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6·25전쟁 때까지 모든 전란은 이 고모산성 길을 거쳐갔다.
새 길이 열리면 옛길은 쇠퇴한다. 이화령이 생기면서 문경새재가 잊히고, 이화령터널이 생기면서 이화령이 잊히고,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 길이 잊혔다. 그렇게 잊힌 길들이 많다. 하지만 요즘은 전통이 상품화되면서 옛길도 새삼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더욱이 참살이(웰빙) 바람이 불고 자연 속에서 걷는 트래킹이 여행의 목적이 된 세상이니, 옛길은 훌륭한 문화상품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 옛길을 가장 발빠르게, 지역 전략상품으로 포장해 홍보하고 있는 곳이 문경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려 서울부터 문경까지의 152km 길을 2시간도 안 돼 다다를 수 있게 됐다. 접근성이 좋아졌으니 외지 사람도 쉽게 불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경에 잘 알려진 옛길로 문경새재가 있다. 문경 제1 관문인 조흘관에서부터 고갯마루인 제3 관문 조령관까지 10km는 차량이 통행하지 않는 흙길이어서 최고의 트래킹 코스로 꼽힌다.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관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이 있었던 조령원터, 길 가던 이들이 들렀던 옛 주막, 새로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하던 교귀정, 조선 후기에 세워진 ‘산불 됴심’ 표석, 고려 공민왕의 행궁이 있었던 어류동 대궐유지를 거쳐 고갯마루에 서게 된다. 조령관이 있는 고갯마루를 넘으면 충청도 땅 충주 수안보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선비들이 이 길을 따라 한양을 오갔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이요,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문경새재를 거쳐갔다. 게다가 문경(聞慶)은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곳이 아니던가.
토끼비리. 바위 위의 움푹 파인 곳이 짚신을 신고 지나다녔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발자국이다.
현재 하늘재는 문경 관음리에서 올라가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고, 충주 미륵사지로 내려가는 길은 옛길 그대로 숲이 우거진 산길이다. 숲길은 두 사람이 활개 치며 걸을 만한데, 내리막으로 2km 정도 걸으면 미륵사지가 나온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여행사에서 문경 하늘재에 관광객을 풀어놓고, 미륵사지 주차장에 버스를 대기시키는 상품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하늘재에서 내려가면 미륵사지의 입장료는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문경에 문경새재 하늘재보다도 훨씬 멋들어진 옛길이 있다. 일제시대 때 영남 제1경으로 꼽혔던 진남교반 일대로, 이 주변에 고모산성 길과 토끼벼랑길이 있다. 교반은 두 개 이상의 다리가 있을 때 붙이는 명칭인데, 새롭게 놓은 두 개의 다리 모습이 태극문양으로 굽이치는 물줄기 산자락과 어우러져 자못 신기하고 화려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철길 하나에 다리가 세 개나 놓여 어수선하지만, 산세와 물줄기는 예사롭지 않다. 더구나 진남교반 위쪽의 복원된 고모산성은 마치 산마루에 흰 띠를 둘러놓은 듯이 굳건하다.
토끼비리에서 바라본 진남교반. 다리들이 모두 한곳으로 몰린 요새다(왼쪽) 기적소리 멈춘 철로에 새로운 레포츠 철로자전거가 달린다.
이 길을 처음 낸 사람이 왕건이라고 한다.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남하하다가 이곳에서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도망하는데, 그 토끼를 쫓아가다 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을 발견하고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토천(兎遷), 토끼비리(벼루·벼랑)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고모산성의 성황당 앞 돌고개. 떡집 아가씨와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길목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영남대로를 치고 올라올 때 이 길목에 이르러서는 군사가 지키고 있을까봐 두번 세번 염탐한 뒤에, 병력이 지키지 않는 것을 알고 춤추면서 지나갔다고 하는 길이다.
토끼비리는 가슴 아픈 길이고 놀라운 길이며, 걷기에 아까운 길이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옛일을 되새김질하는 일이기도 하다. 굳이 지난 일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그 속에 이 땅에서 살다 간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토끼비리를 내려오면 석탄을 운반하다 이제 긴 휴식에 들어간 철길을 건너게 된다. 문경시는 이 철길을 활용, 철로자전거를 개발해 운영할 예정이다. 반년 동안의 시험 운행을 마치고, 2005년 2월부터 운행할 계획이다. 옛길에 새로운 길 하나가 보태지는 것이다. 옛길이 새 길이 되기도 하는 게 또한 세상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