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게 홍’ 내부. 노석미 등 순수 미술 작가들의 작품 겸 상품이 함지박 안에 들어 있다. 작은 사진은 김홍희 쌈지스페이스 관장(맨 왼쪽) ‘자선전’에 출품한 작가들.
12월23일 서울 홍익대 앞 ‘아름다운가게 홍’에서 열린 ‘자선전’에서 박원순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는 젊은 작가들의 발랄한 작품을 보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원래 겨울엔 방학숙제용 전시를 제외하고 미술계가 동면에 들어가지만 올 겨울엔 유난히 ‘자선’을 주제로 한 전시가 많다. ‘아름다운 가게 홍’의 ‘자선전’ 외에 ‘크리스마스 선물제안전’(희망갤러리), ‘아주 특별한 선물’(스톤앤워터), ‘크리스마스와 원숭이’(아트파크), ‘해피 크리스마스 2003’(포스코갤러리) 등이 작가 스스로를 돕고, 이웃도 돕는 전시들이다.
박 상임이사의 말처럼 가난한 작가들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판매상품도 ‘세련’과는 거리 멀어
보통 ‘자선 전시’라면 유명작가들이 작품 판매액의 일부를 기부하는 형식이지만 올해 자선을 위한 전시들의 특징은 젊은 작가들이 다수를 이루고, 작품이 아니라 상품을 내놓은 작가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그림이나 조각처럼 순수미술작품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 파는 작가들이 크게 늘어났음을 증명한다. 미술기획자 서진석씨는 “물밑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던 것들이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표현한다.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는 작가들이 만든 것은 작품일까, 상품일까. 그들이 만들어 파는 것은 세련과는 거리가 먼 상품이다. 쓰다 남은 철사로 만든 듯한 액세서리, 귀엽기는커녕 거의 혐오스런 캐릭터가 그려진 컵이나 너덜너덜한 가방도 있다.
작가들이 상품을 만드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그들도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작가로서 생존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작업과 무관한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퍼포먼스 설치작가로 널리 알려진 손정은씨는 마음에 맞는 작가들과 함께 ‘이야기’라는 팀을 구성해 독특한 목걸이와 브로치 등을 만들어왔다.
“작품과 상관없이 돈을 벌기 위해 액세서리를 만들어왔다”는 손씨는 올 겨울 마지막으로 ‘해피 크리스마스 2003’에 참여했다. 대학교수가 되면서 새해엔 강의와 작품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작가가 자신의 미술 작품을 더 쉽게 알리기 위해서 상품을 만들기도 한다.
명랑만화 주인공 같은 악동 캐릭터를 작품으로 만든 김태중, 소녀 캐릭터의 노석미, 동그리 캐릭터의 권기수 등이 대개 이런 작가들이다. 버려지는 현수막 천으로 가방을 만드는 재활용 작가 김동환도 주목받는다.
“원래 미술작업을 팝아트적이랄까, 일러스트레이션 쪽으로 잡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유통이 쉽고, 홍보하기에도 유리하지요.”(김태중)
아트벼룩시장 작가들이 운영하는 ‘희망갤러리’와 최해경의 ‘테디베어’, 배성미의 ‘간판’ 스탠드, 김태중의 ‘헬멧’(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즉 이들의 작품은 전시장의 미술, 작가가 직접 만든 작품 성격의 상품, 공장생산상품 등 다양한 차원으로 관객(혹은 소비자)을 만나고 있다. 따라서 같은 ‘그림’이라도 전시장 작품이 수백, 수천만원대라면 작가가 직접 만든 상품(혹은 작품)은 수십만원대, 대량생산된 수첩은 1000~3000원으로 매겨진다.
세 번째는 하나의 문화운동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2002년부터 벼룩시장처럼 시작한 홍대 앞 희망시장이나 프리마켓의 취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영국에서 공예작가 윌리엄 모리스 등이 기계문명을 비판하고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며 벌인 수공예 운동 ‘아트 앤 크래프트’와 비교된다.
이 같은 아트벼룩시장이 자리를 잡자, 희망시장 참여작가들은 아예 ‘희망갤러리’를 냈다. 또 최근엔 ‘생생몰’같은 인터넷 유통망이 생기기도 하고 동대문이나 남대문의 대형 쇼핑몰들도 월 1회씩 ‘싱싱마켓’같은 이름으로 수공예 작가들에게 자리를 내줄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노점과 작업 사이 ‘여전한 갭’
2003년 여름에 열린 프리마켓 모습.
‘아름다운 가게 홍’의 간사이자 희망시장 운영진 중 한 명인 윤영주씨의 설명이다.
아트벼룩시장에 참여한 작가들은 직접 노점에 나와 손으로 만든 액세서리나 문구류, 생활용품을 판매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작가들의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희망시장이나 프리마켓에 나서서 직접 작품을 팔아본 작가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노점과 작업 사이의 ‘갭’을 느낀다고 말한다. 축소한 흉물스런 간판에 전구를 넣어 스탠드 작품을 만든 배성미씨는 “ 2만원에 파는데, 사는 사람은 ‘물건’으로 보니까 비싸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땐 맥이 빠진다”고 말한다. 희망시장 초기에 참여한 한 작가는 “노점상들과 뒤섞이니, 내 작품이 1000원짜리 물건과 가격경쟁을 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작가는 “때로 실존적이고 때론 사회비판적인 의미를 담아 만든 이미지가 상품의 ‘무늬’가 되어버리니, 앤디 워홀이 아닌 이상 자신의 작품에 대한 회의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자선전’을 기획한 큐레이터 박수란씨는 “작가가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아트벼룩시장의 등장이 우리 미술계에서 새로운 작가군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은 작가적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통해 미학적인 이슈까지 생산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아트벼룩시장에 실망해 떠난 ‘전문적’(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갤러리에서 전시를 연 경우) 작가들의 자리를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아주 새로운 유형의 작가들이 채워가는 경향도 뚜렷하다. 역으로 ‘벼룩시장 출신 작가’들이 전시장에 들어와 전시를 열기도 한다.
아트센터나비에서 아트벼룩시장 작가들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 대작전’이란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작가 강영민씨는 작가들이 좀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노점에서 초상화도 그리고, 티셔츠의 그림도 그린다.
“전시장 작가가 노점에서 판매를 할 때 느끼는 어려움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인터넷 상의 ‘넷아트’에 환경적 어려움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전시장 관객의 기대치에 맞추듯, 노점의 기대치에 맞출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지요. 그런 유연함을 가진 작가들이 실제로 처음 나타난 겁니다.”
그의 말을 바꿔본다면 ‘넷아트’에 낯설어한 작가들이 컴퓨터를 포기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듯, 전시장에 익숙한 작가들은 아트벼룩시장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시장이라는 제도권 밖에서 대중과 직접 작품(혹은 상품)을 통해 관계를 맺고 평가받으려는 새로운 작가군이 이미 형성됐으며 이들이 우리 문화계의 지형과 생각의 틀까지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디지털 복제의 시대에 손으로 만든 미술품을 통해 세상을 바꿔보려는 젊은 작가들의 2004년을 주목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