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은 물론이고 외지의 중국인에 대해서도 출입을 통제하며 지안(集安)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발굴해온 중국이 지난해 12월20일경 드디어 출입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윤명철 교수 등 고구려사를 연구해온 학자 27명이 12월27일 이곳을 처음 방문해 살펴보고 중국이 고구려 유적을 어떻게 손댔는지에 대한 르포를 보내왔다.(편집자주)
광개토태왕릉비각에 방탄유리를 씌우고 주변에는 맹견을 거느린 공안을 배치했다.
이른 새벽, 차창에 스민 어둠 속에서 고구려의 땅이 살결을 드러냈다. 달빛은 눈빛과 어울려 산과 들을 희게 물들이고 있다. 중국의 변방인 퉁화(通化)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우리가 그 변화의 의미를 놓치고 있는 사이 중국은 고구려사 왜곡 카드를 내밀었다.
노령을 넘고 채석장을 지나 지안분지로 들어서는 고갯마루에 섰다. 희다. 동서 10km, 남북 5km인 지안분지 곳곳에는 고분군이 있다. 춤무덤(무용총) 씨름무덤(각저총)이 빈 과수원 안에 쌍둥이처럼 붙어 있고, 오회분과 사회분의 무덤들이 물굽이처럼 출렁거린다.
어느 곳에서도 차를 세울 수 없다는 중국 공안의 강압 속에서 버스는 눈빛 땅과 잿빛하늘 사이의 거리를 그냥 통과하였다. 그리고 차가 멈춘 지안박물관의 겉모습은 새롭게 단장돼 있었다. 6개월간의 대대적인 발굴을 통해 중국은 엄청난 유물을 발견했지만, 몇 개만을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만 공개할 뿐이다. 그래서 서둘러왔는데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국내성의 북벽지역을 통과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북벽은 전과 비슷했고 건물만 몇 채 허물어뜨렸을 뿐이다. 중국은 이 벽을 복원할 계획이란다. 시청건물과 광장이 있던 곳은 유적 터로 변해 있었다. 중국은 왕궁 터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발굴했다는데 유물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차도 마음대로 못 세우게 막아
중국정부는 2002년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 계획을 발표했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5년 동안 3조원에 달하는 큰돈을 들여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을 하고 학자들에게 연구를 하게 하는 작업이다. 가깝게는 올 6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있을 유네스코 회의 때 북한을 제치고 고구려 유적을 중국측 유적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중국의 속마음은 보다 깊은 데 있다.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 전통적인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재현하려는 문명적 제국주의를 노리는 것이다. 고구려 해양사 연구로 학위를 받고, 뗏목과 말을 타고 고구려 역사를 밝혀온 필자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다. 필자는 고구려사를 21세기 우리 민족의 생존모델로 연구해왔다.
중국 관리들의 방해로 차를 세우지 못한 우리는 반(半)강제적으로 장군총으로 향했다. 잘 포장된 길이 끝나는 곳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오로지 무덤만이 홀로 있을 뿐 주변 건물들이 모두 없어졌다. 덕분에 우람한 이 석조건축물의 모습과 의미가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장군총은 텅 빈 공간에 있는 유일한 실재로서, 그 터의 자궁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장군총은 직경 31m의 사각 돌단이 황금률로 좁아져 올라간다. 5층에 현실이 있고 7층에서 일단 멈추는데, 그곳에 건축물을 세워놓았다. 선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무한상승하는 구조다. 그리하여 그곳은 하늘과 조상 그리고 무덤의 주인을 모시는 신령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하늘의 자손인 고구려인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통로가 된 것이다.
답사단을 쫓아다니며 감시한 중국공안 차량(원 안). 버스 차창 너머로 본 오녀산성(아래).
그리고 광개토태왕릉비로 향했다. 비각 주변에 있던 집들과 육중하고 시뻘건 철문 그리고 가게들도 사라졌다. 입구도 정면에서 바른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생각에 젖어 걸어 들어가는데 개들의 강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네 마리의 맹견이 릉비를 지키고 있었다. 공안도 네 군데에서 지키고 있는데, 밤이 되면 6명이 나와 지킨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하자 갑자기 늘어나 비각 주변은 중국 공안들로 우글거렸다.
