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을 끝낸 아이들이 “토하고 싶다”고 한다. 2002 수능시험은 아이들에게 ‘폭력’으로 느껴진 것 같다. 평소 준비하지 않은 시험문제를 대하는 황당함과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원망들….
국민의 정부 교육정책 입안자와 교육 전문가들이 자라나는 10대들을 인도하려던 방향이 과연 이것이었을까? 2002년 대학입시에서 과연 중등교육을 정상화하고 사교육비를 절감하며 대학이 이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전형방법이 도입되었는가? 적어도 그 도입 취지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3 수험생의 학부모로서, 교육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육시민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본 지난 3년은 착잡하기만 했다.
1998년 10월 : 아주 새로운 대학입시
1998년 10월 교육부가 ‘무시험전형’이라는 이름을 붙여 2002년 대학입시안을 발표했다. 특히 논란 끝에 고교간 학력차를 인정하는 고교 등급제는 금지되었다. 언론에서는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의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고 야단이다. 아니나다를까,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내신에서 불리한 특수목적고와 지역 명문고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분당, 일산 등 신도시는 고교입시 경쟁이 치열해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매달리는 ‘교육재해지구’였는데 새 입시제도로 ‘고교평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함께 교육문제를 걱정하던 학부모들도 각자의 교육적 판단에 따라 자녀의 진로를 결정했다. 한 아이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학교로, 한 아이는 일반고로, 한 아이는 특수목적고로 진학했다. 글쎄, 3년 후 이 세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는 2002년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궁금하다.
1999년 2월 : 교육개혁 토론회
2월24일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가 ‘김대중 정부 교육정책 1년을 평가한다’는 내용의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이런 발언을 했다.
“2002 대입을 포함해 교육개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주어야 한다. 2002년 무시험전형이라는 용어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정부는 서둘러 정확한 용어를 선택해야 하고 학부모들이 믿을 수 있게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교육정책 당국은 학교 울타리 밖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2002년 대입을 치를 아이들이 며칠 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보충수업을 폐지하고 낮에 귀가하는 아이들을 위해 정부는 어떤 대안을 마련했는지 지금쯤은 공개하는 것이 순서다. 현재 오후 3~4시에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만화방과 PC방, 오락실이다. 몇 달 후 언론은 여론을 빙자해 이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고 여론 때문에 보충수업은 부활할 수도 있다. 교육을 위해 강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폐지했지만 다시 교육을 위해 부활해야 하는 경우에 대비해 정부는 서둘러 학생과 학부모가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1학기 수시전형에 대해 교사와 학부모의 거부감이 강했다. 5월21일 교육인적자원부 학교정책실에서 수시입학 합격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대학 입학처장 3명 등 10여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이미 1학기 수시모집 전형이 시작된 마당에 합격자 대책을 하고 있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6월까지 한 달여의 수시전형을 거쳐 합격자 발표가 나고 일단 그 대학에 등록하면 다른 학교에 응시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는 공부하는 다른 고3들에게 방해되니 학교를 안 나와 주었으면 하는 분위기고 대학에서는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으니 고등학교에서 알아서 지도해 달라는 입장이다. 교육청도 역할을 미루기는 마찬가지다.
조기졸업이 없는 상황에서 6월 말부터 졸업하는 이듬해 2월 말까지 약 8개월간 이들은 오히려 학교의 짐이다. 어떤 아이는 학교에서 온종일 잠만 자다가 토플 만점으로 수시에 합격한 후 운전면허시험 공부하느라 낮잠을 멈추었다고 했다. 입시가 아니면 학생들을 잡아놓을 구실이 없는 ‘학교’라는 현실에 가슴은 아프지만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회의에서 만난 서강대 강재효 입학처장은 “대학들은 정시모집한 학생들보다 특차합격생을 선호한다. 대학 미등록자가 생겨 막바지에 전해받고 떼밀려 입학한 학생들이 아닌 당초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남아 있는 특차입학생들이 학업성취도가 높고 학교에 대해 긍정적이기 때문이다”는 말을 들었다.
