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2일 저녁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래비 3·1공원 앞에서 열린 ‘여중생 사망 1주기 양주군민 추모대회’에 참가한 부모들.
지난해 6월13일,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 미선양의 사망 1주기를 맞은 부모들은 또 한 번 참담한 경험을 해야 했다. 딸이 당장이라도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아직도 눈물 마를 새가 없건만, 인터넷과 지인들을 통해 들려오는 이런 힐난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고 있다.
“아이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도대체 누가 ‘반미운동을 한다’고 이렇게 욕을 합니까. 그저 억울하게 당한 일을 바로잡자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어서 우리를 도와준 것뿐인데 그게 정치적이라니…. 미선이는 내 딸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딸이기도 합니다. 반미라고 몰아붙이는 그들이 우리 딸을 두 번 죽이고 있어요.”(미선양 아버지 심수보씨)
아직 눈물 흐르는데 항의에 시달려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 반미운동하자 했습니까. 범대위(여중생 사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우리한테 반미운동하자고 부추긴 적 한 번도 없어요. 두 번 다시 이런 참담한 일은 없어야겠기에, 말도 안 되는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불평등한 부분을 고쳐야겠기에, 우리가 직접 나선 것뿐입니다. 우리 딸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효순양 아버지 신현수씨)
사망 1주기 하루 전인 12일 오후, 경기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 자택에서 만난 미선이와 효순이의 부모들은 격앙돼 있었다. 바로 전날 C일보와의 인터뷰 기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했다. 심수보씨는 “인터뷰 때 ‘지난 1년 동안 도와준 국민에게 고맙고 한편으론 죄스럽다’고 말했는데 그걸 ‘반미 행사하는 데 나가서 죄송하다’고 왜곡 보도했다”며 “‘죄스럽다’는 표현은 미선이 일로 힘써주는 지역주민이나 단체 사람들에게 제대로 못 도와줘 미안하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이 신문은 전날 게재한 인터뷰 기사에서 “지금껏 있어온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와 행사가 미선이 부모의 의도와는 반대로 반미적 성격으로 흘렀고, 지난 연말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돼 그 다음부터는 이들이 집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심씨는 지역주민을 비롯한 주변에서 걸려오는 항의전화에 꽤나 시달려야 했다.
심씨는 “우리가 범대위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미선이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며 “요즘 같아서는 우산장사 아들(시민단체)과 짚신장사 아들(보수성향의 비판자들)을 같이 둔 심정”이라고 처신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자니 저쪽이 걱정이고 저렇게 하자니 이쪽이 걱정인 형국이라는 얘기다.
효순양 아버지 신현수씨는 “행사장에 가면 물론 반미를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는 게 아니고, 또 우리가 그 자리에서 ‘반미하자’고 외친 적도 없는데 왜 집회 자체를 ‘반미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막으려 하냐”며 “집회에 가서 직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미를 외치는지 보라”고 호소했다.
이들을 괴롭히는 존재는 일부 네티즌이나 사정을 모르는 타지역 주민뿐만이 아니다. 추모 행사장에서 만난 효촌2리 청년회장 심규웅씨는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가 반미성향으로 흐른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효촌2리나 광적면 내에도 이들 부모의 집회 참여나 관련 집회 개최를 공공연히 탓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공공기관에서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한다. 사실 지난해 범대위가 꾸려지기 전 미군을 찾아가 항의하고 군 단위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처음 문제제기를 한 것은 모두 이 지역 주민들이었다. 1년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간에도 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 2사단이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 56번 지방도 사건현장 바로 옆에 세운 여중생 추모비.
양주군민 추모대회에 참가한 통일연대 대표 한상렬 목사(범대위 방미투쟁단장)는 “효순이 미선이 추모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일단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그 가해자에 대한 처벌에 동의하며, 소파 등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들”이라며 “그중에 반미주의자나 반전론자, 군 거부자 등이 끼여 있는 것이지 이들 모두가 반미주의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설사 반미를 외치고 싶어도 속내를 보이지 않고 참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범대위측의 주장이다.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했나”
13일 저녁 7시, 여중생 사망 1주기 추모행사가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 추모행사가 끝날 때까지 ‘주한미군 철수’와 ‘반미’ 구호는 단 한 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청 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3만여명의 시민들은 오직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해명’과 ‘미 대통령의 직접 사과’, ‘소파 개정’만을 외칠 뿐이었다. 그런데 외신기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수만명의 시민들이 아니라, 이들과 떨어져 무교동 쪽에서 ‘반미’,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던 20여명의 대학생이었다. 평소 같으면 주목하지도 않을 학생들의 소규모 시위를 마치 이 추모집회를 대표하는 것인 양 외신기자들이 연신 이들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추모행사에 딸과 함께 참가한 회사원 김동률씨(38)는 “촛불집회에 나와보면 반미 운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인터넷에만 들어가면 집회 참가자를 모두 빨갱이로 매도하고, 반미주의자로 낙인찍어 국익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는다”며 “이런 현상은 집회 때마다 보이는 일부 반미주의자들의 모습을 전체 집회의 대의인 양 부풀려 보도하는 내·외신 언론의 잘못된 행태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미선양 아버지 심수보씨(왼쪽)와 효순양 아버지 신현수씨
“도대체 사건 당시 한국의 검사와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뭐라고 말했으며, 국회의원들은 또 무엇을 했죠. 국민들이 이렇게 나섰는데 그 흔한 특위라도 만들었나요. 한다는 일이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때리고 연행하고….”
미선이, 효순이 부모들은 행사 전날 기자에게 한 말들을 추모 행사장에서는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정부와 미군을 비난하면 또 한 번 ‘빨갱이’로 몰리고 ‘반미주의자’로 낙인찍힐까 겁이 났던 것은 아닐까. 효촌2리 여중생 압사사건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의 추모사에 미군 제2사단은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이 모든 이들의 가슴에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줬다”고 적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