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발표한 뒤 한국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인터넷 뉴스사이트에 들어가보면 한국인의 민의는 일방적인 비난과 맹목적인 찬양의 양극단 사이에서 거대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모두가 궁금해하는 점은 대통령이 어떤 정치심리적 배경에서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최근의 정치상황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정치심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단, 이 글은 어떤 논리정연한 분석과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재의 상황을 정치심리라는 색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하는 일종의 가설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얼굴 뻔뻔하고 음흉해야 혼돈시대의 영웅
역사상 난세를 평정한 영웅은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 또한 이들 영웅은 어떤 방식으로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된 것일까? 역사연구를 통해 그 비결을 현재에 효과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지침서들이 앞다투어 서점에 진열되어 있다. 오늘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처세술을 다룬 서적들에는 대개 이러한 제목이 붙어 있다. ‘삼국지 처세술’ ‘직장 수호전’ ‘제갈공명 영업전략’ ‘비즈니스 삼국지’…. 이러한 책들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를 열심히 탐독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과거 엄청난 혼란의 시대를 헤쳐나가 성공한 인물들의 생존전략을 배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청나라 말기에 ‘후흑학(厚黑學)’이라는 다소 낯설고 기묘한 정치심리학을 창시했던 리쭝우(李宗吾)의 주장을 통해, ‘대통령 재신임 요청’이라는 현재의 급박한 정치상황을 통치자의 정치심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 또한 흥미 있으리라 생각된다.
리쭝우는 ‘후흑학’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글을 배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영웅호걸이 되고자 했다. 사서오경을 읽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영웅호걸이 된 자에게는 분명히 세상에 전하지 않은 비술이 있었을 텐데 다만 내가 못나서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침식을 잊고 몇 년간 궁리한 끝에 우연히 삼국시대의 몇몇 인물을 떠올리다가 불현듯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같이 외쳤다. ‘알았다. 알았어! 옛날에 영웅호걸이 된 자들은 한낱 뻔뻔하고 음흉한 자에 불과하구나.’”
리쭝우가 깨달은 영웅의 비결은 한마디로 얼굴이 두꺼워야 하고(面厚), 마음속이 시커메야(心黑) 한다는 것이다. ‘면후’는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어떤 굴욕을 당해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경거망동하지 않고 참으며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심리를 말한다. 리쭝우는 ‘면후’의 대가로 유비를 꼽는다. 유비는 한때 조조, 여포, 유표, 손권, 원소 등을 오가며 이들에게 붙어서 혹은 얹혀 살면서도 이를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로 뻔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심흑’은 한 번 터지면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놔두다가 때가 되면 윤리고 도덕이고 다 무시하고 위험인물을 다시는 회생할 수 없도록 완전히 제거하려는 심리를 말한다. 리쭝우는 ‘심흑’의 대가로 조조를 꼽는다. 조조는 세간의 이목을 완전히 무시하고 여백사, 공융, 양수, 동승, 복황후, 황자를 가차없이 죽였다. 리쭝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후흑’을 모두 겸비한 최고의 영웅으로 한나라의 유방을 꼽는다. 항우는 초기에 유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결국 패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리쭝우는 항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항우는 참모인 범증이 애초에 유방을 죽이려 한 홍문의 연회에서 후세에 욕을 먹을까 두려워 망설이다 결국 유방의 도주를 방치했다. 둘째, 마지막 하이허의 싸움에서 유방에게 패한 뒤 훗날을 기약하고 강동으로 도주해 힘을 기를 수도 있었으나, 부하 8000명을 모두 죽인 책임감 때문에 면목이 없다며 자결하고 말았다. 이렇듯 항우의 결정적 패인은 한마디로 그가 뻔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체면과 인품을 유지하려다가 엄청난 화를 자초한 셈이다.
이에 비하면 유방은 ‘면후’와 ‘심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나라 병사들에게 쫓길 당시 수레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친자식을 세 번이나 마차에서 떠밀어냈다고 한다. 또 제나라를 평정한 부하 한신이 제나라 왕에 봉해줄 것을 청했을 때 독립하려는 한신의 속셈을 간파하고 속으로는 크게 노하였으나 ‘심흑’의 이치에 따라 이를 표현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한신이 제나라 왕에 오르자 그의 참모 괴통은 독립하여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한 뒤 힘을 길러 천하를 통일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한신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옷을 벗어 입혀주고 밥을 먹여준’ 유방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후에 유방이 항우를 제거하고 천하를 통일하자 한신은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하고 9족이 몰살되는 신세가 됐다.
