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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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집에 쓴 사랑고백 ‘연애 출발’

  • 듀나/ 영화평론가 djuna01@hanmail.net

    입력2003-10-30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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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집에 쓴 사랑고백 ‘연애 출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원래 제목(혹은 모티브를 제공한 작품)은 ‘밑줄 긋는 남자’다. 우리의 주인공이 도서관 책들에 밑줄을 긋는 남자를 찾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척 봐도 카롤린 봉그랑의 동명 소설을 번안한 작품 같다. 하지만 작가는 그 책에서 ‘힌트’를 얻었을 뿐이라니 나로서는 그 경계가 모호할 뿐이다.

    하여간 제작과정 중 ‘밑줄 긋는 남자’가 ‘화집에 메모를 남기는 남자’로 바뀌었고 각본을 읽은 카롤린 봉그랑으로부터 독립된 작품이라는 면죄부를 받았다니 더 이상 법적인 문제는 없는 듯하다. 과연 어디까지가 영감을 받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번안인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화집에 메모를 남기는 남자’로 설정이 바뀌긴 했지만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기본 줄거리는 ‘밑줄 긋는 남자’와 거의 같다. 바뀐 건 등장인물 간의 관계 설정이다. 배두나가 연기하는 주인공 현채는 대형 할인점 직원이고 김남진이 연기하는 이동하는 파업으로 인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투입된 지하철 기사다. 현채는 삼류 소설가인 아버지를 위해 도서관에서 화집을 빌리다가 분명히 자기한테 하는 것 같은 사랑고백이 그림 옆에 메모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 메모를 남긴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푸는 단서였던 원작의 밑줄 그어진 내용들과는 달리 화집의 메모는 직설적이고 신비감이 떨어지지만 귀엽고 달콤하다. 영화는 원작의 번뜩이는 지적 재치를 담는 대신 평범한 직장을 가진 지상의 연인들에게 감상적이고 안전한 로맨스를 안겨주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 같다. 비난할 필요는 없으리라.

    배두나와 김남진은 귀엽고 호감 가는 배우들이고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 역시 귀엽고 호감이 간다. 결정적으로 우리에겐 로맨스에 대한 믿음과 감상적인 연애담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설정은 이야기 자체에 비해 과하다. 잘했으면 원작처럼 번뜩이는 재치가 가득한 지적 게임이 되었을 설정이 너무나 평범한 연애담의 장식이 되었으니 시작부터 실망스러울 수밖에.

    화집의 그림들을 모방하는 현채의 순진무구한 CF적 상상력-백일몽과 같은-만으로 이 공간은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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