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교수신문’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생명과 반생명의 대화’ 심포지엄에서 아주대 이종찬 교수(의학사상)가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다.
“은행이나 동사무소에 가면, 한 직원이 한꺼번에 서너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구사회의 ‘합리성’이란 잣대로 보면 매우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언어를 빌리면 서구인들은 ‘모노크로닉’(monochronic) 시간 속에서, 한국인들은 폴리크로닉(polychronic)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처럼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교수는 한국의 폴리크로닉 문화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을 꼽으면서, 닭고기를 부위별로 파는 프라이드 치킨에서 서구의 모노크로닉 문화를 찾았다(우리에게는 통째로 먹는 삼계탕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도 서구의 단선적 사고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교수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철학, 의학, 경영학, 문학 등을 한꺼번에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반적일 뿐 아니라 이상적인 경우로 받아들여지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은 남의 학문 영역을 엿보거나 침범하는 사람으로 치부한다”고 개탄했다. 우리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노크로닉’ 사고를 받아들이면서 ‘폴리크로닉’ 사고의 장점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미국의 역사학자 존 브룸필드가 쓴 ‘지식의 다른 길’은 기계론적 사고에 젖어 있는 서구사회가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다. 브룸필드는 ‘우리가 아는 지식만이 전부인가’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사물을 이해하려면 서구 합리주의 방식을 통해야만 한다는 편견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현대 서구인들은 지식을 얻는 방식의 도식화라는 심각한 우를 범했다. 그들은 이렇게 얻은 지식을 과학과 역사의 이름으로 치장했으며, 오직 그것만이 지식의 전부인 양 착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그들이 신봉하는 지식이 실재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잘못된 길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은 지식에 이르는 또 다른 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브룸필드가 말하는 다른 길을 찾으려면 먼저 역사에 대한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도입부에서 원시인들이 뼈를 연장으로 쓸 수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하늘 높이 던지자 멋진 우주선으로 변한다. 이 장면은 현대 서구문명이 발전의 정점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드러낸다. 과연 그럴까? 다섯 살 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알고 덧셈 뺄셈을 할 줄 아는 도시의 아이와, 먹을 것을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생존하는 방법을 익힌 오지의 아이 중 누가 더 머리가 좋은지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역사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또 브룸필드는 인간과 피조물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고전과학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과학의 확실성과 자연법칙의 단일성에 근거한 고전과학체계는 현대에 와서 상당부분 수정 내지는 폐기될 상황에 처해 있다.
현대의학의 문제는 서구의 기계론적 생명관이 지닌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종찬 교수도 앞의 심포지엄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기계론적 의학지식을 취하게 되면 질병의 치유는 의료인들의 독점적 권한이 되고 환자가 치유의 과정에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대체로 비용이 비싼 의료서비스를 전제로 한다.”
‘지식의 다른 길’은 미국판 ‘녹색평론’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어왔던 지식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는 한편, 간디의 철학과 새로운 교육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브룸필드의 주장은 ‘정답’이라기보다 ‘대안’이라는 차원에서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가 신뢰해 온 지식은 자유가 아닌 구속의 지식”이라는 저자의 독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특효약이다.
존 브룸필드 지음/ 박영준 옮김/ 양문 펴냄/ 328쪽/ 1만
“은행이나 동사무소에 가면, 한 직원이 한꺼번에 서너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구사회의 ‘합리성’이란 잣대로 보면 매우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언어를 빌리면 서구인들은 ‘모노크로닉’(monochronic) 시간 속에서, 한국인들은 폴리크로닉(polychronic)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처럼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교수는 한국의 폴리크로닉 문화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을 꼽으면서, 닭고기를 부위별로 파는 프라이드 치킨에서 서구의 모노크로닉 문화를 찾았다(우리에게는 통째로 먹는 삼계탕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도 서구의 단선적 사고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교수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철학, 의학, 경영학, 문학 등을 한꺼번에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반적일 뿐 아니라 이상적인 경우로 받아들여지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은 남의 학문 영역을 엿보거나 침범하는 사람으로 치부한다”고 개탄했다. 우리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노크로닉’ 사고를 받아들이면서 ‘폴리크로닉’ 사고의 장점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미국의 역사학자 존 브룸필드가 쓴 ‘지식의 다른 길’은 기계론적 사고에 젖어 있는 서구사회가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다. 브룸필드는 ‘우리가 아는 지식만이 전부인가’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사물을 이해하려면 서구 합리주의 방식을 통해야만 한다는 편견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현대 서구인들은 지식을 얻는 방식의 도식화라는 심각한 우를 범했다. 그들은 이렇게 얻은 지식을 과학과 역사의 이름으로 치장했으며, 오직 그것만이 지식의 전부인 양 착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그들이 신봉하는 지식이 실재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잘못된 길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은 지식에 이르는 또 다른 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브룸필드가 말하는 다른 길을 찾으려면 먼저 역사에 대한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도입부에서 원시인들이 뼈를 연장으로 쓸 수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하늘 높이 던지자 멋진 우주선으로 변한다. 이 장면은 현대 서구문명이 발전의 정점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드러낸다. 과연 그럴까? 다섯 살 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알고 덧셈 뺄셈을 할 줄 아는 도시의 아이와, 먹을 것을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생존하는 방법을 익힌 오지의 아이 중 누가 더 머리가 좋은지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역사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또 브룸필드는 인간과 피조물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고전과학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과학의 확실성과 자연법칙의 단일성에 근거한 고전과학체계는 현대에 와서 상당부분 수정 내지는 폐기될 상황에 처해 있다.
현대의학의 문제는 서구의 기계론적 생명관이 지닌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종찬 교수도 앞의 심포지엄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기계론적 의학지식을 취하게 되면 질병의 치유는 의료인들의 독점적 권한이 되고 환자가 치유의 과정에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대체로 비용이 비싼 의료서비스를 전제로 한다.”
‘지식의 다른 길’은 미국판 ‘녹색평론’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어왔던 지식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는 한편, 간디의 철학과 새로운 교육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브룸필드의 주장은 ‘정답’이라기보다 ‘대안’이라는 차원에서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가 신뢰해 온 지식은 자유가 아닌 구속의 지식”이라는 저자의 독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특효약이다.
존 브룸필드 지음/ 박영준 옮김/ 양문 펴냄/ 328쪽/ 1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