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미국 대선의 승부를 바꿀 뻔했던 TV 정치토론. 전 세계 수억명의 인구가 지켜봤을 이 토론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정책에 대한 팽팽한 대결도 보여줬지만 그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누가 더 친근한 인상을 주는지가 승패의 초점이 돼버렸다는 것을 드러낸 한 편의 쇼였다.
누가 봐도 케리가 완승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케리는 전체 게임에서 이기고도 이 같은 TV 토론의 속성이 증폭시킨 ‘실책’ 하나 때문에 승기를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화근은 3차례의 토론을 통해 가장 논란이 됐던 단 한마디 발언이었다. 이라크전쟁이나 경제문제와 같은 본질적이고 굵직굵직한 주제가 아니라, 체니 부통령의 동성애자 딸에 대한 언급이었다. 물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별로 문제 될 게 없는 이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키운 건 의도적으로 발끈하는 반응을 보인 체니 측의 계산과 친공화당 성향 방송사들의 ‘공조체제’였다.
그럼에도 케리의 발언은 몇 가지 점에서 미국 사회의 요즘 분위기를 비춰주는 반사경 구실을 했다. 케리의 이 발언은 무엇보다 케리에 대한 부시 측의 공격 전략인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판이 먹혀드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패착이 됐다.
사실 이번 선거전 내내 케리가 고전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사내답지 못하다’는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해댄 부시 측의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고, 케리는 ‘좀 모자라 보이지만 남자답고 화끈한 부시’와 대비되는 이미지로 굳어버렸다. 베트남전 참전 영웅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낙인이었을 것이다.
이번 방송 토론은 그걸 극복하는 데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역공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는 것은, 그가 ‘남자다움에 대한 신봉’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가 부활하고 있는 미국 사회 저변의 의식을 주도면밀하게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대선을 계기로 표출된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마치 50년대의 ‘단순성’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차와 동정(Tea and Sympathy)’이라는 영화 속의 50년대 현실과 지금의 그것은 상당히 닮아 있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톰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50년대 미국 사회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있다.
톰은 ‘정상적인 남자’들이 보기엔 비정상이다. 다른 사내아이들처럼 거친 운동경기에 흥미를 느끼는 대신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옷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톰은 하숙집의 동급생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그를 ‘동정’하는 듯한 유일한 친구인 축구팀 주장도 그에게 ‘남자답게 걷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편견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그를 축구팀 감독 아내인 하숙집 여주인만은 진정으로 이해해준다. 그리고 톰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자신을 허락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50년대는 매카시 광풍(미국 공화당 출신 상원의원 매카시가 1950년 2월 미국 정부 내의 적색 분자 및 그 동조자 200여명의 추방을 요구한 데서 발단한 일련의 정치적 동향)에 의해 동성애자는 공산주의와 같은 불순분자로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경찰은 게이바 등을 급습해 수천명씩의 동성애자들을 체포했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동성애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공포 분위기는 동성애자인 남편 때문에 행복한 중산층의 삶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한 주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파 프럼 헤븐(Far From Heaven)’에서도 묘사돼 있다.
그러나 ‘차와 동정’은 동성애에 대한 영화로서보다는 톰을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수 남성들이 신봉하는 ‘남자다움’에 대한 고발로 읽을 때 당대 사회에 대한 이 영화의 풍자와 독설이 더 분명해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누가 더 진짜 남자답고 용기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남자다움의 화신’으로 묘사된 축구팀 감독은 그러나 사실은 자신과 아내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 즉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회피하려 한다. 영화는 스스로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남자들만으로 이뤄진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폐쇄적인 ‘동성애’를 나누고 있다고 암시한다.
부시가 굳건히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세계인들의 탄식을 자아낸 지금의 불가사의한 현실, 톰이 부닥쳤던 그 현실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케리가 완승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케리는 전체 게임에서 이기고도 이 같은 TV 토론의 속성이 증폭시킨 ‘실책’ 하나 때문에 승기를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화근은 3차례의 토론을 통해 가장 논란이 됐던 단 한마디 발언이었다. 이라크전쟁이나 경제문제와 같은 본질적이고 굵직굵직한 주제가 아니라, 체니 부통령의 동성애자 딸에 대한 언급이었다. 물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별로 문제 될 게 없는 이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키운 건 의도적으로 발끈하는 반응을 보인 체니 측의 계산과 친공화당 성향 방송사들의 ‘공조체제’였다.
그럼에도 케리의 발언은 몇 가지 점에서 미국 사회의 요즘 분위기를 비춰주는 반사경 구실을 했다. 케리의 이 발언은 무엇보다 케리에 대한 부시 측의 공격 전략인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판이 먹혀드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패착이 됐다.
사실 이번 선거전 내내 케리가 고전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사내답지 못하다’는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해댄 부시 측의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고, 케리는 ‘좀 모자라 보이지만 남자답고 화끈한 부시’와 대비되는 이미지로 굳어버렸다. 베트남전 참전 영웅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낙인이었을 것이다.
이번 방송 토론은 그걸 극복하는 데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역공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는 것은, 그가 ‘남자다움에 대한 신봉’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가 부활하고 있는 미국 사회 저변의 의식을 주도면밀하게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대선을 계기로 표출된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마치 50년대의 ‘단순성’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차와 동정(Tea and Sympathy)’이라는 영화 속의 50년대 현실과 지금의 그것은 상당히 닮아 있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톰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50년대 미국 사회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있다.
톰은 ‘정상적인 남자’들이 보기엔 비정상이다. 다른 사내아이들처럼 거친 운동경기에 흥미를 느끼는 대신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옷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톰은 하숙집의 동급생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그를 ‘동정’하는 듯한 유일한 친구인 축구팀 주장도 그에게 ‘남자답게 걷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편견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그를 축구팀 감독 아내인 하숙집 여주인만은 진정으로 이해해준다. 그리고 톰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자신을 허락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50년대는 매카시 광풍(미국 공화당 출신 상원의원 매카시가 1950년 2월 미국 정부 내의 적색 분자 및 그 동조자 200여명의 추방을 요구한 데서 발단한 일련의 정치적 동향)에 의해 동성애자는 공산주의와 같은 불순분자로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경찰은 게이바 등을 급습해 수천명씩의 동성애자들을 체포했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동성애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공포 분위기는 동성애자인 남편 때문에 행복한 중산층의 삶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한 주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파 프럼 헤븐(Far From Heaven)’에서도 묘사돼 있다.
그러나 ‘차와 동정’은 동성애에 대한 영화로서보다는 톰을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수 남성들이 신봉하는 ‘남자다움’에 대한 고발로 읽을 때 당대 사회에 대한 이 영화의 풍자와 독설이 더 분명해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누가 더 진짜 남자답고 용기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남자다움의 화신’으로 묘사된 축구팀 감독은 그러나 사실은 자신과 아내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 즉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회피하려 한다. 영화는 스스로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남자들만으로 이뤄진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폐쇄적인 ‘동성애’를 나누고 있다고 암시한다.
부시가 굳건히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세계인들의 탄식을 자아낸 지금의 불가사의한 현실, 톰이 부닥쳤던 그 현실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