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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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도학자 퇴계의 행복지수는?

탄신 500주년 기념 ‘글로 보는 삶과 예술전’… 정신 이상 아내·두 번의 喪妻 등 굴곡진 삶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1-24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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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도학자 퇴계의 행복지수는?
    올해는 퇴계 이황(1501~70) 선생의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다. 퇴계가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퇴계라는 이름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라는 막연한 표현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가깝게 볼 수 있는 퇴계의 모습은 오직 1000원짜리 지폐에 들어 있는 초상뿐이다.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열리고 있는 ‘퇴계 이황-글씨로 보는 도학자의 삶과 예술’전은 이 위대한 학자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전시회다. 그의 글씨와 그림은 퇴계 역시 500여년 전의 시간을 살았던 한 인간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유언 통해 장례 간소화 ‘엄정한 성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퇴계는 상당한 명필이었다. 그는 담백한 예서부터 활달한 초서까지 막힘없이 구사했다. 다만 멋을 부리거나 의도적으로 잘 쓰려고 한 글씨가 아니라는 점은 문외한에게도 단박에 느껴진다. 퇴계는 일찍이 “글씨의 자법(字法)은 심법(心法)에서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글씨를 쓰는 일 역시 도를 닦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퇴계의 친필 유묵 60여점, 그림 10여점, 퇴계의 동료와 제자들의 글씨 20여점 등 모두 100여점이 전시되었다. 아들 준, 친구인 남명 조식 등에게 보낸 서한이나 퇴계 선생의 유언을 조카 영이 받아쓴 ‘유계’, 그리고 보물 902호인 퇴계 말년의 글씨 ‘초서고시’ 등이 전시품목에 포함되어 있다. 퇴계가 타계하기 나흘 전에 남긴 유언은 ‘국장(國葬)을 하지 마라, 유밀과를 놓지 마라, 비석을 사용하지 마라’ 등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엄정한 성품을 느끼게 한다.



    위대한 도학자 퇴계의 행복지수는?
    특히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은 퇴계가 글씨는 물론 그림까지 그린 ‘활인심방’이다. 기체조를 하는 도인을 그린 그림은 손을 위로 쭉 뻗은 모습, 또 빼빼 마른 몸피에 선명한 등뼈 등이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활인심방은 도교에서 전해지는 기체조의 일종이다. 퇴계는 20대에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그러나 활인심방과 같은 도인체조를 통해 70세에 이르도록 심기를 건강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이 밖에 퇴계가 27세에 경상도 향시에서 진사시 1등, 생원시 2등을 할 때 쓴 과거 답안지 ‘대과초시답지’, 제자 권호문에게 글씨 교본으로 써준 ‘퇴도선생필법첩’, 퇴계의 한글 필체를 감상할 수 있는 ‘도산십이곡’ 판본 등도 퇴계의 풍모가 드러난 작품이다. 퇴계는 ‘한시(漢詩)로는 노래할 수 없다’며 한글로 도산십이곡을 지어 아이들에게 익혀 노래하게 하였다.

    위대한 도학자 퇴계의 행복지수는?
    학문적으로는 큰 성과를 이루었으나 퇴계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두 번에 이른 결혼생활은 모두 불행했다.

    첫 부인 허씨는 둘째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둘째 부인 권씨는 정신이 혼미한 사람이었다. 일화에 따르면, 하루는 퇴계가 외출하기 위해 해어진 도포를 기워달라고 하자 부인 권씨가 흰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주었다고 한다. 퇴계는 아무 말 없이 그 도포를 입고 외출했다. 그나마 부인 권씨 역시 퇴계가 46세 때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번이나 상처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부인과 살았던 퇴계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퇴계가 노년에 이르러 제자 이함형에게 쓴 편지에는 그가 겪었던 갈등의 편린이 드러나 있다.

    위대한 도학자 퇴계의 행복지수는?
    “내가 일찍이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하나같이 심한 불행을 당하였소. 그러나 이러한 처지에서도 마음을 감히 스스로 박하게 갖지 않고 잘 처리하는 데 힘쓴 지 수십년이었소. 그 사이에 극도로 마음이 번거롭고 생각이 산란하여 어지럽고 고민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어찌 감정만 좇아 큰 인륜을 무시하여 홀어머니께 근심을 끼칠 수 있었겠소.”

    퇴계는 부부간 금실이 좋지 않았던 이함형이 도산서원에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오자 넌지시 이 편지를 건네주었다. 부인을 소박하려 했던 이함형은 편지를 받고 감동하여 금실을 회복했다고 전한다. 힘든 결혼생활을 감내했던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며 제자의 불행을 막으려 했던 퇴계의 자상한 면모가 그대로 느껴진다.

    퇴계는 설명이 필요 없는 위대한 도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개인적인 불행 앞에서 ‘견디기 어려워한’ 인간이기도 했다. 퇴계의 글과 그림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위대함보다는 이 같은 인간적인 숨결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12월9일까지, 문의: 02-580-1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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