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근 PD(위)와 김광민(아래)을 이어준 사람은 요절한 가수 유재하다. 각기 생전의 유재하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재하가 ‘수요예술무대’에 출연했다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노래를 들려주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기분 나도 알아. 나도 한 몇 년간은 그랬어.”
10월로 방송 10주년을 맞은 MBC 음악프로그램 ‘수요예술무대’ PD 한봉근(45)과 MC인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43)의 대화다.
1992년 10월, ‘일요예술무대’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이 프로그램은 그동안 ‘토요예술무대’ ‘수요예술무대’ 등 방송 요일에 따라 수차례 이름은 바뀌었지만 ‘수준 높은 라이브 공연 프로그램’이라는 성격만은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조수미, 신영옥, 사라 브라이트만 등 클래식 음악가를 비롯해 윈턴 마샬리스, 팻 매시니, 케니 G, 허비 행콕 등 쟁쟁한 음악인들이 이 무대를 거쳐갔다.
각기 10년, 9년 동안 ‘수요예술무대’를 지켜온 이가 PD 한봉근과 MC 김광민. 사적으로도 막역한 친구 사이인 이 두 사람이 없는 ‘수요예술무대’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한국 방송에서 10년간 한 프로듀서와 사회자가 같은 프로그램을 맡아온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요. 92년 가을 개편 때 ‘일요예술무대’로 시작할 때는 아침 프로그램이었고 아나운서 한선교씨가 한 6개월 정도 진행을 맡았었죠. 심야 프로그램으로 바뀌면서 제가 김광민씨에게 진행을 맡겼어요. 당시에 프로그램 안에 ‘김광민의 재즈교실’이란 작은 코너가 있었는데 그 코너를 진행하다 프로그램 전체 사회자가 된 거죠.” 한PD의 말이다. 그러고 나서 훌쩍 10년의 세월이 지나가버렸다. 두 사람은 요즘도 자주 만나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조수미에 대한 기억
‘수요예술무대’는 별다른 리허설도 편집도 없다. 김광민이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재즈 연주를 들려주거나, 출연자와 함께 연주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한PD는 느닷없이 녹화 중간에 엉뚱한 부탁을 하기도 한다.
김광민: 한참 녹화하고 있는데 형이 갑자기 ‘야, 그거 말고 딴 곡 해봐’ 그러면 난 정말 돌아버린다구.
한봉근: 내가 널 알잖아. 되는 걸 아니까 그렇게 시키지. 지난번에 케니 G도 너랑 즉흥적으로 잼 세션 하고 나서 참 기분 좋아하더라.
10여년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생겨난 에피소드는 수도 없이 많다.
김: 겨울에 문화체육관에서 녹화할 때는 연주를 해야 하는데 너무 추워서 손이 안 움직이더라고. 그래서 잠깐 쉴 때마다 연주자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조명에 손을 녹인 후에 다시 연주하곤 했지.
한: 그런데 그런 추운 날씨에 조수미씨가 얇은 드레스 입고 나오지 않았어? 너 그때 조수미씨 노래 듣고 완전히 넋이 나갔잖아.
김: 맞아, 조수미씨가 우리 프로그램에 나와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불렀잖아. 난 그때 리허설중이라 객석에 앉아 노래 듣고 있었는데, ‘아, 모든 거 다 뿌리치고 저 여자 쫓아다니면서 평생 노래만 들어도 좋겠다’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정말 당당하고 멋있는 음악가였어.
한: 조수미씨가 우리 프로그램 나와서 처음 핸드마이크 손에 잡고 노래 불렀어. 재즈도 참 잘했지. 사실 조수미씨처럼 일급 음악가만 출연시키는 것이 ‘수요예술무대’의 고집이라면 고집이야. 클래식이나 재즈가 아직은 대중에게는 낯선 장르잖아. 정말 잘하는 연주자가 해야 문외한이 들어도 ‘아, 잘하는구나’ 하고 느끼지, 어설픈 음악가가 나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거 같아. 섭외가 안 되면 차라리 광민이 네가 연주하는 게 더 낫지.
김: 나는 허비 행콕이 가장 기억에 남아.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 입장에서 봐도 연주 참 잘하더라.
한: 난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인상적이었어. 그 친구 처음 스튜디오에 왔을 때는 거만한 태도로 모든 걸 다 명령조로 말했지. 그런데 리허설할 때 보니까 자기 앞에 밥 제임스, 척 맨지오니 같은 쟁쟁한 음악인들이 나오는 거야. 그때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너무 놀라면서 ‘한국에 이런 프로그램이 다 있냐?’고 묻더라. 180도 변해서 정말 겸손한 태도로 녹화하고 갔지.
‘수요예술무대’는 10월 한 달 동안 10주년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케니 G, 밥 제임스, 다이애나 크롤 등 쟁쟁한 음악인들의 명연주를 만날 수 있다.
한: 아무래도 20대 취향에 맞고 팝도 한두 곡 부를 수 있는 가수들이 우리 프로그램에 맞지.
김: 나는 임재범이나 박정현이 마음에 들었어. 박정현은 재즈 즉흥 연주도 잘해서 놀라웠어. 그런데 가수들은 우리 무대에 나오고 싶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녹화하고 나서도 다들 ‘다시 하면 안 되냐’고 몇 번씩 물어보고.
한: 얼마 전에 성시경이 우리 무대에 처음 나왔잖아. 그 친구가 나중에 나한테 ‘이제야 진짜 가수가 된 것 같다’고 그러더라.
‘수요예술무대’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는 MC가 음악인이라는 점. 김광민은 물론이고 97년부터 공동 MC를 맡고 있는 이현우도 가수다. 이들은 가끔 출연자를 두고 자신들끼리 신나게 음악 이야기를 해 공연장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다.
한: 우리 인터뷰는 썰렁한 게 특징이지. 어떤 때는 광민이 네가 음악에 대해 너무 살벌하게 파고 드는 바람에 출연자가 바짝 얼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내가 나중에 편집하면서 보면 기가 찰 때도 많아.
김: 하하하, 난 인터뷰도 즉흥으로 하니까 그렇지.
10년 동안 변한 것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수요예술무대’는 10월 한 달 동안 10주년 축하 무대를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수요예술무대’의 성격도 조금은 변할까.
한: 글쎄, 음악 프로그램의 성격이 크게 바뀔 수가 있을까? 그때그때 좋은 음악 들려주는 게 중요하겠지.
김: 10년간 ‘수요예술무대’ 자체가 변했다기보다는, 한국 음악 풍토가 ‘수요예술무대’로 인해 변한 게 더 크다고 봐.
한: 우리가 처음 이 프로그램 시작할 때만 해도 음악은 클래식 아니면 대중가요였어. 그 중간이 없었지. 그런데 이제는 뉴에이지나 재즈,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많아졌어.
김: 나는 그게 ‘수요예술무대’의 가장 큰 공로라고 생각해. 이제는 재즈 공연이 일반화됐지만 10년 전에는 재즈 공연을 찾을 수가 없었어.
‘수요예술무대’는 평균 3% 정도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3%라는 시청률이 결코 낮다고 보지 않는다.
한: 얼마 전에 ‘대한민국 3%’라는 말을 프로그램에 내건 적이 있었어. 아마 이 3%는 우리나라에서 음악 좋아하는 사람 대부분일 거야.
김: 오히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수요예술무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수요예술무대’ 없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음악인도 많아.
한: 모르지. 아무리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라도 개편 때마다 폐지될 가능성은 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딱 10년만 더 ‘수요예술무대’를 하고 싶어. 이제는 약간의 사명감도 가지고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되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