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살인한 사람은 없다.”
이라크 침공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영국 정보당국의 보고서 ‘이라크는 45분 안에 생화학 무기를 실전 배치할 수 있다’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작성됐다는 버틀러 보고서가 발표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블레어 총리가 국민을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 정보원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며 정보당국의 총체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블레어 총리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버틀러 보고서를 받아든 한 기자는 “그렇다면 이라크 침략이라는 살인행위가 일어났는데 살인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냐”며 현실을 비꼬기도 했다. 버틀러 보고서의 발표를 계기로 여당인 노동당뿐 아니라 야당,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도 블레어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연 블레어 총리는 2005년 봄 총선 전에 물러날 것인가.
2003년 3월 미국과 영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이 벌어진 뒤 1년 반이 지났다. 전쟁의 명분이 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고 결론내렸던 영국 정보당국의 보고서는 잘못됐음이 드러났다. 이런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은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음이 버틀러 보고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테러 위험 더 증가 총리 책임져라”
이런 상황인데도 당시 총리실 공보수석 앨리스타 캠벨은 ‘이라크, 생화학 무기 45분 안에 실전 배치’를 거의 단정적으로 기술하도록 정보당국에 주문했다. “공보수석이 정보를 미화했다”고 발표한 BBC 방송 보도로 BBC와 총리실 간에 설전이 오갔으며, 이 와중에 BBC의 정보원으로 지목된 켈리 박사가 자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어쨌든 버틀러 보고서는 총리가 정보당국의 보고서를 근거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기 때문에 국민을 속인 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정보당국의 총체적인 잘못이지, 어느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고서 발표 이후 하원에 출석한 블레어 총리는 “사담 후세인이 없는 세계가 훨씬 안전하다”며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러나 총리의 강변은 그야말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민영방송 ITV가 시청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3분의 2가 “이라크 침략으로 인해 테러의 위험이 증가했다”고 대답했다. 이라크 침략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블레어에게는 이런 국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다.
지난해 3월 이라크 침략 직후 이에 항의해 각료직을 사퇴한 클레어 숏 전 국제개발부 장관은 줄기차게 블레어의 사임을 요구해왔다. 내각과 국민을 기만했고 명분 없는 전쟁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6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 비슷한 시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인 노동당은 참패했다. 지방자치단체와 의회선거에서 노동당은 400석이 넘는 의석을 잃어 제1야당인 보수당과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에 이어 3위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다. 이어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의석의 23%에 그친 19석을 얻는 데 머물렀다. 참패의 원인이 오직 이라크 전쟁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민심이 이 때문에 노동당에서 많이 이탈했다는 점은 노동당 지지자들에게서 확인되고 있다. 참패 이후 노동당 내부에서도 블레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1년 전과 비교해볼 때 요구가 좀더 공공연해졌고 동조하는 의원이 많아졌다.
최근 이런 움직임에 신빙성을 더해준 것은 블레어가 사임을 결심했으나 일부 각료가 만류했다는 보도. 사임을 만류한 각료로 알려진 패트리샤 휴이트 산업부 장관은 총리 공관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노동당 의원들 행보가 결정적 변수
야당인 보수당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당의 약점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하원에서 실시된 이라크 전쟁 표결에서 여당인 노동당 의원의 3분의 1이 전쟁에 반대했다. 당시 보수당이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라크 전쟁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당의 마이크 하워드 총재는 “당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가 오보임을 알았더라면 침략전쟁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블레어 총리를 비판했다. 물론 여당인 노동당은 야당 총재가 내년 봄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표를 겨냥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야당 내 원로들도 블레어 비판에 나서고 있다. 1989년부터 95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보수당의 더글러스 허드는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블레어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영국은 테러 위험에 더 노출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해결에 적극 나선다는 약속도 물거품이 되었다”며 “총리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레어를 사퇴로 몰고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노동당 의원들의 태도다. 중요한 사실은 블레어 정책에 비판적이던 노동당 내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에서도 총리가 차기 선거에 짐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하원에서 겨우 5표 차이로 통과된 대학등록금 인상 법안은 노동당 내 좌·우를 불문하고 블레어 총리가 주도하고 있는 정책에 대한 노동당 의원들의 불만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었다. 노동당이 현재 하원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상당수의 노동당 의원이 블레어 총리의 정책을 거부한 셈이다. 또 6월 지방선거 직전에 노동당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절반이 넘는 당원들이 블레어 총리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패배할 확률이 높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사퇴압력은 계속해서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일부 노동당 의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뛰어난 노동당 총리를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1979년부터 97년까지 18년간 야당의 설움을 견디고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데는 토니 블레어가 내세운 `신노동당 강령의 덕이 컸기 때문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토니 블레어에 대한 사퇴압력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정치가에게는 실리와 명분이 중요하다. 블레어가 사퇴압력에 몰려 물러난다면 큰 치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내년 봄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 결과에 따라 물러날 확률이 높다.”
