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7월13일 밤 화장실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와 함께 유영철씨(34)는 망치로 출장마사지사 임모씨(27)의 몸을 내리쳤다. 화장실 벽에 임씨의 선혈이 낭자하게 튀었고 유씨의 얼굴엔 잠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머릿속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증오만이 가득했다.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으로 일요일인 7월18일 낮, 휴일의 평안함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유씨. 20대 출장마사지사와 부유층 노인들을 타깃으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여온 그의 삶에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소외’가 깊이 스며 있었다. 유씨는 “이 일을 계기로 여성들이 몸을 함부로 놀리지 않고, 부유층도 각성했으면 한다”고 엽기적 범행의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그의 삶이 엇나가기 시작한 걸까.
가난과 간질 … 14차례 교도소 드나들며 7년간 격리
유씨는 1970년 노동일로 생계를 꾸려가던 가정의 3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중학교 1학년 때인 84년 아버지가 지병(정신분열증과 간질)으로 사망하면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고 밝혔다. 중학교 때 실시한 IQ검사에서 140 이상의 정도의 수치가 나올 정도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목을 잡는 가난과 간질이란 질병이 항상 그를 옭아맸다. 94년 그의 둘째 형 또한 32살의 나이에 간질 증세로 사망하면서, 죽음의 공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 역시 93년부터 95년까지 간질 증세로 국립서울병원에서 지속적으로 진료를 받으며 고단한 생을 이어갔다. 하지만 유씨의 어머니는 “(영철이의) 아버지와 형이 간질로 사망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그의 진술을 부인했다. 아버지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유씨는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만화책을 좋아하던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원에 들어가면서 되돌릴 수 없는 범죄의 늪에 빠져들고 만다. K공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88년 6월 그는 절도 혐의로 처음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소년원은 교화의 공간이 아닌 범죄자로 발을 내딛는 ‘인생의 새 출발점’이었다.
유씨의 삶의 유일한 출구는 사랑과 결혼이었다. 그는 21살 때인 91년 마사지사인 황모씨와 결혼, 아들을 뒀지만 이후 14차례의 절도·성폭행 등으로 7년 동안 교도소에서 보내며 사회와 철저히 격리됐다. 2000년 3월 특수절도 등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2002년 5월경 아내가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했다. 아내와의 이혼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는 등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보이기도 했다. 이혼을 당한 직후 출감하면 이혼한 아내를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열한 살짜리 아들 때문에 이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혼은 그에게 ‘여성 혐오증’을 불러온 계기로 작용했다.
가족마저 등을 돌리면서 생긴 세상에 대한 증오심은 ‘살인행각’으로 나타났다. 2003년 9월11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13일 만에 서울 신사동의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하면서 그는 부유층 노인 살인마로 변했다. 자신의 불행은 모두 부유층이 자신의 몫을 앗아가며 비롯됐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어 전화방에서 만난 한 여성과 사랑을 하면서 그의 광기는 잠시 숨을 죽였지만 그 여성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던 꿈이 물거품이 된 뒤 실연의 상처는 살인마의 광기를 되살렸다. 이후 그의 범죄 대상은 그가 사랑에 실패했던 ‘직업 윤락여성’으로 수정됐다.
치밀하고 편집광적 성격 범죄 행각서 드러나
유씨는 범행 대상을 고르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미적 기준을 철저히 따랐다. 이전부터 출장마사지 여성을 종종 불러왔던 그는 미인이 아니거나, 키가 너무 크거나 작은 여성일 경우 퇴짜를 놓곤 했다. 일단 그의 원룸에 발을 들여놓은 출장마사지 여성은 하루 안에 살해했다. 그는 DNA검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이들 여성과 성관계도 하지 않았다.
유씨의 치밀하고 편집광적인 성격은 범죄 행각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경찰로 교묘히 신분을 위장해 이웃을 속이고, 윤락녀들한테서 금품을 뜯어내 생계비를 마련했다. 교도소에서 배운 포토샵 기술을 바탕으로 경찰공무원증을 위조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컴퓨터와 프린터,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해 앞면에 사진과 미군헌병 휘장을 넣고, 서울경찰청 소속 정보과 최모 경장 이름을 넣어 감쪽같이 경찰신분증을 만들었다. 교도소에서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을 땄고, 웹디자인 포토샵 6.0 사용법을 배웠다. 사회 적응을 위해 배운 기술이 범죄의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다.