2001년 6월 : 너무 늦게 발표한 서울대 입시안
6월18일 서울대 입시안의 윤곽이 정해져 호암관에서 소모임이 있었다. 일반고, 예고, 특목고 입시담당 교사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입시 수개월 전에야 비로소 서울대 입시안이 나온 것은 실망스러웠다. 입시 준비기간이 너무 짧다 보면 급한 대로 수험생들은 사교육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서울대 유영제 입학처장은 2002 입시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과거에 대외적으로 교육부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으므로 새롭게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나는 서울대가 좀더 다양한 제도`-`소외계층과 지역을 고루 배려하는 입시안-를 발표할 줄 알았다. 그러나 늦게 발표된 서울대 입시안은 고깃국을 끓여 식힌 후 표면의 굳기름만 걷어내듯 성적우수자를 뽑아내는 것이다 . 교사들은 “입시 후 평가해 보면 대학측에서 똑똑한 아이들을 잘도 골라간다”고 했다. 그러나 공교육의 힘만으로 그 ‘똑똑’이 가능하냐에 학부모들의 고민이 있다.
수능시험을 보름 앞두고 올 들어 처음으로 고3 아이 반모임에 갔다. 몇 번이나 모임통보를 받았지만 다른 일이 겹치는 바람에 첫 참석이 되었다. 임원 엄마들이 이번 학기에 얼마간 돈을 걷어 밤까지 이어지는 자율학습 시간에 아이들에게 매일 우유를 급식하고 일주일에 한두 차례 간식을 해주었다. 학교 급식이 입에 안 맞아 도시락을 싸가지만 새벽에 나가 밤 11시에 귀가하느라 집에서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아이의 키가 큰 것은 순전히 그 엄마들 덕분인 것 같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여학생 엄마들은 수능시험 날이 딸의 생리기간과 겹친다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을 나눴다. 수능에서 한두 문제만 틀려도 지원하는 대학이 달라지는 현실에서 여학생 학부모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과연 수능은 1회만 봐야 하는가? 문제은행 방식은 도입할 수 없는가? 모임이 끝날 무렵 연세대 수시에 합격했고 서울대 수시발표를 기다리고 있다는 한 학부모의 제안으로 사설학원 입시설명회에 몰려갔다. 학부모들은 아직도 2002 입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입시설명회를 주최한 학원은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작은 학원이었는데 좁은 방에 50여명씩 학부모가 가득 차 있고, 원장이 다른 방에서 TV 모니터를 통해 일류대 중심의 대입제도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올해 수능시험 출제자 중 일부 명단은 입수되었기 때문에 올 수능의 경향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곁들여 수능시험 마무리 요령, 수능 이후 대입 심층면접과 논술에 대해 설명했다. 결론은 “댁의 아이가 똑똑한 것은 알지만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라”였다.
우리 아이는 공부를 ‘학교’에서만 했다. 팬터지 소설과 PC오락실을 벗삼고, 교육운동단체에서 얻어들은 편린 덕분인지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이나 독서실도 거부했다. 그러다 지난 겨울 고3에 들어서면서 사회탐구, 과학탐구 학원을 두 달 동안 다녔다. 3학년 초 총회날 인상이 좋은 담임선생님은 반 전체 부모들에게 “현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원을 하루빨리 정리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뜻을 아이에게 전했지만 과목 수를 줄였을 뿐 언어와 수리과목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반 년 이상 다녔다. 추석 때도 “웃어른께 용돈을 받는 대목인데 포기한다”며 아이는 학원에 가서 밤 늦게 돌아왔다. 결국 수능 한 달 전 간신히 아이를 설득해 학원을 중지시켰다. 아이는 “친구들 중 사탐, 과탐을 새벽 1시에 시작해 새벽 5시경 끝낸 후 강사가 사주는 해장국 먹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한때 2002 대입은 ‘무시험전형’이라고 했고,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잘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자식을 둔 학부모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변화된 입시 속에서도 전 과목을 골고루 잘해 내신성적 석차 백분율도 좋아야 한다. 수학능력시험은 자격고사 수준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입시 반영률이 높아 여전히 학력 위주의 입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수능시험이 쉬우면 쉬운 대로 만점을 받기 위해서, 수능시험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교육에 의존한다. 학생들은 일류강사를 ‘최근 정보가 모두 입력된 새 지도’라고 하고 수준 낮은 강사를 ‘오래된 낡은 지도’에 비유하는데,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대입을 위해 새 지도와 지름길을 원하고 있었다.
