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8

..

‘작은 도서관’으로 큰 감동 일구는 나날

17년간 20만여권 책 기증 김수연 목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10-29 15: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작은 도서관’으로 큰 감동 일구는 나날
    여기,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사춘기 시절 좌우명을 고스란히 지켜온 사람이 있다. 그에게 책은 죽은 아들의 환영이요, 삶의 길잡이면서, 생을 함께해온 동반자다. 사재를 털어 산간벽지와 섬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세운 지 열일곱 해. ‘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의 화두는 그를 지키는 버팀목이다.

    ‘대책 없이’ 책을 좋아하는 김수연 목사(56). 그는 꼼꼼하면서도 낙천적이고 풍요로우면서도 따뜻한 이다. 그가 17년 동안 40여곳의 시골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세우며 기증한 책(20만여권)은 어지간한 대학도서관 장서 수를 훌쩍 넘는다. 꼼꼼하게 따져보고 고른 양서를 산간벽지와 섬마을을 찾아 전해준 건 아들의 죽음에서 비롯했다.

    前 동아방송·KBS 기자 … 아들 먼저 보내고 삶 바꿔

    그는 스무 해 전 화재로 여섯 살배기 아들을 하늘로 보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떠나보낸 아들을 대신한 게, 도서관 한 번 출입 못해본,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는 산간 및 도서벽지의 아이들이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삶의 근원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시작한 게 목사 일이고, ‘작은 도서관’ 세우기다.

    “죽은 아들놈이 제 삶을 바꿔놓았습니다. 삶의 근원을 찾고자 1986년 신학대에 입학했어요(그는 목사가 되기 전 동아방송과 KBS에서 기자로 일했다). 좋은 일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좋은 책이 반듯한 사람, 훌륭한 세상을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해보고 싶었습니다. ‘작은 도서관’에서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면 빙그레 웃는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요.”



    첫 번째 ‘작은 도서관’이 세워진 곳은 전북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 들머리에 자리한 원천마을. 물 맑고 산 좋기로 소문난 이곳에 87년 ‘작은 도서관’을 세웠다.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의 행복해하던 모습은 지금도 새롭다. 강원도의 산골마을, 남도의 섬마을…. 그렇게 그는 책을 원하는 ‘아들’이 있는 곳이라면, 다른 일 모두 제쳐두고 달려갔다.

    “우리가 자랄 때와 달리 요즘은 책이 남아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책 귀한 줄 모른다고도 하고요. 그게 다 도시에 국한된 얘기예요. 시골마을에 한번 가보세요. 아이들은 책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합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요. 책 읽기 캠페인을 벌이거나 독서 주간을 지정하는 일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하려면 책을 눈앞에 갖다줘야 합니다. ‘작은 도서관’은 책을 읽게끔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발적 동참 언제든 환영 … 마음이 부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책 읽는 걸 사랑하고, 근사한 책을 만나면 사지 않곤 못 배겼다. 책을 사 모으고 읽고 남들에게 권하는 재미는 대단했다. 그런 그가 텅 빈 폐교에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을 만들고 나서 느낀 ‘엑스터시’는, 그저 해맑게 웃는 시골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리라.

    “글쎄요. 제 어릴 적 꿈이 책이 꾹꾹 쌓인 서가를 갖는 거였어요. 전국 구석구석에 작은 도서관을 세웠으니 꿈을 이룬 셈이네요. 새로 세운 도서관을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한 트럭 분량의 실어간 책을 차근차근 정리해 도서관에 앉힐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요.”

    ‘작은 도서관’으로 큰 감동 일구는 나날

    김목사가 한 중학생에게 독서지도를 하고 있다.

    ‘바라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고 한다. 폐교가 있는 시골마을을 찾아가 도서관을 세워주겠다고 나서면 ‘책 파는 장사치는 아닌지’ 오해부터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느닷없이 찾아와 수천 권의 책을 내놓겠다는 그를 보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고.

    그러나 가는 곳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곧 하나가 됐다. 타고난 인품과 호방한 성격 탓이 아닌가 싶다. 책이 앉혀져 도서관이 문을 열면 마을에선 잔치가 벌어진다. 그는 백일장, 동화구연 등 행사를 준비하고 동네 사람들은 한바탕 놀이마당을 벌인다. 놀이마당이 벌어진 ‘작은 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에게 더없이 좋은 문화공간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폐교나 마을회관에 들어선 도서관은 문화센터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해나가는 게 제 바람이기도 하고요.”

    요즘 그의 고민은 책을 보내줄 ‘능력’이다. 해마다 대여섯 곳의 도서관을 만들고자 노력하지만 여간 힘에 부치는 게 아니다. 마을이나 교회 보육원 학교 등에서 운영계획서를 받아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주는데, 신청한 마을 모두의 희망을 들어주고 싶다는 바람이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도서관 하나를 세우는 데 보통 3000만~4000만원 정도가 드는데, 장소는 마을에서 제공하지만 책을 채워넣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정작 도서관이 필요한 오지에선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씨를 뿌리면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면 됩니다. 도서관 관장은 교장선생님이나 마을 이장님 등이 맡으면 되고요. 원하는 곳에 모두 ‘작은 도서관’을 세워줄 능력도 안 되면서 말로만 공치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작은 도서관’ 세우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분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국력은 독서량에 비례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부유한 나라를 가진다는 얘기예요. 작은 도서관 세워주기가 국가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절재 김종서 장군의 후손이다.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좌우명은 책을 소중히 하라는 절재의 가르침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사재를 털어 책값을 댔으니 그를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법하다. 직장도 그만뒀고 모은 돈을 모두 ‘작은 도서관’에 부은 건 맞지만, 그는 “단지 마음이 부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아직은 따뜻해서인지, ‘작은 도서관’ 세우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었다고 한다.

    그는 10월28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독서 진흥에 이바지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 살아오며 받은 상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게 그의 말. 그도 그럴 것이 “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일곱 해에 걸친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수상 소식을 들은 뒤 “상을 받게 됐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일생의 업’을 더 열심히 일궈가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 동영상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있어요.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 사람이 좋아집니다. 사람이 좋아지면 세상이 좋아지고요. ‘작은 도서관’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도서관’은 죽은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이면서 제 삶의 등대입니다. 생을 함께한 동반자이기도 하고요. 남을 위한 삶이 바로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평생 ‘작은 도서관’을 세워나갈 거예요.”



    사람과 삶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