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통신사도.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도 이웃 나라와의 교류만은 꾸준히 이어 나갔다. 교류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인데, 중국에 대한 외교는 ‘사대(事大)’, 일본과의 외교는 ‘교린(交隣)’이었다. 이 교린 외교의 주역이 바로 ‘통신사’다. 통신사(通信使)는 말 그대로 국서(왕의 서신)를 일본 장군에게 전달하기 위한 사신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말기까지 모두 12차례 파견되었다.
처음 네 번은 전쟁 중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 협상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회답 겸 쇄환(刷還)사’라고 불렀다. 친선 외교를 위한 ‘통신사’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전후 처리가 다 끝난 뒤부터다. 사신의 목적지는 에도막부(江戶幕府) 장군의 거처인 에도, 지금의 도쿄다. 조선 왕조는 일본의 명목상 군주인 천황을 배제하고, 에도막부의 장군을 ‘일본 왕’이라고 부르며 정식 외교 대상자로 삼았다.
천왕 배제 에도막부와 대면
사신은 정사(정3품 이상)·부사(정3품)·종사관(5, 6품) 등 3명으로 구성되었고, 거기에 제술관(기록원)·역관·화가·의사·사자관(서예 담당) 등 임무 수행이나 문화 교류를 위한 많은 인원이 더해져 많을 때는 무려 500명의 대행렬을 이루었다.
이제부터 내가 따라 걸으려는 길은 바로 통신사 행렬이 일본 도쿄로 향한 길이다. 옛길 걷기의 진정한 재미는 막상 길을 걷는 것보다 자료를 뒤지며 길을 알아내는 데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옛길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나도 길을 걷기에 앞서 우선 한국 내 행로를 알기 위해 조선 자료들을, 일본의 길을 알기 위해 일본 문헌을 찾아 뒤졌다.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등 조선시대의 일본 외교 길잡이 책을 보면 ‘노문식(路文式)’이라는 꼭지에 통신사 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노문’이란 통신사가 가는 경로를 적은 여행 일정표 겸 통행증. 통신사 지나가는 길 중간의 마을 수령들은 노문을 보고 사신을 위한 접대 준비를 했으며, 역(驛)에서는 말이나 마부를 마련했다고 한다. ‘노문식’은 관례적으로 통신사가 가는 길을 명시한, 말하자면 ‘관습법’이었다.
1636년 그려진 ‘한국 사신 입황성 행진도’.
통신사들이 일본을 향해 출발하기 전 국왕에 숙배했던 창경궁. 2004년 조선통신사 행렬을 복원한 ‘통신사 행사’ 모습(위부터).
그렇다면 통신사들은 과연 노문식에 적힌 경로를 제대로 지키고 다녔을까. 과연 몇 박 며칠 만에 일본에 도착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사신이나 수행원들이 남긴 기행문도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기행문들은 중국 사신의 기행 문집인 ‘연행록(燕行錄)’처럼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전집으로 엮여 있는데, 다행히 국역본도 나와 있다. 여행기처럼 재미있게 쓰인 것, 딱딱한 내용의 출장보고서와 같은 것, 한시나 가사 형태인 것 등 저자의 취향에 따라 기술 형식은 제각각이다.
조엄 ‘해양일기’ 경로로 도보 답사
이 자료들을 살펴본 결과를 말하면, 통신사들은 조선 안에서 정해진 길을 걷지 않고 제멋대로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례대로 가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르는 위험한 대장정 도중 고향집에 들러 부모께 인사를 드린 경우다. ‘해유록’의 저자인 제술관 신유한은 일본에 갈 때, 올 때 두 번 다 고향 경북 고령을 찾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두 번째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3사가 일부러 각각 다른 행로를 택한 경우다. 특히 왜란과 호란 이후 3사가 뿔뿔이 흩어져 길을 걸은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데, 세 통신사가 한 마을에 들어갈 경우 그들을 접대하느라 주민 생활에 큰 피해가 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는 부사나 종사관이 죽령, 추풍령 등 경유로를 이용해 부산에 도착하곤 했다.
나는 이렇게 다양한 사례 중에서 1764년 11번째 통신사 행렬의 정사였으며 비교적 상세한 기행문인 ‘해양일기(海木差日記)’를 남긴 조엄(趙日嚴)을 모델로 삼기로 했다. 이제 나는 조엄이 된 기분으로 그와 같은 경로를 걸으며, 같은 곳에서 중화(점심)를 하고, 같은 곳에서 자려 한다. 물론 그는 말을 타고 갔을 테고, 나는 걸어서 가는 것이니 조금 힘이 들긴 하겠지만, 하루 이동거리가 40~50리(약 15~20km) 정도라 도보 답사로는 그만일 것 같다.
이제 출발이다. 통신사는 국왕이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이들은 출발에 앞서 대궐에 들어가 왕 앞에 숙배(肅拜)를 했다. 왕은 일본 장군에게 전달할 국서를 하사하면서, 가서 해결해야 할 외교 현안에 대해 직접 하교하고, 마지막으로 석별의 물품을 하사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 여행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3사는 대궐을 물러나온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숭례문(남대문)에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려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지금의 서울역 맞은편에 있던 남묘(南廟)를 참배하는 것. 남묘는 청계천가에 있는 동묘와 마찬가지로 중국 촉(蜀)나라 용장 관우를 모신 사당인데, 통신사들은 혼자 천 리를 주파한 관우에게 절하며 앞길의 안녕을 기린 것이다.
나도 통신사들이 서울을 떠나며 숙배를 올렸던 창경궁을 찾아 길의 시작을 다짐했다. 가을 단풍과 궁궐의 단청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창경궁에서부터 나의 여정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가볼 만한 곳 ●
하동관
6·25전쟁 직후 영업을 시작한 서울 토박이를 위한 곰탕집. 진한 국물과 날달걀, 깍국(깍두기 국물)이 별미다. 긴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든든히 속 채우는 데 그만이지만, 오후 4시면 문을 닫아버리니 주의해야 한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한화빌딩 방향으로 도보로 3분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