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9일, 최종영 대법원장은 2월26일 임기가 끝나는 변재승 대법관 후임에 양승태 특허법원장(사시 12회)을 임명 제청하고, 김영일 헌법재판관 후임에 이공현 법원행정처 차장(사시 13회)을 내정했다. 참여연대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등 시민단체들은 “서열에 기댄 구태인사”라고 비난했지만 적극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최 대법원장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승부수를 대법원장 인선으로 미룬 것이다”고 말한다.
반면 법조계에선 “대법원에서는 이공현 차장을 대법관에, 김동건 서울고등법원장을 헌법재판관에 내정했지만 청와대에서 부산 출신의 양승태 특허법원장을 대법관 후임으로 밀면서 김동건 서울고법원장이 탈락했다. 양승태 특허법원장이야 워낙 탁월해 언젠가는 대법관이 될 분이지만 김동건 서울고법원장은 한마디로 관운이 없는 분이다”는 뒷말이 흘러나왔다.
헌법재판소(위)는 물론 검찰도 외부 인사의 수장 등극을 걱정하고 있다.
1월31일, 서울지방변호사회 정기총회에는 사상 최대 인원인 2000명에 가까운 변호사들이 몰렸다. 이날 서울변호사회는 천기흥 현 회장(사시 8회)을 차기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 회장 후보로 선출했다. 흥미로운 점은 1월25일 창립된 제3의 중도변호사 단체인 ‘시민들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이하 시변)이 보수인사인 천 후보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민변 출신의 변협 회장 독주를 막아섰다는 점. 이에 대해 법조계 일각에서는 “노무현 정부 들어 민변 출신 등 진보적인 법조계 인사들이 권력 핵심 요직을 차지하면서 ‘주류’로 부상하자 이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보수적인 법조계 인사들이 뭉친 것”이라고 해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특히 사법시험 출신으로 법조계의 모든 인사를 맘껏 해볼 수 있다는 건 누구도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대단한 행운이다.”
최근 한 원로 법조인이 한 말이다. 이 법조인의 얘기대로 2005년은 ‘법조계 대변혁’의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변화의 첫 단추는 ‘법조 3륜’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검찰총장, 대한변협 회장의 교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점차 대법관을 비롯한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고위 검사들의 세대교체로 이어질 전망이다.
먼저 변호사들의 대표 단체인 변협 회장에는 2월21일 천기흥 현 서울변호사회 회장의 당선이 확실해 보인다. 검찰총장에는 늦어도 3월 초에 참여정부가 고심해서 선택한 새로운 인물이 지명될 예정이다.
법원의 변화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상황이 예견된다. 당장 2월 변재승 대법관을 시작으로 9월에는 최종영 대법원장, 10월 유지담 윤재식 이용두 대법관, 12월 배기원 대법관이 차례로 임기 만료로 교체된다. 게다가 2006년 7월에는 강신욱 이규홍 이강국 손지열 박재윤 대법관이 교체될 예정이다. 대법관 14명 중 11명이 물갈이되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 셈이다(이 변화는 고스란히 헌법재판소로 이어져 2006년 9월에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5명의 재판관 교체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대법원장은 과연 대법관 출신일까
그 어떤 정권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임기 중반의 ‘사법부 물갈이’란 꽃놀이패를 손에 쥔 사람은 다름 아닌 법조인 출신 노무현 대통령이다. 잘 알려진 대로 노 대통령은 ‘주류’ 법조인들과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에 ‘법조계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짧게나마 판사로 일한 다음에 변호사로 일하다 정계에 진출했다. 변호사 시절 한때는 세무 관련 변호로 큰돈을 벌었으나 세무사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대법원장 인선이 가장 큰 관심 대상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대한민국 서열에 따르면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순인데, 지난해 4월 총선에 따라 여당은 의회 권력을 찾아왔고, 이제 3번과 4번 권력도 개혁적인 세력이 회수해오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때문에 서초동 주변에서는 “청와대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대법원 개혁 프로젝트를 참고하는 것 아닌가” 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상황이다(상자기사 참조).
노 대통령이 어떤 성향의 대법원장을 선택하느냐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대법원장의 법적 지위와 권한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법원장은 모든 대법관에 대한 제청권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3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지명권까지 갖고 있다. 특히 헌법재판소 구성에 관심이 많은 정권으로서는 대법원장 인사를 통해 순식간에 진보 인사로 대법원과 헌재를 채울 수 있다.”(개혁적 성향의 법조인 모임 우리법연구회 소속 A판사)
법원 안팎의 관심은 노 대통령이 대법원장 인선에서도 판사 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전격 임명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인사를 할지에 쏠려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사상 최초로 비(非)대법관 출신 대법원장이 탄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 대통령의 주요 지지기반 가운데 하나인 시민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사법개혁을 위해 비대법관 출신 대법원장을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여연대 사법개혁센터 임지봉 교수는 “대법관 출신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될 경우, 그가 쌓아온 인맥이나 배경으로 미루어 다시 6년간 사법개혁이 지지부진해질 우려가 있다”며 “법조 경력 15년 이상에 해당하는 인물 중에서 폭넓게 적임자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진보적 사법 적극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게 된 얼 워렌 전 대법원장 역시 직업판사가 아닌 정치인 출신이라는 점을 거론한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조준희 전 사법개혁위원장(고등고시 11회), 박재승 변협 회장(사시 13회), 최병모 전 민변 회장(사시 16회),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사시 22회),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사시 23회) 등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외부 출신 대법원장 후보에 오르내린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민변 출신으로 노 대통령과 사법개혁에 대한 인식이 비슷하며, 특히 국가보안법에 대해 뚜렷한 폐지 의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후보군은 향후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인사에서도 다시 거론될 수 있기 때문에 대법원장 인선 파장은 곧바로 헌법재판소를 향해 퍼지리란 전망이다. 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법원장이나 헌법재판소장 가운데 적어도 한 분 정도는 외부 인물로 채워질 각오를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대다수 재조 법조인들은 “법원 행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외부 인사는 자격 미달이다”고 걱정하고 있지만 뚜렷한 반발로 이어질지 미지수다.
