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험전형’이니 ‘새 학교문화 창조’니 하는 것은 ‘국민의 정부’가 일련의 교육정책을 채용하면서 내건 구호다. 2002년에는 입시 없이 대학에 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입시 위주의 학교문화가 바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교육정책은 입시를 없애거나 입시경쟁 없는 학교문화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다. 2002년이 눈앞에 닥치니 수능을 더 어렵게 해 입시를 강화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정부를 믿고 입시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며 지탄받는 ‘이해찬의 아이들’이나 그 부모가 불쌍할 뿐이다. 정부 당국에 속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는 속지 않고 입시의 고통도 없애려면 그 속임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국민의 정부의 무슨 정책을 놓고 이러는가. 요즘 BK21이라는 이름으로 추진중인 ‘연구 중심 대학’ ‘대학원 중심 대학’이라는 일본서 베껴 온 정책이 그 예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는 원인의 하나는 실속보다 외적 요건 때문에 생겨난 일류대학들이 전국의 진학 희망자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인데, 그 정책은 3대 일류대학에 2조원의 국비를 투입하여 세계 수준의 대학원 중심 대학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정책의 의심할 바 없는 메시지는 “이제 대학 나와도 소용없어, 대학원에 가야 해, 그것도 초일류 대학원 중심 대학에” 하는 것이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전국의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똑같은 교과서로 가르치게 하는 제도를 꼽을 수 있다. 모두 똑같은 것을 배우니 입시경쟁을 치르는 아이들은 그 ‘똑같은 것’을 다 안다. 한편 대학에는 학생 정원이 있으니 그 ‘똑같은 것’에 관해 시험 치르고 석차 매겨 정원 내에서 신입생을 받아들인다. 그러니 입시준비를 시키는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시험 치르게 하고 석차 매겨 경쟁을 시킨다. 입시경쟁의 골자는 바로 그 석차경쟁이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는 전국의 학생들이 똑같은 것을 배우게 하는 제도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학의 본고사는 금했지만 수능이란 국가시험으로 성적을 내고 그것을 신입생 전형에 사용케 하는 제도를 고수했다. 또 학생부, 논술시험, 면접시험 등의 성적도 석차 산정에 반영케 했다. 전에는 시험 하나만으로 석차가 정해졌지만 이제는 경쟁 분야가 다채롭게 됐으니 설상가상이요 산 너머 산이다. 그런 정책들은 어느 모로 뜯어봐도 무시험진학을 실현하고 새 학교문화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2002년의 구호는 속임수였다고 할 수밖에.
입시경쟁이나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문제는 국민의 정부 이전부터 존재했다. 국가에서 학교와 대학의 정원과 등록금,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를 획일적으로 통제 관리한 박정희 시대 이후의 국가`-`사회관계, 국가`-`교육관계가 빚어낸 것이다. 그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역시 국가가 획일적 통제와 관리로 입시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문제가 악화되었다.
국민의 정부에 책임이 있다면 출범 당시 중요한 교육문제를 다룰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준비된 대통령’의 정부에는 교육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관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교육정책은 이전 정부에서 확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교육장관은 관리들한테 ‘배우면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한탄해 무엇하랴. 이제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입시문제가 국가에서 교육을 획일적으로 통제 관리하면서 학교와 대학의 자유로운 교육활동을 금한다는 국가`-`교육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먼저 그 관계를 고쳐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통제도 과감히 풀고 획일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강요하지도 말고, 학생은 몇 명, 등록금은 얼마를 받으라고 지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육활동이 자유롭고 다채롭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전국의 학생들이 외적 요건상의 일류대학에 몰리지도 않고, 전국의 학생들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시험을 치르게 해 전국적인 석차를 내기도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쉽지 않을 뿐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모색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2002년 대입을 앞두고 교육부가 수능을 어렵게 출제하겠다고 말한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수능이 쉬워 지원자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대학과 교수가 불평했고 자식의 입시경쟁 뒷바라지에 눈먼 부모들이 거기에 맞장구쳤기 때문이다. 어떤 서울대 교수는 쉬운 수능으로 학생을 뽑다 보니 일류인 서울대의 학생마저 학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했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론’도 비슷한 예다. 그런 불평이 여론화하니까 여론이 곧 표라고 생각한 정부에서 거기에 응한 것이다. 역시 문제의 해결보다 정략적 이득을 중시한 결정이다.