올해 초 2002 수능의 난이도가 어려워진다고 하자 수험생들은 몹시 긴장했다. 더구나 입시학원마다 수능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을 지나치게 어렵게 내 아이들은 상당히 당황했다. 사설학원이 교사들을 제치고 입시전문가연 행세하는 세상이다. 교사들은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이 실시하는 학업성취도검사 등도 영역별 석차백분율 등을 자세히 알려줘 사설학원의 장판지(수능점수에 따른 예상 합격학과를 적어놓은 일람표)를 능가하는 입시정보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다. 사교육기관과 언론 등에서 여러 차례 제기한 재수생과 재학생의 학력 차가 실재하는지 묻고 싶다.
3년간 입시제도의 변화를 보면 교육철학도 없고 수험생보다 대학, 정부, 고교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채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어떤 인재를 키울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의 수준도 빈약하고 논의의 양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의 지적 능력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적 능력 외에 체력, 결단력, 끈기, 대인관계 능력 등 삶을 살아가는 데 기초적이고 중요한 능력은 부족한 편이다. 학부모들은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의 주류 가치관에 맞서 인성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지만 그 바람은 ‘입시공부’를 핑계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어느 해나 대입 수험생들의 모습은 비슷하겠지만 ‘학력 저하’ 의혹을 받고 있는 지금 고3 학생들 역시 수능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고3 아이들은 수능 사탐과 과탐을 준비하다 어느덧 ‘퀴즈의 달인’이 되었다. 수능 고득점자를 골라 뽑은 대학들은 어려운 관문을 통해 입학한 신입생들의 학력에 불만이 많다. 그러나 아이들이 고3 내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외고 익힌 그 많은 지식과 학력이 대학이 원한 게 아니라면 누가 시키고 누가 원하는 것인가? 그런데도 대학 쪽에서는 여전히 신입생들의 학력만을 문제삼고 있고, 정부는 팔짱 낀 채 바라만 본다.
2001년 11월 8일 : 수능 다음날 … 이 난리 치려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 모두 혼비백산이다. 어차피 상대적인 점수결과가 나오면 자신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아가겠지만 수능문제 하나 어려워졌다고 이토록 사회적 파장이 큰 것은 집단적 배신감과 후회 때문이다. 어려운 수능시험에 대해 미리 준비할 수 있었는데도 그 공부가 필요하지 않은 줄 알고 준비하지 못한 집단적 후회, 단군 이래 최저 학력 세대라는 사회적 따돌림, 공부를 안 해도 대학 갈 수 있다던 말을 쉽게 내뱉은 정책당국에 대한 원망, 잘못된 믿음….
이번 2002 수능을 통해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과 사회로부터 마음을 닫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이와 부모들을 울게 만든다. 만약 상위권 학생들의 변별력을 위해, 대학들의 고교등급제 요구, 본고사 부활 요구를 막기 위해 난이도 높은 시험이 필요했다면 미리 공론화했어야 한다. 솔직히 이번 수능 문제가 고교과정만 충실하면 다 풀 수 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언론에서는 얼마 전까지 수능은 자격고사 수준이라고 하더니 또 얼마 전에는 심층면접이 중요하다고 했다. 요즘은 수능 점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 판을 제대로 꿰뚫어 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수능 난이도의 널뛰기는 발빠른 사교육시장을 수능 전문기관으로 키워낼 것이다. 충격적인 점수 하락은 학생과 학부모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 여파로 사교육기관을 찾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수능. 그에 따른 사회적 소모가 너무 크다.