경찰 수사를 받으면서도 유씨는 수사관을 속이는 노회한 수법도 선보였다. 7월15일 경찰에 처음 붙잡힌 그는 22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가 이후 횡설수설하는 등 수사팀을 의도적으로 속였고 간질 증세를 보여 경찰이 수갑과 포승줄을 풀어준 틈을 타 도주하기도 했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유씨가 현장검증에서 자신이 실제 범인이 아니면서 TV 뉴스 등으로 보고 거짓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계산된 ‘진술’을 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도소 수감 시절 신창원과 함께 있었다. 신창원과 팔씨름, 달리기 등을 해 모두 이겼다”는 등 거짓말로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7월18일 언론에 공개된 유씨의 방은 놀랄 만큼 정갈하고 깔끔했다. 그의 치밀한 범행 뒤처리를 연상시키듯 정돈된 모습이었다. 책꽂이엔 여성잡지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주제별로 신문을 스크랩해놓았다. 그는 ‘여성’이란 소재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애정결핍을 해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방에서 발견된 ‘사진 속의 사랑’이란 자작시는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틋함을 드러내고 있다. 비뚤어진 그의 범죄 행각 뒤에는 ‘가족애에 대한 갈구’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따라다녔다.
“온 가족이/ 모였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모처럼 많은 대화 나누며/ 웃을 수 있던 자리였습니다. 너무나 행복해/ 그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오랜 시간 흘러/ 그때의 사진을 다시 꺼냈습니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가족 모두를 껴안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품에 자식 모두를 안고 싶어/ 정말 힘들게도 겨우 모두를 안고 계셨습니다”
다시 체포된 뒤 엽기적 범죄 행각을 담담히 털어놓은 유영철씨는 도주 직전인 7월15일 그의 어머니와 만난 자리에서 말없이 울기만 했다. 비뚤어진 삶의 행로, 그 끝에 선 유씨는 이제 자신에 대한 법의 냉엄한 심판을 기다려야 할 처지다.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으로 일요일인 7월18일 낮, 휴일의 평안함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유씨. 20대 출장마사지사와 부유층 노인들을 타깃으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여온 그의 삶에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소외’가 깊이 스며 있었다. 유씨는 “이 일을 계기로 여성들이 몸을 함부로 놀리지 않고, 부유층도 각성했으면 한다”고 엽기적 범행의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그의 삶이 엇나가기 시작한 걸까.
가난과 간질 … 14차례 교도소 드나들며 7년간 격리
유씨는 1970년 노동일로 생계를 꾸려가던 가정의 3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중학교 1학년 때인 84년 아버지가 지병(정신분열증과 간질)으로 사망하면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고 밝혔다. 중학교 때 실시한 IQ검사에서 140 이상의 정도의 수치가 나올 정도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목을 잡는 가난과 간질이란 질병이 항상 그를 옭아맸다. 94년 그의 둘째 형 또한 32살의 나이에 간질 증세로 사망하면서, 죽음의 공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 역시 93년부터 95년까지 간질 증세로 국립서울병원에서 지속적으로 진료를 받으며 고단한 생을 이어갔다. 하지만 유씨의 어머니는 “(영철이의) 아버지와 형이 간질로 사망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그의 진술을 부인했다. 아버지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유씨는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만화책을 좋아하던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원에 들어가면서 되돌릴 수 없는 범죄의 늪에 빠져들고 만다. K공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88년 6월 그는 절도 혐의로 처음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소년원은 교화의 공간이 아닌 범죄자로 발을 내딛는 ‘인생의 새 출발점’이었다.
유씨의 삶의 유일한 출구는 사랑과 결혼이었다. 그는 21살 때인 91년 마사지사인 황모씨와 결혼, 아들을 뒀지만 이후 14차례의 절도·성폭행 등으로 7년 동안 교도소에서 보내며 사회와 철저히 격리됐다. 2000년 3월 특수절도 등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2002년 5월경 아내가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했다. 아내와의 이혼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는 등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보이기도 했다. 이혼을 당한 직후 출감하면 이혼한 아내를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열한 살짜리 아들 때문에 이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혼은 그에게 ‘여성 혐오증’을 불러온 계기로 작용했다.