생각해 보라. 쉬운 수능 때문에 서울대생의 학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학력이 뛰어나지 못한 아이도 높은 점수를 얻고 서울대에 가게 된다는 뜻인데, 그것을 걱정하는 속뜻은 서울대가 일등 대학으로 남지 못한다는 우려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다. 대학간의 고정된 서열체계가 흔들려 입시경쟁의 초점이 흐려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능이 쉬워 지원자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불평은 어떤가. 수능을 쉽게 출제하는 목적은 지원자의 우열을 석차로 가리지 못하게 하다가 궁극적으로 수능을 없앰으로써 시험성적으로 석차 내고 학생 뽑는 제도를 근절하자는 것이다.
석차가 아니고는 학생을 뽑는 길이 없다는 말인가. 어차피 고등학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아이들인데 선착순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고 제비뽑기를 하면 어떤가. 좋은 교육을 위해 진정으로 애쓰는 대학이라면 관심사가 지원자의 석차가 아니라 자기 대학의 교육과정 특성에 합당한지 여부일 것이다. 또 그래야 입시문제가 풀린다.
석차경쟁의 입시제도는 거기서 득을 보거나 기생하는 자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러지 못하는 자와 그 아이들을 조직적으로 구박하고 희생시키는 장치다. 국민의 정부는 그전의 정부나 마찬가지로 그런 ‘기득권층’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전국적인 석차경쟁에서 이겨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상류사회에 편입되는 학생은 극소수다. 고교를 마치면 잘못된 입시정책 때문에 대량생산된 대학 가운데 하나에 갈 수는 있지만 ‘일류’가 아닌 대학에는 유감스럽게도 ‘학벌’ 프리미엄이 없다. 석차에 대한 숭배는 국민의 절대 다수를 평생 학대한다.
난마처럼 얽힌 교육문제의 해결은 정치인, 관리, 교수나 교사에게 떠맡길 일이 아니다. 교육의 희생자인 학생과 부모가 나서야 한다. 일단 석차 내기 위한 시험을 일절 거부하고 석차에 따라 아이들을 차별 대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전국적 석차경쟁을 불러오는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획일성을 깨야 한다. 정부는 고교와 대학을 시시콜콜 통제하는 악습을 버려야 하며, 대학은 ‘편한 장사’를 단념하고 교육자로서 철학을 가지고 좋은 교육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수능이니 논술이니 하는 입시제도를 없애고 대학간 서열체계도 무너뜨려야 한다. 신입생 뽑는 일은 대학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 일류대학을 더 일류로 만드는 정책에 반대하고 이류·삼류 대학도 일류로 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이 살고 나라가 산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교육정책은 입시를 없애거나 입시경쟁 없는 학교문화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다. 2002년이 눈앞에 닥치니 수능을 더 어렵게 해 입시를 강화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정부를 믿고 입시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며 지탄받는 ‘이해찬의 아이들’이나 그 부모가 불쌍할 뿐이다. 정부 당국에 속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는 속지 않고 입시의 고통도 없애려면 그 속임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국민의 정부의 무슨 정책을 놓고 이러는가. 요즘 BK21이라는 이름으로 추진중인 ‘연구 중심 대학’ ‘대학원 중심 대학’이라는 일본서 베껴 온 정책이 그 예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는 원인의 하나는 실속보다 외적 요건 때문에 생겨난 일류대학들이 전국의 진학 희망자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인데, 그 정책은 3대 일류대학에 2조원의 국비를 투입하여 세계 수준의 대학원 중심 대학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정책의 의심할 바 없는 메시지는 “이제 대학 나와도 소용없어, 대학원에 가야 해, 그것도 초일류 대학원 중심 대학에” 하는 것이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전국의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똑같은 교과서로 가르치게 하는 제도를 꼽을 수 있다. 모두 똑같은 것을 배우니 입시경쟁을 치르는 아이들은 그 ‘똑같은 것’을 다 안다. 한편 대학에는 학생 정원이 있으니 그 ‘똑같은 것’에 관해 시험 치르고 석차 매겨 정원 내에서 신입생을 받아들인다. 그러니 입시준비를 시키는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시험 치르게 하고 석차 매겨 경쟁을 시킨다. 입시경쟁의 골자는 바로 그 석차경쟁이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는 전국의 학생들이 똑같은 것을 배우게 하는 제도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학의 본고사는 금했지만 수능이란 국가시험으로 성적을 내고 그것을 신입생 전형에 사용케 하는 제도를 고수했다. 또 학생부, 논술시험, 면접시험 등의 성적도 석차 산정에 반영케 했다. 전에는 시험 하나만으로 석차가 정해졌지만 이제는 경쟁 분야가 다채롭게 됐으니 설상가상이요 산 너머 산이다. 그런 정책들은 어느 모로 뜯어봐도 무시험진학을 실현하고 새 학교문화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2002년의 구호는 속임수였다고 할 수밖에.
