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에 관계없이 신고된 월급만으로 부과 ‘불합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실제 10대 재벌총수보다 의보료를 많이 내고 있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5447명에 달한다.
‘주간동아’가 보험공단으로부터 단독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10대 재벌총수 중 가장 적은 의보료를 내고 있는 현대아산 정몽헌 이사회장의 월 의보료는 63만7000원(표 참조). 직장인의 의보료가 월급(표준보수월액)의 3.63%이므로 정회장이 국세청에 신고한 월급이 1750만원이라는 이야기다. 전국적으로 정회장보다 많은 의보료를 내는 사람은 5447명, 금호그룹 박성용 명예회장이 내는 보험료 77만원(월급 2112만5000원)보다 많은 의보료를 내는 사람은 3474명에 달했다.
정회장이나 박 명예회장의 2배 가까이 보험료를 내고 있는 직장인이 1000명에 육박했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184만4000원)보다 많은 보험료를 내고 있는 국민만도 107명, 특히 이중 10명은 샐러리맨이었다.
어떻게 수천억원대의 재산을 가진 재벌총수보다 샐러리맨이 더 많은 의보료를 내고 있는 것일까. 또 재벌총수들은 어떻게 이렇게 적은(재산에 비해) 의보료를 내고 있는 것일까. 이는 사업장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은 그 직위에 관계없이 근로소득에 대한 직장의보료만 낼 뿐 기타 소득(금융소득, 부동산 소득)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전혀 의보료가 부과되지 않는 의보료 부과체계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재벌총수들은 국내 최고의 재산가들이지만 의보료는 오직 국세청에 신고된 직장 내 월급에 대해서만 부과되는 것. 만약 이들 재벌총수들이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해 있다면 소득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의보료 산정 기준이 된다. 재벌총수의 경우 회사에서 받는 월급보다 배당수익이나 금융소득 등 기타 소득으로 분류되는 수입이 훨씬 많다는 점과, 국세청에 신고하는 급여 액수는 ‘신고하기 나름’인 명목상 수입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직장과 지역으로 이원화된 현행 건강보험 체계는 재벌총수들에게 엄청난 ‘절세의 길’을 열어두고 있는 셈이다.
이건희 회장 새 부과체계로 年 1억3000만원 절약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담실. 공단은 재벌총수의 보험료 경감과 관련해 과연 국민의 동의를 구했을까?
재벌총수들의 의보료와 관련한 의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월급이 3억4812만5000원이나 되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의보료가 어떻게 184만4000원밖에 되지 않을까. 직장인의 의보료가 월급의 3.63%인 점을 고려하면 이회장의 의보료는 매달 1263만원이어야 옳다. 매달 7005만2000원의 월급을 받는 한화 김승연 회장도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255만원의 의보료를 납부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내는 의보료는 똑같이 184만4000원으로 책정됐다. 왜일까?
해답은 이들 재벌총수들을 비롯한 고액 연봉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진 현행 직장건강보험료 부과체계에 숨어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초부터 사업장별로 근로자의 의보료 상한선을 184만4000원으로 정하고, 이를 넘는 금액은 모두 감액 처리토록 했다. 아무리 고액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라도 184만4000원만 내면 의보료 고민은 ‘끝’이다. 이에 따라 삼성 이회장은 한 달에 1079만5000원, 1년에 1억3000만원에 가까운 의보료를 감면받게 된 셈이다.
10대 재벌의 건물들. 과연 재벌총수들은 자신의 보험료 삭감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들은 전혀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크다.
월급이 삼성 이회장의 25%밖에 되지 않는 한진 조중훈 회장(8200만원)의 의보료가 295만원, 이회장의 절반에 불과한 롯데 신격호 회장(1억7824만8000원)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1억7166만5000원)의 의보료가 이회장의 3배에 이르는 646만원과 589만원에 이르는 것도 2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내고 있는 의보료를 모두 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험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복지부가 재벌총수들의 의보료를 경감해준 이유는 뭘까.
사실 이는 재벌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며, 경감조치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부는 2000년 7월 공무원과 군인, 일반의료보험으로 나뉘어져 있던 직장의료보험 체계를 단일체계로 통합하면서 그해 12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의보료 경감조치를 실시했다. 통합 이전 공무원과 교원, 군인, 회사원 등 각 직장보험조합의 보험 재정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던 의료보험 요율을 2.4%로 단일화하는 과정에서 의보료가 상대적으로 30~70% 증가한 직장인에 대해 증가분의 일부분을 삭감키로 한 것.
2000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실시키로 했던 경감조치는 다음해 통합의료보험 요율이 3.4%로 오르면서 1년간 연장된다. 2000년 12월 기준으로 20% 이상 인상된 가입자의 경우 20%를 초과하는 의보료는 완전 감면해준 것이다.
하지만 의료보험료 부과체계 변화로 생긴 직장인간 상대적 박탈감을 줄이기 위해 실시된 경감조치는 올해 초 사업장별 보험료 상한선(184만4000원)이 정해지면서 고액 연봉자들, 특히 재벌총수에게 유리하게 적용돼버렸다. 결국 ‘박봉’의 직장인들을 위해 마련된 제도가 재벌총수들과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의 의보료 경감 방편으로 전락한 셈이다.
삼성 이회장의 경우 지난해와 올해의 신고 월급에 차이가 전혀 없는데도 지난해 월 810만원이던 의보료가 올해 184만4000원으로 준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12월을 기준으로 의보료가 100% 인상된 경우에 대해서는 100% 초과분의 50%를 다시 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경감제도의 ‘한시적 실시’라는 대국민 약속을 두 번씩이나 어긴 것이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경감조치를 계속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상이했던 의료보험료 부과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가입자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통합보험 요율을 연착륙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 “의보료 상한선 적용은 외국에서는 이미 관례화된 것으로 턱없이 높은 의보료에 맞는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해 취해진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부의 각종 의료보험료 경감조치가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독소’라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소득만큼의 보험료를 내고, 혜택은 평등하게 받는 것이 사회보장제도의 근본이다. 이렇게 보험료를 경감해주고, 상한선까지 두는 것은 의료보험료 부과체계의 형평성 원칙에 위배되는 조치일 뿐 아니라 특정인을 위한 편의적 제도다. 이는 세금에 상한선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국회 보건복지위 김홍신 의원)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창엽 교수는 “의보료가 소득 재분배 효과가 있는 세금과는 분명 다르고, 외국에서도 의보료에 상한선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험재정이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또 세금을 통해 재산과 관련된 사회적 정의가 달성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상한제 도입은 너무 성급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상한선 도입으로 인해 의보료 감면 혜택을 본 사람은 전국적으로 274명, 연간 의보료 감면액은 47억4000만원에 달했다. 건강보험 재정이 올 연말 기준으로 누적적자 2조5714억원, 당기적자 7605억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복지부가 의보료 상한제를 전격 도입한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올해 초 정부는 재벌을 위시한 고소득 연봉자에 대한 의보료 추가 경감과 상한선 설정을 발표하면서 한편으론 서민들의 보험료를 6.7% ‘또’ 올렸다. 물론 구멍 난 건강보험 재정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미려한 문구로 해명을 거듭한다 해도 서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똬리 튼 ‘상대적 박탈감’은 쉬 해소될 것 같지 않다. ‘샐러리맨 주머니를 털어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줬다’고 비난해도 정부는 할 말이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