가족마저 등을 돌리면서 생긴 세상에 대한 증오심은 ‘살인행각’으로 나타났다. 2003년 9월11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13일 만에 서울 신사동의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하면서 그는 부유층 노인 살인마로 변했다. 자신의 불행은 모두 부유층이 자신의 몫을 앗아가며 비롯됐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어 전화방에서 만난 한 여성과 사랑을 하면서 그의 광기는 잠시 숨을 죽였지만 그 여성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던 꿈이 물거품이 된 뒤 실연의 상처는 살인마의 광기를 되살렸다. 이후 그의 범죄 대상은 그가 사랑에 실패했던 ‘직업 윤락여성’으로 수정됐다.
치밀하고 편집광적 성격 범죄 행각서 드러나
유씨는 범행 대상을 고르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미적 기준을 철저히 따랐다. 이전부터 출장마사지 여성을 종종 불러왔던 그는 미인이 아니거나, 키가 너무 크거나 작은 여성일 경우 퇴짜를 놓곤 했다. 일단 그의 원룸에 발을 들여놓은 출장마사지 여성은 하루 안에 살해했다. 그는 DNA검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이들 여성과 성관계도 하지 않았다.
유씨의 치밀하고 편집광적인 성격은 범죄 행각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경찰로 교묘히 신분을 위장해 이웃을 속이고, 윤락녀들한테서 금품을 뜯어내 생계비를 마련했다. 교도소에서 배운 포토샵 기술을 바탕으로 경찰공무원증을 위조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컴퓨터와 프린터,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해 앞면에 사진과 미군헌병 휘장을 넣고, 서울경찰청 소속 정보과 최모 경장 이름을 넣어 감쪽같이 경찰신분증을 만들었다. 교도소에서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을 땄고, 웹디자인 포토샵 6.0 사용법을 배웠다. 사회 적응을 위해 배운 기술이 범죄의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다.
경찰 수사를 받으면서도 유씨는 수사관을 속이는 노회한 수법도 선보였다. 7월15일 경찰에 처음 붙잡힌 그는 22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가 이후 횡설수설하는 등 수사팀을 의도적으로 속였고 간질 증세를 보여 경찰이 수갑과 포승줄을 풀어준 틈을 타 도주하기도 했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유씨가 현장검증에서 자신이 실제 범인이 아니면서 TV 뉴스 등으로 보고 거짓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계산된 ‘진술’을 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도소 수감 시절 신창원과 함께 있었다. 신창원과 팔씨름, 달리기 등을 해 모두 이겼다”는 등 거짓말로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7월18일 언론에 공개된 유씨의 방은 놀랄 만큼 정갈하고 깔끔했다. 그의 치밀한 범행 뒤처리를 연상시키듯 정돈된 모습이었다. 책꽂이엔 여성잡지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주제별로 신문을 스크랩해놓았다. 그는 ‘여성’이란 소재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애정결핍을 해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방에서 발견된 ‘사진 속의 사랑’이란 자작시는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틋함을 드러내고 있다. 비뚤어진 그의 범죄 행각 뒤에는 ‘가족애에 대한 갈구’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따라다녔다.
“온 가족이/ 모였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모처럼 많은 대화 나누며/ 웃을 수 있던 자리였습니다. 너무나 행복해/ 그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오랜 시간 흘러/ 그때의 사진을 다시 꺼냈습니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가족 모두를 껴안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품에 자식 모두를 안고 싶어/ 정말 힘들게도 겨우 모두를 안고 계셨습니다”
다시 체포된 뒤 엽기적 범죄 행각을 담담히 털어놓은 유영철씨는 도주 직전인 7월15일 그의 어머니와 만난 자리에서 말없이 울기만 했다. 비뚤어진 삶의 행로, 그 끝에 선 유씨는 이제 자신에 대한 법의 냉엄한 심판을 기다려야 할 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