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유전.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2위의 석유수출국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이 마당에 로또복권 당첨자 얘기인가? 아니면 열정과 아이디어로 성공을 움켜쥔 실리콘밸리 벤처기업가의 성공담인가? 이도 저도 아니다. 중동 정세의 불안으로 부침이 심한 국제원유가 덕분에 돈방석에 앉은 러시아 신흥재벌의 이야기다. 이들의 모습은 오일달러를 긁어모으던 1970년대 아랍의 석유부호들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해마다 ‘세계의 부자 500명’을 발표한다. 3월 올해의 명단이 발표되자 러시아 부자들이 무려 17명이나 포함된 사실이 화제로 떠올랐다. 러시아는 미국(222명), 독일(43명), 일본(19명)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자가 많은 나라가 됐다. 2000년에 포브스 순위에 오른 러시아 부자는 한 명도 없었고 지난해는 7명이 올랐다. 포브스는 러시아 1인당 국민소득이 2141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 러시아는 국민총생산(GDP)에 비해 가장 부자가 많은 나라라고 평가했다. 이 명단에 오른 한국인은 삼성 이건희 회장(123위)과 롯데 신격호 회장(177위) 두 명뿐이었다.
석유 수출 덕에 러 경제도 최대 호황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러시아 최고 부자인 미하일 호도로프스키 유코스 회장의 경우 지난해 101위였다가 올해 26위로 뛰어올랐다. 지난해 37억 달러였던 그의 개인자산이 올해는 80억 달러로 추정돼 1년 동안 2배 이상 늘어난 것.
러시아 부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석유 덕분이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 자리를 다투고 있다. 1999년 이후 고유가가 5년째 유지되다가 최근 이라크전쟁으로 국제유가가 한때 배럴당 30달러를 넘나들자 러시아 경제는 초유의 호황을 맞았다. 98년 외환위기로 지불유예(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던 러시아의 외환 보유고는 2월 말 531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석 달 만에 11%나 늘어난 수치다. 세계적인 경기 부진에도 2000~2002년의 러시아 GDP는 20%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포브스가 뽑은 17명의 러시아 부자 중 12명이 석유 및 가스 재벌이다. 최근 라이벌인 루코일을 제치고 러시아 석유업계의 정상에 오른 유코스는 호도로프스키 회장을 비롯해 6명의 중역들이 세계 500대 부자 안에 들었다.
러시아 부자들은 젊다. 17명 중 50대는 단 3명. 나머지는 모두 30, 40대다. 소련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소련체제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러시아의 ‘386세대’들이 오늘날 부자가 됐다. 대학시절부터 지하서클에서 ‘불온서적’이던 폴 사무엘슨의 ‘이코노믹스’ 등을 몰래 돌려 읽으며 자본주의를 동경하던 이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탱크를 막아내는 격렬한 투쟁 끝에 결국 소련체제를 붕괴시켰다.
이들은 92년 본격적인 시장개혁이 시작되자 투사에서 자본가로 발 빠르게 변신했다. 물론 이들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 졸부가 된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거칠고 예측하기 힘든 러시아 시장의 앞날을 내다보는 빠른 판단력과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하는 남다른 모험심이 있었다.
러시아 최고 부자인 호도로프스키는 구소련 콤소몰(청년동맹) 간부 출신. 구소련 말기에 부분적으로 개인사업이 허용되자 일찌감치 사업에 뛰어들어 경험을 쌓았다. 90년대 초반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호도로프스키는 95년 유코스를 인수했다. 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인 사유화 정책을 펴면서 매각한 거대 국영기업을 사들인 것이다. 그는 외국인 관리자와 회계책임자를 영입하고 서구식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등 혁신에 나서 덩치만 크고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의 모습을 바꿔놓았고 지난해 유코스를 러시아 최대의 석유회사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유코스는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중 267위를 차지했다. 유코스의 지난해 수익은 35억8800만 달러에 달한다. 포브스가 추정하는 유코스의 시장가치는 220억 달러로 전년에 비해 무려 222%나 증가했다.
호도로프스키에 이어 러시아 두 번째 부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시베리아 추코트카주 주지사로 정치인이다. 그러나 러시아 4대 메이저 석유재벌 중 하나인 시브네프티의 소유주이기도 한 그는 1년 동안 개인자산을 27억 달러나 늘린 것으로 밝혀졌다.
미하일 프리드만 알파그룹 회장의 성공담도 호도로프스키의 그것과 비슷하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모스크바 철강대학을 다니던 그는 88년 대학동창들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알파그룹의 주력사는 석유회사인 TNK. 최근 TNK는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늄(BP)과의 합병을 선언해 주목을 받았다. BP가 67억5000만 달러를 러시아 시장에 투자해 BP-TNK를 만든다는 것이다. 포브스는 “프리드만이 공격적인 인수·합병과 구조조정, 전략적 제휴에 능하다”고 평가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90년대 올리가르히(과두재벌)로 불리던 인물들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구소련 시절 경제관료나 국영기업 지배인 등 노멘클라투라(특권계층) 출신으로 시장개혁이 시작되자 정치권력과 결탁해 헐값에 거대 국영기업을 인수하거나 독점 등 이권을 챙겨 막대한 부를 쌓았던 러시아 1세대 재벌들이 퇴장한 것이다.
한때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대명사였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로고바스 그룹 회장은 현재 영국에서 사실상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핵심측근이었던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정부가 재벌개혁을 시작하자 국외로 나갔다. 롯데그룹과 제휴해 모스크바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에 대규모 호텔과 백화점 복합건물을 지으려던 프로젝트에서도 손을 뗐다.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모스트 그룹 회장도 푸틴 정부 재벌개혁의 희생양이 됐다. 감옥까지 다녀온 구신스키 회장은 그룹이 공중분해되자 국외로 나갔다. 세계 최대의 가스회사인 국영 가스프롬 지배인 출신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도 한때 러시아 최고의 부자로 꼽혔으나 이번에는 포브스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다. 이번 포브스 조사에 따르면 구시대 재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아브라모비치 주지사와 경제부총리 출신인 블라디미르 포타닌 인테로스그룹 회장 정도. 러시아에서 시장경제가 정착되고 푸틴 대통령의 등장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재벌의 판도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러시아 사회에는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하나 있다. 재벌들 대부분이 유대계라는 사실이다. 호도로프스키 아브라모비치 등 신흥재벌이나 베레조프스키 구신스키 등 구재벌 모두 유대계다. 재벌의 판도는 변해도 러시아 경제계에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