국민의 정부 교육정책 입안자와 교육 전문가들이 자라나는 10대들을 인도하려던 방향이 과연 이것이었을까? 2002년 대학입시에서 과연 중등교육을 정상화하고 사교육비를 절감하며 대학이 이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전형방법이 도입되었는가? 적어도 그 도입 취지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3 수험생의 학부모로서, 교육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육시민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본 지난 3년은 착잡하기만 했다.
1998년 10월 : 아주 새로운 대학입시
1998년 10월 교육부가 ‘무시험전형’이라는 이름을 붙여 2002년 대학입시안을 발표했다. 특히 논란 끝에 고교간 학력차를 인정하는 고교 등급제는 금지되었다. 언론에서는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의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고 야단이다. 아니나다를까,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내신에서 불리한 특수목적고와 지역 명문고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분당, 일산 등 신도시는 고교입시 경쟁이 치열해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매달리는 ‘교육재해지구’였는데 새 입시제도로 ‘고교평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함께 교육문제를 걱정하던 학부모들도 각자의 교육적 판단에 따라 자녀의 진로를 결정했다. 한 아이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학교로, 한 아이는 일반고로, 한 아이는 특수목적고로 진학했다. 글쎄, 3년 후 이 세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는 2002년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궁금하다.
1999년 2월 : 교육개혁 토론회
2월24일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가 ‘김대중 정부 교육정책 1년을 평가한다’는 내용의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이런 발언을 했다.
“2002 대입을 포함해 교육개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주어야 한다. 2002년 무시험전형이라는 용어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정부는 서둘러 정확한 용어를 선택해야 하고 학부모들이 믿을 수 있게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교육정책 당국은 학교 울타리 밖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2002년 대입을 치를 아이들이 며칠 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보충수업을 폐지하고 낮에 귀가하는 아이들을 위해 정부는 어떤 대안을 마련했는지 지금쯤은 공개하는 것이 순서다. 현재 오후 3~4시에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만화방과 PC방, 오락실이다. 몇 달 후 언론은 여론을 빙자해 이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고 여론 때문에 보충수업은 부활할 수도 있다. 교육을 위해 강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폐지했지만 다시 교육을 위해 부활해야 하는 경우에 대비해 정부는 서둘러 학생과 학부모가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1학기 수시전형에 대해 교사와 학부모의 거부감이 강했다. 5월21일 교육인적자원부 학교정책실에서 수시입학 합격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대학 입학처장 3명 등 10여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이미 1학기 수시모집 전형이 시작된 마당에 합격자 대책을 하고 있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6월까지 한 달여의 수시전형을 거쳐 합격자 발표가 나고 일단 그 대학에 등록하면 다른 학교에 응시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는 공부하는 다른 고3들에게 방해되니 학교를 안 나와 주었으면 하는 분위기고 대학에서는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으니 고등학교에서 알아서 지도해 달라는 입장이다. 교육청도 역할을 미루기는 마찬가지다.
조기졸업이 없는 상황에서 6월 말부터 졸업하는 이듬해 2월 말까지 약 8개월간 이들은 오히려 학교의 짐이다. 어떤 아이는 학교에서 온종일 잠만 자다가 토플 만점으로 수시에 합격한 후 운전면허시험 공부하느라 낮잠을 멈추었다고 했다. 입시가 아니면 학생들을 잡아놓을 구실이 없는 ‘학교’라는 현실에 가슴은 아프지만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회의에서 만난 서강대 강재효 입학처장은 “대학들은 정시모집한 학생들보다 특차합격생을 선호한다. 대학 미등록자가 생겨 막바지에 전해받고 떼밀려 입학한 학생들이 아닌 당초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남아 있는 특차입학생들이 학업성취도가 높고 학교에 대해 긍정적이기 때문이다”는 말을 들었다.
