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그라이브 형무소에서 미국의 여군 린디 잉글랜드 이병이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쓴 이라크 인들에게 자위행위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피라미드 형태로 쌓여 있는 나체의 이라크인들. 4월29일 CBS 방송에 공개된 또 다른 인권유린 현장의 사진(왼쪽부터).
부시 대통령은 틈만 나면 미국이 치르고 있는 테러전을 야만과 문명 세계의 한판승부로 편가른다. 이라크전도 예외가 아니다. 연설 때마다 대량살상 무기를 들먹이면서 비문명국가인 이라크로부터 이라크 국민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었다는 말을 꼭 덧붙이곤 한다. 야만적인 학대 사진이 공개된 이후에도 부시 대통령의 입에서 야만 대 문명의 대결이라는 말이 나오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라크 재소자들에 대한 학대는 단순사건도 일회성 사고도 아니다. CBS 방송이 어느 날 느닷없이 방송을 한 것도 아니다. 미 언론들은 미군이 포로 학대사건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CBS를 통해 비로소 사건이 공개돼 일반에 알려졌을 뿐이다.
가학·노골적이며 무자비한 학대
더욱 충격적인 일은 이런 포로 학대가 이라크 포로 심문을 담당하는 미군 정보계 요원들의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미군은 진작 포로 학대사건 수사에 착수했고, 지난 2월 말에는 53쪽짜리 수사보고서까지 작성했다. 안토니오 타구바 소장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6개월 전인 2003년 10월과 12월에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형무소에서 자행된 ‘가학적이고 노골적이며 무자비한 학대범죄’ 사례가 많이 포착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의 존재는 CBS의 사진 폭로 방송이 나간 하루 뒤인 4월30일 지식층 시사종합지의 대부격인 주간 ‘뉴요커’의 세어모어 허쉬 기자의 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 ‘뉴요커’의 이 기사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운영되는 미 육군 형무소 시스템에 대한 군 내부의 지적에 따라 이라크 현지 사령관인 산체스 중장이 타구바 소장에게 수사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타구바 소장은 수사결과 아부 그라이브 형무소 운영 실태가 제도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특히 수감자에 대한 학대가 미 372헌병 중대와 미 정보계 요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됐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또한 미군의 가학적인 포로 학대행위의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병사들이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는 극도로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CBS가 방송에 내보낸 사진들은 이 보고서에 실린 사진들 가운데 일부다.
바그다드 서쪽 30km에 있는 아부 그라이브 형무소는 사담 후세인 때부터 악명 높은 형무소다. 최소 5만명의 남녀 수감자가 수감돼 있었고 일주일마다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라크 점령 뒤 일부 시설을 수리해 지금은 미군이 이 형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 수감돼 있는 이라크인 재소자(여자와 10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은 민간인이며 일반 범죄자, 미 동맹군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보안범, 반란군의 일부 지도급 용의자 등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되어 있다.
영국군이 이라크 포로에게 오줌을 갈기는 비열한 학대행위 장면을 실은 영국 일간지 ‘데일리 미러’가 사진을 입수한 것도 게재하기 일주일 전이다. 사진 속의 학대행위는 이미 수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다. ‘미러’의 편집장 피어스 몰간은 “사진 게재로 파문이 일 것을 예상해 주저하고 있다가 CBS 방송 이후 게재를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인 학대사건으로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담배를 빼문 채 벌거벗긴 이라크 젊은이 앞에서 두 엄지를 펴 보이고 있는 젊은 여자 미군의 사진이야말로 지금까지 공개된 사진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다.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쓰고 국부를 노출시킨 채 서 있는 이라크 청년에게 자위행위를 하라고 명령한 이 ‘문명국’ 여군의 이름은 린디 잉글랜드. 계급은 이병이다. 또 한 장의 충격적인 사진, 피라미드 형태로 쌓여 있는 나체의 이라크인들 뒤에서 웃고 있는 주인공도 이 여군이다.
가학행위에 가담한 미군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반 프레데릭 하사는 CBS 방송에 출연해 미군 지도부를 비난했다. 자신은 상급자한테서 아무런 지시를 받은 바 없다면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반박했다. “규칙이나 규정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지휘계통에 계속 요청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지시사항도 내려온 바가 없다”는 것이다. 프레데릭 하사는 또 그런 학대행위가 즐기기 위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형무소에서 근무하는 미 정보계 요원들의 이라크인들에 대한 심문의 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말도 했다.
악재 만난 부시 여론 눈치 살펴
영국의 ‘옵서버’는 이런 형태의 가학행위를 경고하는 지적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됐다고 전한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아부 그라이브 형무소 근무자인 미 헌병 조세프 달비의 가학행위 사례를 조사한 것은 2003년 여름이며, 이외에도 지난 6개월 동안 이라크 안에서 벌어진 이런 형태의 잔학행위에 대한 사례가 여러 차례 보고됐다. 미국의 ‘네이션’도 지난해 11월 이라크인 살라 하산(33)의 피해 주장을 보도한 바 있다.
이라크인 학대사건은 이미 대형사건이 돼버렸다. 지난 몇 주에 걸쳐 이라크 의 상황이 악화돼가던 터라 부시 행정부로서는 이만한 악재가 없다. 미 언론은 아직도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주춤거리고 있다. 끔찍한 사진을 비교적 작은 크기로 싣거나 짧게 방영하고 있고, 전쟁 범죄나 인륜 범죄의 테두리가 아닌 ‘재소자 학대’라는 사건식 보도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미국 내 여론도 들끓을 분위기는 아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있다. 미 언론도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을 매섭게 비판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 첫 번째 열쇠는 언론이 쥐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대응전략을 취하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