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심광현,강형철,이영욱,박인배,강내희,현기영(위부터 시계방향)
이창동 문화부 장관은 취임사를 대신해 인터넷에 올린 인사말(3월13일자)에서 여러 차례 민간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관료들이 책상 위에서 정책을 만들어 현장으로 내려보내는 방식으로는 자율과 창조성을 살릴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장관이 내건 자율과 개방, 참여와 분권은 말잔치로 끝나지 않고 문화판에 일대 변화를 몰고 왔다.
5월6일 문화연대와 대중음악개혁을 위한 연대모임, 라이브클럽 연대 등이 주최한 ‘라이브클럽 살리기 토론회’에는 문화부 공연예술과 조동희 과장이 첫번째 발제자로 나서 ‘공연문화 인프라 구축과 라이브클럽 지원 방향’을 밝혔다. 문화단체 토론회에 주무부처 담당자가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기조발제를 맡는 것은 흔치 않은 일.
“특정 단체 출신 배려” 볼멘소리도
조과장은 예산 지원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언더그라운드 공연환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문화연대 등과 꾸준히 접촉해왔고, 이번 공개토론회에서 직접 발제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과거에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형식적인 공청회를 거쳤다면 참여정부에서는 문화부 쪽에서 먼저 시민단체에 자문과 협조를 요청할 정도로 달라졌다.
참여정부에서 문화판의 변화를 가장 실감나게 만든 것은 잇따른 파격 인사. 소설가이며 영화감독 출신인 이장관의 부임 자체가 파격이었지만, 3월14일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원장에 이영욱 전주대 예체능·영상학부 교수(46)가 임명되자 일단 역대 원장 가운데 가장 젊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교육감 출신의 정순택 전 원장은 부임 당시 61세).
이원장은 서울대 미학과 81학번으로 민족미술협의회에서 미술평론 활동을 했고, 문화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대안공간 ‘풀’ 대표, 미술 무크지 ‘포럼A’ 발행인 등의 명함을 갖고 있다. 이처럼 제도권 밖에서 비판하고 담론을 만들어내던 역할을 맡아오다 정부 문화정책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위치에 섰을 때의 어색함은 곧 ‘신선하다’는 기대감에 묻혔다.
4월16일 문화부는 참여정부의 3대 가치(자율·참여·분권)를 문화예술현장에 정착시킬 수 있는 문화행정의 혁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민간합동위원회인 문화행정혁신위의 신설을 발표했다. 문화행정혁신위는 단순히 정부 정책을 자문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참여정부 문화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문화행정혁신위가 문화부 차관, 기획관리실장, 정책보좌관, 각 실·국 주무과장 외에 이영욱 한국문화관광정책개발원장과 박인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기획실장(50),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47) 등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되자 문화계에서는 특정 단체에 대한 배려가 지나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5월6일 문화시민단체가 공동 주최한 ‘라이브클럽 살리기 토론회’.
5월6일 문예진흥원 사무총장에 작가회의 상임이사를 역임한 강형철 교수(48·숭의여대 문예창작과)가 임명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보수에서 진보로, 원로에서 40대 소장파 그룹으로의 ‘문화판 권력이동’이 확연해졌다. 강형철 사무총장은 지난 2월 문예진흥원장에 부임한 현기영 원장(61·전 작가회의 이사장)과 작가회의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가장 이상적인 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최근 문화부의 민간 전문가 영입이 지나치게 진보 일색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파격 아니라 이제야 균형 잡는 것”
‘바꿔’ 바람은 문화재청도 예외는 아니어서 4월중 발표된 새로운 문화재위원회 위원들의 평균연령이 65세에서 59세로 젊어졌고 시민단체 관계자와 여성, 지역인사의 참여를 대폭 확대했다. 특히 강내희 문화연대 집행위원장(박물관분과 전문위원), 강찬석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건조물·제도분과 전문위원)의 제도권 진입이 눈에 띄었다.
현기영 문예진흥원장은 취임 직후 재야단체를 이끌다 관변단체장을 맡은 소감을 묻자 “작가회의처럼 찬밥을 먹던 그룹에 상징적으로 더운밥을 준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지금까지 정권이나 관료들의 외면을 받았던 사람들의 중요한 가치가 복권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상대적으로 과거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차지했던 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이하 예총) 등 보수그룹의 박탈감은 클 수밖에 없다.
올해 초 문화연대와 민예총, 스크린쿼터문화연대가 공동 주관한 ‘새 정부 문화정책 관련 정책제안 토론회’에서 강내희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이 “새 정부에서 예총 같은 기득권을 누린 단체들 대신 민예총 같은 진보개혁 세력이 대거 전진 배치돼야 한다”고 발언해 예총과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당시 토론자로 나섰던 최종원 연극협회 이사장은 “예총이 120만 회원을 내세우면서도 이렇다 할 정책 제안을 하지 못한 책임이 있지만 일부 시민단체가 본질을 넘어 문화권력으로 탄생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사실 최 이사장은 대선 과정에서 ‘노문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새 문예진흥원 이사진에 합류한 친(親)노무현 인사. 그는 이장관의 인선 방식에 대해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불안하다”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문화연대나 민예총 등 문화계 진보세력은 최근 문화부 인사에 대해 “파격이나 편파가 아니라 이제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그동안 제도권 밖에서 해왔던 정부 정책의 감시와 비판 기능이 약화되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 소장은 최근 회원들의 공직 참여에 대해 “문화연대라는 단체 이름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개인 자격으로 갔다. 사안별로 관료주의로 빠지는 것을 과감히 비판하고 ‘참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민예총 정남준 사무총장도 “과거 민예총에 관여했던 분들이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해서 우리의 활동방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6월경 문화정책연구소를 재정비해서 정책생산 능력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민예총은 앞만 보고 간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당극 1세대로 90년대 민예총 사무처장을 지낸 임진택씨는 “누가 들어가 일을 한다 해도 또 다른 관료화를 낳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면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고 제도권 밖에 남을 사람은 남아서 할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모처럼 문화판에 분 개혁바람이 자칫 갈등과 분열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속에서도 참여정부가 내건 ‘문화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