입시경쟁이나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문제는 국민의 정부 이전부터 존재했다. 국가에서 학교와 대학의 정원과 등록금,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를 획일적으로 통제 관리한 박정희 시대 이후의 국가`-`사회관계, 국가`-`교육관계가 빚어낸 것이다. 그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역시 국가가 획일적 통제와 관리로 입시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문제가 악화되었다.
국민의 정부에 책임이 있다면 출범 당시 중요한 교육문제를 다룰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준비된 대통령’의 정부에는 교육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관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교육정책은 이전 정부에서 확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교육장관은 관리들한테 ‘배우면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한탄해 무엇하랴. 이제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입시문제가 국가에서 교육을 획일적으로 통제 관리하면서 학교와 대학의 자유로운 교육활동을 금한다는 국가`-`교육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먼저 그 관계를 고쳐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통제도 과감히 풀고 획일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강요하지도 말고, 학생은 몇 명, 등록금은 얼마를 받으라고 지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육활동이 자유롭고 다채롭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전국의 학생들이 외적 요건상의 일류대학에 몰리지도 않고, 전국의 학생들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시험을 치르게 해 전국적인 석차를 내기도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쉽지 않을 뿐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모색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2002년 대입을 앞두고 교육부가 수능을 어렵게 출제하겠다고 말한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수능이 쉬워 지원자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대학과 교수가 불평했고 자식의 입시경쟁 뒷바라지에 눈먼 부모들이 거기에 맞장구쳤기 때문이다. 어떤 서울대 교수는 쉬운 수능으로 학생을 뽑다 보니 일류인 서울대의 학생마저 학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했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론’도 비슷한 예다. 그런 불평이 여론화하니까 여론이 곧 표라고 생각한 정부에서 거기에 응한 것이다. 역시 문제의 해결보다 정략적 이득을 중시한 결정이다.
생각해 보라. 쉬운 수능 때문에 서울대생의 학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학력이 뛰어나지 못한 아이도 높은 점수를 얻고 서울대에 가게 된다는 뜻인데, 그것을 걱정하는 속뜻은 서울대가 일등 대학으로 남지 못한다는 우려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다. 대학간의 고정된 서열체계가 흔들려 입시경쟁의 초점이 흐려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능이 쉬워 지원자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불평은 어떤가. 수능을 쉽게 출제하는 목적은 지원자의 우열을 석차로 가리지 못하게 하다가 궁극적으로 수능을 없앰으로써 시험성적으로 석차 내고 학생 뽑는 제도를 근절하자는 것이다.
석차가 아니고는 학생을 뽑는 길이 없다는 말인가. 어차피 고등학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아이들인데 선착순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고 제비뽑기를 하면 어떤가. 좋은 교육을 위해 진정으로 애쓰는 대학이라면 관심사가 지원자의 석차가 아니라 자기 대학의 교육과정 특성에 합당한지 여부일 것이다. 또 그래야 입시문제가 풀린다.
석차경쟁의 입시제도는 거기서 득을 보거나 기생하는 자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러지 못하는 자와 그 아이들을 조직적으로 구박하고 희생시키는 장치다. 국민의 정부는 그전의 정부나 마찬가지로 그런 ‘기득권층’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전국적인 석차경쟁에서 이겨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상류사회에 편입되는 학생은 극소수다. 고교를 마치면 잘못된 입시정책 때문에 대량생산된 대학 가운데 하나에 갈 수는 있지만 ‘일류’가 아닌 대학에는 유감스럽게도 ‘학벌’ 프리미엄이 없다. 석차에 대한 숭배는 국민의 절대 다수를 평생 학대한다.
난마처럼 얽힌 교육문제의 해결은 정치인, 관리, 교수나 교사에게 떠맡길 일이 아니다. 교육의 희생자인 학생과 부모가 나서야 한다. 일단 석차 내기 위한 시험을 일절 거부하고 석차에 따라 아이들을 차별 대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전국적 석차경쟁을 불러오는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획일성을 깨야 한다. 정부는 고교와 대학을 시시콜콜 통제하는 악습을 버려야 하며, 대학은 ‘편한 장사’를 단념하고 교육자로서 철학을 가지고 좋은 교육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수능이니 논술이니 하는 입시제도를 없애고 대학간 서열체계도 무너뜨려야 한다. 신입생 뽑는 일은 대학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 일류대학을 더 일류로 만드는 정책에 반대하고 이류·삼류 대학도 일류로 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이 살고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