 검사 변호사로 나뉘어 진출하던 구조를 바꾸는 것은 법조 시스템에 일대 혁신을 요구해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시낭인(浪人) 이제 그만
로스쿨(법학 전문대학원) 도입은 사법개혁 이슈 중 실현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사안이다. 법조인이 되려면 사법시험 합격 대신 로스쿨을 다니면 되는 것.
법학 명문대들도 로스쿨 도입에 찬성 의견을 내비치며 로스쿨 도입 준비에 나서고 있다. 법학 전문대학원을 설치해 3년간 교육한 뒤 변호사 자격증을 발급해주자는 게 로스쿨 제도의 골자. 입학정원으로 변호사 수를 조절할지, 졸업을 어렵게 해 조절할지는 논의 대상이다.
제도가 도입되면 대학에서 다양한 전공교육을 이수한 이들이 로스쿨에 진학함으로써 법조인들이 다채로워지게 된다. 학원화한 대학의 법학 교육을 정상화함으로써 양질의 법조인을 양성해 법률 서비스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도 있다.
로스쿨 허가 학교 수와 정원 등을 두고 치열한 논란이 예상된다. 시민단체들은 법조인 수를 대폭 늘리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법조인들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로스쿨에서 배출하는 변호사 수를 1500명~2000명 수준으로 급격하게 늘리면 법조인들의 자질이 떨어져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로스쿨 도입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막는다는 지적도 있다. 사법시험을 통해 신분 상승의 발판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대학교육 4년과 비쌀 것으로 예상되는 로스쿨 학비 때문이다.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는 “미국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혹은 대여금을 제공함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했다.
#법률 서비스 업그레이드
형사피고인이 경제적 이유로 변호사를 구할 수 없을 때는 국선변호인을 붙여준다. 사개추위는 국선변호인 제도를 피고인뿐 아니라 피의자나 민사사건의 피고 원고까지 확대하는 안을 논의한다.
무죄 추정 원칙에 따른 불구속 재판을 확대하는 것도 사법개혁의 논의 대상이다. 영장 집행 유예나 구속적부심 단계에서 보석제도 등이 도입되면 형 확정 전에 옥살이하는 경우가 줄어들게 된다.
이밖에도 논의 결과에 따라 경미한 범죄에 대해 벌금 대신 과태료를 내는 제도와 재정신청 제도의 확대가 이뤄질 수 있다.
대법원의 재판 업무도 재편될 전망이다. 대법관 1인당 한 해 처리하는 사건 수는 1500건가량.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법원은 최고 법원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둬 상고심을 맡게 하는 안과 대법관 수를 늘리는 안이 검토되고 있는데 전자가 다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