2001년 6월 : 너무 늦게 발표한 서울대 입시안
6월18일 서울대 입시안의 윤곽이 정해져 호암관에서 소모임이 있었다. 일반고, 예고, 특목고 입시담당 교사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입시 수개월 전에야 비로소 서울대 입시안이 나온 것은 실망스러웠다. 입시 준비기간이 너무 짧다 보면 급한 대로 수험생들은 사교육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서울대 유영제 입학처장은 2002 입시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과거에 대외적으로 교육부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으므로 새롭게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나는 서울대가 좀더 다양한 제도`-`소외계층과 지역을 고루 배려하는 입시안-를 발표할 줄 알았다. 그러나 늦게 발표된 서울대 입시안은 고깃국을 끓여 식힌 후 표면의 굳기름만 걷어내듯 성적우수자를 뽑아내는 것이다 . 교사들은 “입시 후 평가해 보면 대학측에서 똑똑한 아이들을 잘도 골라간다”고 했다. 그러나 공교육의 힘만으로 그 ‘똑똑’이 가능하냐에 학부모들의 고민이 있다.
수능시험을 보름 앞두고 올 들어 처음으로 고3 아이 반모임에 갔다. 몇 번이나 모임통보를 받았지만 다른 일이 겹치는 바람에 첫 참석이 되었다. 임원 엄마들이 이번 학기에 얼마간 돈을 걷어 밤까지 이어지는 자율학습 시간에 아이들에게 매일 우유를 급식하고 일주일에 한두 차례 간식을 해주었다. 학교 급식이 입에 안 맞아 도시락을 싸가지만 새벽에 나가 밤 11시에 귀가하느라 집에서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아이의 키가 큰 것은 순전히 그 엄마들 덕분인 것 같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여학생 엄마들은 수능시험 날이 딸의 생리기간과 겹친다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을 나눴다. 수능에서 한두 문제만 틀려도 지원하는 대학이 달라지는 현실에서 여학생 학부모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과연 수능은 1회만 봐야 하는가? 문제은행 방식은 도입할 수 없는가? 모임이 끝날 무렵 연세대 수시에 합격했고 서울대 수시발표를 기다리고 있다는 한 학부모의 제안으로 사설학원 입시설명회에 몰려갔다. 학부모들은 아직도 2002 입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입시설명회를 주최한 학원은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작은 학원이었는데 좁은 방에 50여명씩 학부모가 가득 차 있고, 원장이 다른 방에서 TV 모니터를 통해 일류대 중심의 대입제도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올해 수능시험 출제자 중 일부 명단은 입수되었기 때문에 올 수능의 경향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곁들여 수능시험 마무리 요령, 수능 이후 대입 심층면접과 논술에 대해 설명했다. 결론은 “댁의 아이가 똑똑한 것은 알지만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라”였다.
