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제조업체에서는 매년 수십개의 신모델을 쏟아내고 있다(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 없음).
박씨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휴대폰 제조업체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씨는 이전에 서비스센터를 찾았다가 “액정과 단말기 회로를 연결하는 필름이 손상됐는데 무상 수리 기간(제조일로부터 1년)이 지났으니 4만원을 부담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고 되돌아 나왔다. 박씨는 이후 “4만원을 부담하느니 최신 단말기를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 결국 다른 회사 단말기를 구입했다. 이 기사대로라면 박씨의 휴대폰은 품질에 결함이 있었던 셈. 결과적으로 제조업체가 리콜을 하지 않아 박씨가 생돈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박씨가 휴대폰 제조업체가 판매하는 다른 제품까지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당연한 일.
LG “신제품 개발 과정서 확인”
박씨가 사용하고 있는 모델은 대표적인 국내 휴대폰 제조사인 LG전자의 Cyber5000 제품으로 2001년 11월, 보조금 혜택의 ‘막차를 타’ 구입했다. 박씨는 당시 가입비를 제외하고 단말기 가격 5만원에 이 기종을 구입했다. 당시 한 달 전과 비교하면 4분의 1 가격에 불과했다. 그런데 구입한 지 1년을 넘길 무렵부터 제품에 이상이 생겨 박씨는 LG측이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싸게 팔아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됐다.
물론 LG측은 “결함 있는 제품을 출시했을 리 없다”고 부인한다. 과연 그럴까. 휴대폰 제조업체 품질기술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플립형에 비해 폴더형은 전화기를 열고 닫을 때 휴대폰 액정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기 때문에 100만회 이상 폴더를 열고 닫는 실험을 한다. LG가 정상적인 실험을 거쳤다면 하루 2000번 이상 1년 내내 열고 닫아도 무리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같은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만한 실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도 LG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됐다.
LG 관계자는 뒤늦게 “당시 제품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진에 확인한 결과 그 모델은 이미 2001년에 단종된 것으로 그 제품의 액정에 쓰인 LCD가 약해 충격이 누적되면 화면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후 신제품 개발 과정에서 알게 됐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박씨가 문제의 제품을 구입할 당시는 단말기 보조금 지급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임박하자 이동통신사들이 대리점에 판매장려금을 지급하며 가입자 유치에 열을 올릴 때였다. 또 같은 시기, 삼성전자 LG전자 등 단말기 생산업체들은 초고속 무선인터넷용 ‘cdma2000 1x’ 생산체제로 전환하면서 수십만대의 구형 단말기를 처분하기 위해 가격을 낮췄다.
결국 박씨의 휴대폰은 초기 폴더형 제품이 초고속 인터넷이 가능한 단말기로 옮겨가는 과도기 제품으로 액정의 성능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채 출시됐던 것. LG 관계자는 “문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단종되고, 새로운 모델 생산이 진행되고 있어 되돌릴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러한 현상은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타사 제품에서도 나타날 확률이 있다”며 자사 제품에서만 나타나는 결함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최근 이용자의 부주의가 아닌 제조과정에서 비롯된 원초적 결함으로 인한 휴대폰 이용자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업체는 소비자에게 문제의 원인을 알리기는커녕 “왜 우리만 문제 삼느냐”는 태도를 보이거나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하다.
휴대폰 관련업체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인터넷 카페 등만 살펴봐도 소비자들의 불편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통화중에 갑자기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액정화면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수신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표시된 발신자번호와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하며 문자메시지 송수신율이 급격히 떨어지기도 한다. 이외에 무선인터넷을 사용하면서 이동할 경우 기지국을 옮겨가면 인터넷 접속이 끊어지고, 정전기만 발생해도 휴대폰이 오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액정화면이 뒤집힌 모습. 이 경우 문자메시지 송수신은 물론 발신자표시 서비스, 전화번호부 검색 등이 안 돼 사용자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왼쪽). 휴대폰에 무선인터넷, 모바일 결재, 카메라 등 다양한 기능이 첨가되면서 오히려 시스템이 불안정해지는 약점도 있다.
이처럼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휴대폰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도 관련업계가 대응에 미온적인 이유는 접수된 피해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제품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더라면 벌써 안티사이트 등으로 이슈화됐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자동차통신팀 최은실 차장에 따르면 지난해 1300여건의 휴대폰 관련 상담이 접수되고 이중 88건이 피해 구제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위와 같은 휴대폰 버그와 관련된 상담은 거의 없는 상태. 관련업체들이 큰소리를 칠 만도 하다. 그러나 최차장은 “휴대폰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제조업체가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소비자들 스스로 제조과정에서 비롯된 결함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문제가 은폐된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이 휴대폰을 교체하는 주기가 짧은 것 또한 생산자들이 제품 검증과정을 소홀히 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지적된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휴대폰 제조업체는 휴대폰 하나를 시장에 내놓아 단종될 때까지의 라이프사이클을 5개월로 본다. 그나마 초기 3개월 만에 전체 물량의 80%가 소화돼 휴대폰 하나를 개발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대략 10개월 정도로 잡는다. 이는 노키아 모토롤라의 1년6개월과 비교하면 주기가 매우 빠른 셈이다. 이를 보여주듯 올해 출시될 모델도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40개, 팬텍&큐리텔은 30개인데 반해 모토롤라는 7~8개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신모델 수량을 정하지 않은 노키아의 경우 지난해 1개 모델을 출시하는 데 그쳤다. 이는 한국의 IT강국으로서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충분한 연구기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신제품을 출시하는 데 급급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소비자들이 휴대폰 결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휴대폰을 교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악용, 뒤늦게 문제를 발견하고도 소비자 피해의 구제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은근슬쩍 덮어두려는 경향이 크다는 것.
휴대폰 제조업체들의 이런 태도를 보면 여전히 과거 대량생산시대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물건을 만들어놓고 팔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지금과 같은 ‘소비자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국제경쟁력을 기르는 지름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