릉비는 비각 안에 방탄유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6.39m의 몸뚱이에는 고구려인들이 마음으로 새겼을 1775자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생명의 덩어리이다. 고구려인의 존재 이유, 광개토태왕의 삶, 그리고 그가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 신탁을 새겨놓은 역사의 혼불이다. 그래서 ‘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와 ‘我是 皇天之子 母河伯女郞(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과거 참배자들이 슬쩍슬쩍 손길을 대볼 때마다 기를 내뿜던 태왕의 혼이 방탄유리 속에 갇혀 몸부림친다. 가늘게나마 생명을 유지해온 고구려의 혼이 질식해가는 느낌이었다. 분노인가, 허탈감인가, 자괴감인가! 알 수가 없지만 참기 힘든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중국 공안은 사진 촬영은커녕 태왕릉비각에 접근조차 못하게 했다.
다시 안내원들에게 이끌려(?) 광개토태왕릉으로 갔다. 왕릉은 직경 66m의 거대한 자갈산이다. 애초에는 장군총처럼 커다란 석재로 둘러싸인 피라미드형이었는데, 언젠가 철저하게 벗겨졌고 무덤 내부도 도굴을 당했다. 다행히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컨대 태왕릉은 산처럼 안정되고 악처럼 견고하옵소서)’이라고 새겨진 전돌이 발견돼 광개토태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태왕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 이 추정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안지역 답사 두 시간 만에 끝내
과거 릉 주변에 꽉 들어차 있던 400여호의 집들은 다 철거돼 사라졌고 조선족 소학교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 주변이 넓어졌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들게도 제단 터가 묘실의 반대편인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묘실까지 올라가는 계단도 새로 놓여 있었다. 잘못된 복원을 지켜보다 오회분으로 이동하였다.
지안에는 약 1만2000여기의 고분이 있는데, 그중 벽화가 있는 고분은 대략 20여기다. 벽화는 또 하나의 고구려다. 마침 4호묘가 공개된다고 해서 찾아갔으나 역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벽화관에는 잘 알려진 벽화 몇 점만이 걸려 있었는데, 그들은 영상마저도 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어붙은 퉁거우허(通溝河)를 끼고, 칠성산 고분군과 만보정 고분군을 지나가며 눈 산으로 변한 환도산성을 바라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푸근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지당해 성 쪽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다. 중국은 고분군을 새로 정비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퉁거우허와 고분군들 사이로 새로운 도로를 만들어놓았다. 전에는 말 타고 돌았던 곳인데, 찻길이 뚫린 지금은 오히려 차에서 내릴 수조차 없었다.
돌아오면서 복원한 서벽을 퉁거우교(橋) 위에서 바라보았다, 독특한 문 형식이 발굴된 서문현장에는 공안들이 서서 역시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유적을, 그것도 돈을 내고 사전에 허가받고 온 여행객인데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중국인 것이다.
온갖 제지로 인해 지안지역 답사를 불과 두 시간여 만에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다음날 아침 호텔 정문 건너편에 세워진 차에서 비디오로 우리를 촬영하고 있는 공안을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을 빠져나와 환인으로 가면서 천추릉(직경 60m)과 서대묘(55m)를 보았다. 주변의 집들을 말끔히 철거해 묘의 거대함은 드러났지만 한편으론 신비감이 사라진 듯해 마음이 상쾌하지 않았다. 관광지의 상품처럼 돼버린 경주의 고분들처럼 보였다.
다섯 시간이나 걸려 찾아간 환인의 오녀산성 역시 올라가 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전화통화를 하고 반(半)협박을 퍼부은 끝에 멀리서나마 오녀산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해발 800여m의 산인데 100m 높이의 직벽 위에 있는 정상부에는 남북 600여m 동서 200여m의 평지가 있다. 중국은 3년 동안 발굴해서 궁궐터로 추정되는 곳과 초소 터, 우물 등을 찾아냈다고 한다.
중국은 그들의 패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역사를 조작하고 이를 공개조차 하지 않는 몰상식한 행동을 저질렀다. 이러한 나라와 벌이게 될 역사전쟁은 얼마나 힘들 것인가. 현실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더없이 분하고 아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