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0일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이란과의 축구 준결승전에서 패배가 확정된 순간 한국팀 선수들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이럴 때 실패는 반보 전진이라는 금언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 축구는 국민들의 부푼 기대와 열정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다시 4년 뒤를 기약하며 새 출발을 위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패배의 원인을 진단해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구시대 전략으로 일류팀 어렵다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한국 축구가 크게 성장한 부분은 경기를 제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란과의 준결승전에서처럼 일방적인 흐름에서도 골을 터뜨리지 못하는 것은 골결정력 부재라기보다는 효과적인 템포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밀집 수비를 깨기 위해서는 미드필드까지 상대를 유인한 뒤 그 배후 공간을 노리는 게 상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격 템포를 조절하는 플레이가 필요한데 나이 어린 우리 선수들은 무조건 치고 달리는 플레이를 하다 보니 상대 수비수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란전 패배에는 선수들의 역할 부재도 한몫했다. 같은 포지션이라도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다양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이 11명의 선수에게 역할을 확실히 정해뒀던 것이 단적인 예다. 월드컵 대표 시절 이영표가 최전방 깊숙이 공격에 가담했다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크게 혼난 적이 있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다 보면 큰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두고 “각 포지션마다 자기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선수들이 자주 자기 위치를 벗어나다 보니 공수 밸런스가 맞질 않아 공격이 살아나질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공격수들의 위치가 중복되고 효과적이지 않다 보니 좌우에서 좋은 크로스패스가 올라온다고 해도 효과적인 공략을 해내지 못했다. 확실한 역할이 없기 때문에 히딩크 감독이 강조했던 밸런스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에다 “상대보다 강하다고 생각될 때는 체력과 심리적으로 완벽히 제압하라”는 히딩크 감독의 요구를 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은 잊은 듯했다.
‘한국 축구 2년 전으로 돌아갔나?’ 한국 대표팀이 한 수 아래인 아시아팀을 상대하고도 금메달 달성에 실패한 것은 박항서 감독과 축구협회의 불화, 2년 전의 전략, 아직도 남은 히딩크 그림자 등이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박항서 호’는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말았다. 박감독의 데뷔전이었던 9월7일 남북통일축구대회에서 협회는 히딩크 감독을 벤치에 앉히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고 말았다. 히딩크 감독은 엄연히 PSV아인트호벤의 감독이다. 벤치에 두 명의 감독이 앉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후 박감독이 계약을 하지 않고 아시아경기대회 이후까지 무보수로 일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지면서 협회와 박감독의 갈등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결국 해임 직전까지 몰렸던 박감독은 협회 이사회로부터 엄중 경고 처분을 받고 지휘봉을 계속 잡을 수 있었다.
전임 대표팀 감독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박감독에 대한 협회의 처사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기술위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 기술위원회 역시 이용수 전 위원장 때와는 달리 협회 고위관계자들의 대변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2년 전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대표팀 위상이 급락한 상황에서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히딩크 이후를 생각하고 재정비했어야 할 협회와 협회장이 정치적인 이유로 ‘히딩크 짝사랑’에 빠진 결과였다.
여전히 짙게 드리워진 ‘히딩크 그림자‘
지난 6월 한국 축구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내자 사회 곳곳에서 ‘히딩크를 배우자’는 열풍이 불고, ‘히딩크 효과’에 사기충천했다.
4개월이 지난 현재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애를 먹으며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히딩크 효과의 내용을 이어받기보다는 표상만을 쫓아다닌 ‘히딩크 부작용’이라고 진단한다.
그동안 협회는 히딩크에 대해 맹목적인 짝사랑을 보이며 박감독을 홀대했던 게 사실이다. 협회가 감독의 위신을 세워주지 않는데 선수들에게 감독의 권위가 제대로 설 리 없다.
9월10일 수재민 돕기 자선경기에서는 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 주장 이동국이 전반 32분 자신을 교체하자 주장 완장을 땅에 내팽개치는 일이 벌어졌다. 히딩크 감독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주장까지 오른 이동국 개인의 생각 없는 행동도 문제지만 이는 대표선수들이 코칭스태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1년 6개월 동안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것은 합리적인 대표팀 운영과 ‘최종 결정은 내가 한다’는 강한 뚝심이었다. 공평무사한 선수 선발과 기용, 섬뜩하리만치 치밀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훈련 등도 전에 없던 것이었다.
우리는 왜 히딩크가 전해준 진짜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이전투구하고 있을까. 히딩크를 배우자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계의 논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그 선두에 서 있던 축구 역시 휘청거리고 있다.
경제에서는 침체기에서 벗어나려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현상을 ‘더블딥’(Double Dipㆍ이중 하강)이라고 부른다. 나무가 크면 그림자도 긴 법이다. 한국 축구 역시 ‘히딩크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붉은 옷을 입은 700만명의 길거리 응원단이 보여준 뜨거운 성원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한 수 아래인 아시아 팀을 상대하고도 금메달 달성에 실패한 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을 살펴보면 한껏 상승했던 한국 축구가 예전으로 돌아갔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4년 뒤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우선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며 본선에 오른다면 유럽 국가들의 강한 견제가 기다리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결과가 결코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 축구는 지금부터라도 새 출발을 해야 한다. ‘갇혀 있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기며 대표팀 전력 향상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