블레어 총리가 물러날 경우 노동당 총재는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다. 94년 전당대회 직전 블레어 총리의 라이벌이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경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블레어 총리가 브라운을 차기 총재로 지지하겠다는 막후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나돌고 있다. 블레어와 브라운 모두 이 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당시 밀약이 일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블레어 총리가 적절한 사퇴 시기를 선택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상황에 떠밀려 추한 모습으로 사퇴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적당한 시기를 가름해서 사퇴하는 정치인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의회정치의 모국이라는 영국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이라크 침공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영국 정보당국의 보고서 ‘이라크는 45분 안에 생화학 무기를 실전 배치할 수 있다’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작성됐다는 버틀러 보고서가 발표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블레어 총리가 국민을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 정보원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며 정보당국의 총체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블레어 총리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버틀러 보고서를 받아든 한 기자는 “그렇다면 이라크 침략이라는 살인행위가 일어났는데 살인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냐”며 현실을 비꼬기도 했다. 버틀러 보고서의 발표를 계기로 여당인 노동당뿐 아니라 야당,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도 블레어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연 블레어 총리는 2005년 봄 총선 전에 물러날 것인가.
2003년 3월 미국과 영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이 벌어진 뒤 1년 반이 지났다. 전쟁의 명분이 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고 결론내렸던 영국 정보당국의 보고서는 잘못됐음이 드러났다. 이런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은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음이 버틀러 보고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테러 위험 더 증가 총리 책임져라”
이런 상황인데도 당시 총리실 공보수석 앨리스타 캠벨은 ‘이라크, 생화학 무기 45분 안에 실전 배치’를 거의 단정적으로 기술하도록 정보당국에 주문했다. “공보수석이 정보를 미화했다”고 발표한 BBC 방송 보도로 BBC와 총리실 간에 설전이 오갔으며, 이 와중에 BBC의 정보원으로 지목된 켈리 박사가 자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어쨌든 버틀러 보고서는 총리가 정보당국의 보고서를 근거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기 때문에 국민을 속인 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정보당국의 총체적인 잘못이지, 어느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고서 발표 이후 하원에 출석한 블레어 총리는 “사담 후세인이 없는 세계가 훨씬 안전하다”며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러나 총리의 강변은 그야말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민영방송 ITV가 시청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3분의 2가 “이라크 침략으로 인해 테러의 위험이 증가했다”고 대답했다. 이라크 침략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블레어에게는 이런 국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다.
지난해 3월 이라크 침략 직후 이에 항의해 각료직을 사퇴한 클레어 숏 전 국제개발부 장관은 줄기차게 블레어의 사임을 요구해왔다. 내각과 국민을 기만했고 명분 없는 전쟁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6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 비슷한 시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인 노동당은 참패했다. 지방자치단체와 의회선거에서 노동당은 400석이 넘는 의석을 잃어 제1야당인 보수당과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에 이어 3위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다. 이어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의석의 23%에 그친 19석을 얻는 데 머물렀다. 참패의 원인이 오직 이라크 전쟁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민심이 이 때문에 노동당에서 많이 이탈했다는 점은 노동당 지지자들에게서 확인되고 있다. 참패 이후 노동당 내부에서도 블레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1년 전과 비교해볼 때 요구가 좀더 공공연해졌고 동조하는 의원이 많아졌다.
최근 이런 움직임에 신빙성을 더해준 것은 블레어가 사임을 결심했으나 일부 각료가 만류했다는 보도. 사임을 만류한 각료로 알려진 패트리샤 휴이트 산업부 장관은 총리 공관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노동당 의원들 행보가 결정적 변수
야당인 보수당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당의 약점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하원에서 실시된 이라크 전쟁 표결에서 여당인 노동당 의원의 3분의 1이 전쟁에 반대했다. 당시 보수당이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라크 전쟁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당의 마이크 하워드 총재는 “당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가 오보임을 알았더라면 침략전쟁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블레어 총리를 비판했다. 물론 여당인 노동당은 야당 총재가 내년 봄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표를 겨냥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야당 내 원로들도 블레어 비판에 나서고 있다. 1989년부터 95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보수당의 더글러스 허드는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블레어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영국은 테러 위험에 더 노출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해결에 적극 나선다는 약속도 물거품이 되었다”며 “총리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레어를 사퇴로 몰고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노동당 의원들의 태도다. 중요한 사실은 블레어 정책에 비판적이던 노동당 내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에서도 총리가 차기 선거에 짐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하원에서 겨우 5표 차이로 통과된 대학등록금 인상 법안은 노동당 내 좌·우를 불문하고 블레어 총리가 주도하고 있는 정책에 대한 노동당 의원들의 불만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었다. 노동당이 현재 하원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상당수의 노동당 의원이 블레어 총리의 정책을 거부한 셈이다. 또 6월 지방선거 직전에 노동당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절반이 넘는 당원들이 블레어 총리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패배할 확률이 높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사퇴압력은 계속해서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일부 노동당 의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뛰어난 노동당 총리를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1979년부터 97년까지 18년간 야당의 설움을 견디고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데는 토니 블레어가 내세운 `신노동당 강령의 덕이 컸기 때문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토니 블레어에 대한 사퇴압력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정치가에게는 실리와 명분이 중요하다. 블레어가 사퇴압력에 몰려 물러난다면 큰 치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내년 봄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 결과에 따라 물러날 확률이 높다.”
블레어 총리가 물러날 경우 노동당 총재는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다. 94년 전당대회 직전 블레어 총리의 라이벌이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경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블레어 총리가 브라운을 차기 총재로 지지하겠다는 막후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나돌고 있다. 블레어와 브라운 모두 이 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당시 밀약이 일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블레어 총리가 적절한 사퇴 시기를 선택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상황에 떠밀려 추한 모습으로 사퇴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적당한 시기를 가름해서 사퇴하는 정치인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의회정치의 모국이라는 영국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