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대통령(왼쪽 위)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왼쪽 아래) 등 미국 정부고위 인사들은 북한 핵무기에 대해 ‘원칙적인’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여기에서 나온 연구 결과는 군수공업 담당 비서인 전병호와 중앙당 조직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 등이 총괄하고, 핵·미사일과 같은 주요 사항은 담당 비서와 김정일이 직접 검토하게 되어 있다. 즉 북한 핵 개발 문제에 대해서는 적어도 중앙당 비서급 정도는 되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 핵이 있다는 것은 북한 고위층에서는 상식이다”는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발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서는 1993년 한반도 핵 위기 당시 미국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미국은 이 사실을 알고도 북한 핵 개발을 ‘현 수준’에서 동결한다는 합의하에 제네바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또한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내부적으로 북한 붕괴를 상정해놓고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데 합의했다. 즉 경수로가 완공되어 주요 부품이 들어가는 시점이 되면 북한 정권은 붕괴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동의해주었다는 것이다.
“핵 있다, 북한 고위층엔 상식”
외교통상부 이태식 차관보(왼쪽)가 10월17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인과 관련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에서 북한은 핵 개발을 시인했을까. 표면적으로는 켈리 특사가 북한 핵 개발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내부적으로는 면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미국이 압박해올 경우 핵 개발을 시인하고, 강하게 나가자는 전략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북한 핵에 ‘인질’로 잡힌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다. 한국과 일본에는 미군과 그 가족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도 북한 핵에 ‘인질’로 잡혀 있다. 따라서 김정일 정권의 핵 개발 시인은 “미국이 우리를 때리면 우리도 한국과 일본, 미군을 때릴 수 있다”는 카드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카드’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실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서 김정일이 먼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전쟁은 이긴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김정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경우 향후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어떤 경우에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핵을 갖고 있고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카드를 갖고 있는 측과, ‘절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측이 협상을 벌일 경우, 누가 유리한가 하는 문제는 상식에 속한다. 이미 한국 정부는 평화적 해결 원칙과 경협 지속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현재 북한 경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다. 공장 가동률은 10%를 밑돌고 수십만명의 탈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면적인 개혁 개방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전면적인 개혁 개방으로 나설 경우 김정일 정권은 무너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김정일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원조를 받든가, 남한과 일본을 상대로 ‘뜯어먹는’ 수밖에 없다. 94년 이후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뜯어먹으려면 상대에게 ‘협박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군사력이고, 그 정점에 핵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향후 김정일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김정일은 그동안 ‘햇볕정책’ 덕택으로 한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경제적 수혜를 받았다. 금강산 관광으로 ‘생명수’와 같은 고정적인 달러를 확보했고 쌀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서는 당장 ‘협박’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로서는 현재의 남북관계와 햇볕정책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더구나 한국은 곧 대선이다. 대선을 앞두고 판문점 총격이나 서해도발 등 긴장을 일으키면 자신에게 불리한 정권이 들어서는 데 도움만 줄 뿐이다. 오히려 ‘민족공조’를 앞세우며 “핵문제는 어디까지나 북한과 미국 사이의 현안인 만큼, 우리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된다”는 식으로 나올 수 있다. 한반도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 연결공사도 계속하고, 개성공단 문제도 진행시키자는 식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위). 94년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 금호지구에 건설되고 있는 경수로 공사 현장.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 정권이 현 중국식 개혁 개방으로 줄달음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정일은 어디까지나 수령 독재체제를 고수하는 한도 내에서의 외화벌이가 주목적인 것이다.
한편 김정일은 현재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만큼 당장 북한과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 때문에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포기, 미-북 평화조약 체결, 경제제재 해제와 같은 단기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우면서 ‘언제나 협상의 문은 열려 있다’는 식의 제스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역시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북한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서 내년 상반기까지는 북한과 협상에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종합적으로 볼 때, 새롭게 불거진 북한 핵문제가 다시 돌출되는 시점은 내년 상반기 무렵이 될 것이다. 그때쯤 되면 북한이 한국과 일본을 슬슬 ‘위협’하면서 동북아에 긴장상태를 유발해 미국과의 재협상을 노리면서 에너지 해결을 위한 ‘제2의 제네바 협정’ 카드를 들이밀며 ‘돈은 한국과 일본이 대도록 하는’ 과거의 전략을 다시 구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김정일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배상금을 타내는 것이 매우 절실한 형편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원칙을 고수한다는 입장이 확고한 만큼 이번에는 김정일의 전략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년 한반도는 다시 한번 긴장의 파고에 휘말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북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서둘러야 할 시점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