노대통령은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기사회생하는 대역전극을 펼치며 대통령에 당선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하지만 노대통령이 실질적 통치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대통령은 대선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국민경선제 도입, 행정수도 이전, 후보 단일화 등 상당 수준의 ‘후흑(厚黑)’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한 바 있다. 그런데 당선 후 지지율 저하라는 암초를 만나게 되자 ‘재신임’이라는 새로운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이를 찬성하는 측은 ‘원칙에 입각한 정면돌파’라고 환영하고, 비판하는 측은 ‘베팅 혹은 올인’이라며 의심하고 있다. 어느 편의 주장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리쭝우의 주장처럼 도덕 교과서나 이상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라는 장에서는 ‘후흑’의 정치심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며, 대통령이 제시한 ‘재신임’ 카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에 필자는 대통령이 이미 ‘후흑’에 일가견이 있겠지만 앞으로 닥칠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이를 좀더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불완전한 ‘후흑’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방, 조조, 유비가 보여준 ‘후흑’의 면모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말을 걸러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말을 정말 잘한다. 하지만 때로는 몇몇 발언(예를 들어 ‘힘들어서 대통령 못하겠다’) 때문에 불필요한 공격을 당해왔다. 그렇다고 말을 아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언설로 나오기 전 여러 번 걸러 자신의 ‘후흑’이 은연중 노출되는 위험을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게 되새겨야 할 것은 리쭝우 선생의 엄중한 경고 메시지다. 그는 ‘후흑사관’이라는 글에서 ‘후흑’을 구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후흑학을 이용해 일개인의 사리를 도모하면 비루한 행동이나, 국민의 공리를 도모하면 무상한 도덕이 된다.”
리쭝우는 이를 ‘후흑구국’이라고 명명했다. 난세에는 공허한 체면이나 도덕을 내세우기보다는 ‘후흑’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여러 전직 대통령들이 ‘구국의 결단’이라 주장하며 나름대로 엄청난 정치적 결단(군사 쿠데타, 대통령 불출마 번복, 3당 합당 등)의 ‘후흑’을 구사했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때 과연 그것이 진정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노대통령의 ‘재신임’ 결단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심판의 도마에 오르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이번 결단이 기필코 ‘후흑구국’으로 귀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얼굴 뻔뻔하고 음흉해야 혼돈시대의 영웅
역사상 난세를 평정한 영웅은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 또한 이들 영웅은 어떤 방식으로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된 것일까? 역사연구를 통해 그 비결을 현재에 효과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지침서들이 앞다투어 서점에 진열되어 있다. 오늘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처세술을 다룬 서적들에는 대개 이러한 제목이 붙어 있다. ‘삼국지 처세술’ ‘직장 수호전’ ‘제갈공명 영업전략’ ‘비즈니스 삼국지’…. 이러한 책들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를 열심히 탐독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과거 엄청난 혼란의 시대를 헤쳐나가 성공한 인물들의 생존전략을 배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청나라 말기에 ‘후흑학(厚黑學)’이라는 다소 낯설고 기묘한 정치심리학을 창시했던 리쭝우(李宗吾)의 주장을 통해, ‘대통령 재신임 요청’이라는 현재의 급박한 정치상황을 통치자의 정치심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 또한 흥미 있으리라 생각된다.
리쭝우는 ‘후흑학’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글을 배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영웅호걸이 되고자 했다. 사서오경을 읽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영웅호걸이 된 자에게는 분명히 세상에 전하지 않은 비술이 있었을 텐데 다만 내가 못나서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침식을 잊고 몇 년간 궁리한 끝에 우연히 삼국시대의 몇몇 인물을 떠올리다가 불현듯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같이 외쳤다. ‘알았다. 알았어! 옛날에 영웅호걸이 된 자들은 한낱 뻔뻔하고 음흉한 자에 불과하구나.’”
