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의 세계 속에 살았지만 비할 바 없는 정열과 힘으로 생전 1만5000여점의 작품을 제작했던 운보.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년이 흘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바보천재 운보 그림전’은 운보의 1주기 추모 전시회다. ‘입체파적 풍속화’ ‘예수의 생애’ ‘바보산수 바보화조’ ‘추상의 세계’ 등 네 갈래로 나뉜 운보의 그림 100여점이 전시된다.
“운보는 무려 70년간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손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했던 최후 몇 년간을 제외하면 평생 동안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85세까지 그렸으니까요.”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최은주 분관장의 말이다. 최분관장은 ‘운보는 예술가와 장인의 기질을 동시에 타고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즉 뛰어난 손재주를 지닌 천부적 장인이자 70년의 긴 세월 동안 쉴새없이 창조정신을 발휘한 독창적 예술가라는 뜻이다.
100여 화폭 천재화가 ‘숨결’ 가득

이번 전시의 첫번째 주제인 ‘입체파적 풍속화’에서는 아내이자 그림의 동반자였던 우향 박래현의 숨결이 확연히 묻어났다. 그러나 비슷한 경향을 추구하면서도 우향과 운보의 그림에서는 차이가 느껴진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한 우향의 화폭에는 치밀함과 긴장감이 가득하다.
반면, 이당 김은호를 사사한 것이 미술교육의 전부였던 운보의 그림은 그와 딴판이다. 그의 화폭에서는 단순함과 삶에 대한 낙관적 시각 그리고 해학이 담겨 있다. 화면 가득히 굴비 굽는 석쇠를 그린 ‘굴비’에서는 연탄불의 매캐한 냄새와 함께 짭쪼름한 생선 비린내까지 맡아질 듯하다.


충북 청원에 은거하던 70, 80년대에 운보는 집중적으로 바보산수를 그렸다. 재직하던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교수직에서도 물러나 거칠 것 없는 자유인의 신분이었다. 운보가 가장 그리고 싶어 그린 그림들이라는 바보산수 속에서는 언뜻 현대회화의 세련된 미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운보의 정열은 여기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남들 같으면 이미 붓을 놓고 은퇴했을 70대 나이에 운보는 다시금 실험을 시작한다. 문자추상과 붓 대신 봉걸레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봉걸레 추상’이다. 운보의 4기이자 마지막 경향이 된 추상작품들에는 꺼지지 않는, 아니 더욱 형형해진 예술혼이 맹렬하게 타오른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악사와 무희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운보는 평소 음악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목을 쭉 뺀 채 피리를 불고 있는 악사들과 그에 맞추어 너울너울 어여쁜 춤사위를 추고 있는 여인들. 침묵 속에 평생을 산 화가가 그린 소리가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화폭에 실려 있었다(4월 7일까지, 문의 02-2020-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