중도 성향의 변호사 단체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출범식 장면. 가운데가 이석연 대표 변호사.
대법원장을 내부 인사로 임명할 경우, 윤영철 헌법재판소 소장의 후임만큼은 확실한 개혁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수의 싸움이고 대법원장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3명의 지명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 대통령으로선 대법원장 인선에 승부수를 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변호사 출신 여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은 차기 집권세력을 위해서라도 확실한 인물을 사법부에 챙겨놓을 것이라 믿는다”고 기대감을 표출했다. 이 의원은 또 “헌법재판소에 쌓인 앙금으로 봐서 헌법재판소도 앞으로 개혁적인 인물들로 채워질 공산이 높다”고 분석했다. 검찰 역시 외부 인사 출신이 검찰총장으로 오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기 때문에, 법조계는 한동안 외부 인사에 대한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법조인 인사 검증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대통령민정수석실과 사법개혁의 중심축인 대통령 직속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에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점은 향후 법조계 인사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우선 대통령민정수석에 노 대통령의 20년 지기이자 민변 출신인 문재인 수석(사시 22회)이 버티고 있다. 전해철 민정비서관(사시 29회)이나 김준곤 사회조정비서관(사시 30회), 김선수 사법개혁비서관(사시 27회) 등도 민변 출신이다. 민변의 발기인이자 원로인 한승헌 전 감사원장 역시 사개추위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열린우리당 천정배 대표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법사위원들은 현재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구성, 심지어 검찰총장까지도 개혁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과연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벌써부터 관심거리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며 시국 농성에 들어간 민변 소속 변호사들.
노 대통령이 법원 내부에서 대법원장을 인선한다면 광범위한 공감을 얻는 후보로는 조무제(사시 4회), 이용훈(고시 15회) 전 대법관과 손지열 현 대법관(사시 9회)이 꼽힌다.
손 대법관은 주류 법관의 대표적 인물. 손동욱 전 대법관의 아들로 대를 이어 대법관에 재직하고 있으며,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뿐 아니라 법조계에 들어와서도 30년 내내 최선두로 질주해왔다. 합리적인 판결과 풍부한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사법권 독립의 중책을 책임질 적임자라는 평가다. 한마디로 법원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인 셈이다.
두 번째 후보는 얼마 전 퇴임한 ‘청빈 법관의 상징’ 조 전 대법관이다. 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법관”이라고 말했을 만큼 높은 도덕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부산 출신(동아대)으로 오랜 기간 지역판사(향판)를 거쳐 비주류 판사까지 아우르는 장점을 갖고 있으나 법원 내의 행정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조 전 대법관을 잘 아는 한 법조계 인사는 “외부에는 청빈 법관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대쪽 같은 선비 기질을 갖고 있는 분이어서 노 대통령으로선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임 대한변협 회장이 확실시되고 있는 천기흥 후보.
법원의 바람이라면 이들 세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 대법원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 않다. 법원 내부에서 좋아하는 인물은 높은 개혁 의지를 담보해낼 수 없다는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똘똘 뭉친 보수 변협 회장 쟁취
법조계의 인사에 대한 ‘역풍’도 불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본격적인 보-혁 대결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분석까지 나오기 시작한 것. 서울변호사회는 1월31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정기총회를 열어 천기흥 변호사를 제43대 변협 회장 후보로 선출했다. 1926명의 회원들이 참석한 이날 정기총회에서 천 변호사는 김성기(고시 16회) 변호사를 접전 끝에 64표 차이로 눌렀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천 후보가 보수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김 후보는 민변 회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활동에 나선 점이다.
이날 총회는 투표장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국내 대형 로펌 변호사들까지 총동원되다시피 하며 서울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대거 출석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연설에 나선 두 후보는 “법률 개방에 대비하는 등 변호사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보-혁 대결 양상을 띠었다는 평.
이날 투표에 참석한 한 변호사는 “권력화한 민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필연적으로 변협 회장은 보수적 인물이 맡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앞섰다”고 털어놓았다. 보수적인 변호사들이 새삼 변협 회장에 주목한 이유는 변협 회장이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의 주요 위원일 뿐만 아니라 법조 일원화 시대가 도래하면 변호사의 판사 추천권을 갖기 때문.
인사 태풍을 앞둔 재조 인사들의 표정은 씁쓸하다. 이들은 대부분 “법원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사를 통해 법원을 흔들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의 사법부가 아닌 ‘당신들만의 사법부’로 지내왔기 때문에 물갈이가 꼭 필요한 시점”이라 받아치고 있다. 이미 사법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일환으로 국민의 재판 참여 제도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는 장차 법관의 50%를 다양한 경험을 가진 법조인으로 채우기로 합의한 바 있다. 다원화된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차원이다. 현재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 가운데는 진보적 사법 적극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법조인들이 아직 소수다. 결국 법조계의 인사 태풍도 예상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