리쭝우가 깨달은 영웅의 비결은 한마디로 얼굴이 두꺼워야 하고(面厚), 마음속이 시커메야(心黑) 한다는 것이다. ‘면후’는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어떤 굴욕을 당해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경거망동하지 않고 참으며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심리를 말한다. 리쭝우는 ‘면후’의 대가로 유비를 꼽는다. 유비는 한때 조조, 여포, 유표, 손권, 원소 등을 오가며 이들에게 붙어서 혹은 얹혀 살면서도 이를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로 뻔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심흑’은 한 번 터지면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놔두다가 때가 되면 윤리고 도덕이고 다 무시하고 위험인물을 다시는 회생할 수 없도록 완전히 제거하려는 심리를 말한다. 리쭝우는 ‘심흑’의 대가로 조조를 꼽는다. 조조는 세간의 이목을 완전히 무시하고 여백사, 공융, 양수, 동승, 복황후, 황자를 가차없이 죽였다. 리쭝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후흑’을 모두 겸비한 최고의 영웅으로 한나라의 유방을 꼽는다. 항우는 초기에 유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결국 패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리쭝우는 항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항우는 참모인 범증이 애초에 유방을 죽이려 한 홍문의 연회에서 후세에 욕을 먹을까 두려워 망설이다 결국 유방의 도주를 방치했다. 둘째, 마지막 하이허의 싸움에서 유방에게 패한 뒤 훗날을 기약하고 강동으로 도주해 힘을 기를 수도 있었으나, 부하 8000명을 모두 죽인 책임감 때문에 면목이 없다며 자결하고 말았다. 이렇듯 항우의 결정적 패인은 한마디로 그가 뻔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체면과 인품을 유지하려다가 엄청난 화를 자초한 셈이다.
이에 비하면 유방은 ‘면후’와 ‘심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나라 병사들에게 쫓길 당시 수레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친자식을 세 번이나 마차에서 떠밀어냈다고 한다. 또 제나라를 평정한 부하 한신이 제나라 왕에 봉해줄 것을 청했을 때 독립하려는 한신의 속셈을 간파하고 속으로는 크게 노하였으나 ‘심흑’의 이치에 따라 이를 표현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한신이 제나라 왕에 오르자 그의 참모 괴통은 독립하여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한 뒤 힘을 길러 천하를 통일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한신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옷을 벗어 입혀주고 밥을 먹여준’ 유방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후에 유방이 항우를 제거하고 천하를 통일하자 한신은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하고 9족이 몰살되는 신세가 됐다.
노대통령은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기사회생하는 대역전극을 펼치며 대통령에 당선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하지만 노대통령이 실질적 통치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대통령은 대선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국민경선제 도입, 행정수도 이전, 후보 단일화 등 상당 수준의 ‘후흑(厚黑)’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한 바 있다. 그런데 당선 후 지지율 저하라는 암초를 만나게 되자 ‘재신임’이라는 새로운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이를 찬성하는 측은 ‘원칙에 입각한 정면돌파’라고 환영하고, 비판하는 측은 ‘베팅 혹은 올인’이라며 의심하고 있다. 어느 편의 주장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리쭝우의 주장처럼 도덕 교과서나 이상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라는 장에서는 ‘후흑’의 정치심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며, 대통령이 제시한 ‘재신임’ 카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에 필자는 대통령이 이미 ‘후흑’에 일가견이 있겠지만 앞으로 닥칠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이를 좀더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불완전한 ‘후흑’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방, 조조, 유비가 보여준 ‘후흑’의 면모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말을 걸러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말을 정말 잘한다. 하지만 때로는 몇몇 발언(예를 들어 ‘힘들어서 대통령 못하겠다’) 때문에 불필요한 공격을 당해왔다. 그렇다고 말을 아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언설로 나오기 전 여러 번 걸러 자신의 ‘후흑’이 은연중 노출되는 위험을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게 되새겨야 할 것은 리쭝우 선생의 엄중한 경고 메시지다. 그는 ‘후흑사관’이라는 글에서 ‘후흑’을 구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후흑학을 이용해 일개인의 사리를 도모하면 비루한 행동이나, 국민의 공리를 도모하면 무상한 도덕이 된다.”
리쭝우는 이를 ‘후흑구국’이라고 명명했다. 난세에는 공허한 체면이나 도덕을 내세우기보다는 ‘후흑’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여러 전직 대통령들이 ‘구국의 결단’이라 주장하며 나름대로 엄청난 정치적 결단(군사 쿠데타, 대통령 불출마 번복, 3당 합당 등)의 ‘후흑’을 구사했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때 과연 그것이 진정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노대통령의 ‘재신임’ 결단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심판의 도마에 오르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이번 결단이 기필코 ‘후흑구국’으로 귀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