우리 아이는 공부를 ‘학교’에서만 했다. 팬터지 소설과 PC오락실을 벗삼고, 교육운동단체에서 얻어들은 편린 덕분인지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이나 독서실도 거부했다. 그러다 지난 겨울 고3에 들어서면서 사회탐구, 과학탐구 학원을 두 달 동안 다녔다. 3학년 초 총회날 인상이 좋은 담임선생님은 반 전체 부모들에게 “현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원을 하루빨리 정리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뜻을 아이에게 전했지만 과목 수를 줄였을 뿐 언어와 수리과목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반 년 이상 다녔다. 추석 때도 “웃어른께 용돈을 받는 대목인데 포기한다”며 아이는 학원에 가서 밤 늦게 돌아왔다. 결국 수능 한 달 전 간신히 아이를 설득해 학원을 중지시켰다. 아이는 “친구들 중 사탐, 과탐을 새벽 1시에 시작해 새벽 5시경 끝낸 후 강사가 사주는 해장국 먹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한때 2002 대입은 ‘무시험전형’이라고 했고,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잘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자식을 둔 학부모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변화된 입시 속에서도 전 과목을 골고루 잘해 내신성적 석차 백분율도 좋아야 한다. 수학능력시험은 자격고사 수준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입시 반영률이 높아 여전히 학력 위주의 입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수능시험이 쉬우면 쉬운 대로 만점을 받기 위해서, 수능시험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교육에 의존한다. 학생들은 일류강사를 ‘최근 정보가 모두 입력된 새 지도’라고 하고 수준 낮은 강사를 ‘오래된 낡은 지도’에 비유하는데,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대입을 위해 새 지도와 지름길을 원하고 있었다.
올해 초 2002 수능의 난이도가 어려워진다고 하자 수험생들은 몹시 긴장했다. 더구나 입시학원마다 수능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을 지나치게 어렵게 내 아이들은 상당히 당황했다. 사설학원이 교사들을 제치고 입시전문가연 행세하는 세상이다. 교사들은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이 실시하는 학업성취도검사 등도 영역별 석차백분율 등을 자세히 알려줘 사설학원의 장판지(수능점수에 따른 예상 합격학과를 적어놓은 일람표)를 능가하는 입시정보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다. 사교육기관과 언론 등에서 여러 차례 제기한 재수생과 재학생의 학력 차가 실재하는지 묻고 싶다.
3년간 입시제도의 변화를 보면 교육철학도 없고 수험생보다 대학, 정부, 고교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채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어떤 인재를 키울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의 수준도 빈약하고 논의의 양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의 지적 능력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적 능력 외에 체력, 결단력, 끈기, 대인관계 능력 등 삶을 살아가는 데 기초적이고 중요한 능력은 부족한 편이다. 학부모들은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의 주류 가치관에 맞서 인성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지만 그 바람은 ‘입시공부’를 핑계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어느 해나 대입 수험생들의 모습은 비슷하겠지만 ‘학력 저하’ 의혹을 받고 있는 지금 고3 학생들 역시 수능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고3 아이들은 수능 사탐과 과탐을 준비하다 어느덧 ‘퀴즈의 달인’이 되었다. 수능 고득점자를 골라 뽑은 대학들은 어려운 관문을 통해 입학한 신입생들의 학력에 불만이 많다. 그러나 아이들이 고3 내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외고 익힌 그 많은 지식과 학력이 대학이 원한 게 아니라면 누가 시키고 누가 원하는 것인가? 그런데도 대학 쪽에서는 여전히 신입생들의 학력만을 문제삼고 있고, 정부는 팔짱 낀 채 바라만 본다.
2001년 11월 8일 : 수능 다음날 … 이 난리 치려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 모두 혼비백산이다. 어차피 상대적인 점수결과가 나오면 자신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아가겠지만 수능문제 하나 어려워졌다고 이토록 사회적 파장이 큰 것은 집단적 배신감과 후회 때문이다. 어려운 수능시험에 대해 미리 준비할 수 있었는데도 그 공부가 필요하지 않은 줄 알고 준비하지 못한 집단적 후회, 단군 이래 최저 학력 세대라는 사회적 따돌림, 공부를 안 해도 대학 갈 수 있다던 말을 쉽게 내뱉은 정책당국에 대한 원망, 잘못된 믿음….
이번 2002 수능을 통해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과 사회로부터 마음을 닫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이와 부모들을 울게 만든다. 만약 상위권 학생들의 변별력을 위해, 대학들의 고교등급제 요구, 본고사 부활 요구를 막기 위해 난이도 높은 시험이 필요했다면 미리 공론화했어야 한다. 솔직히 이번 수능 문제가 고교과정만 충실하면 다 풀 수 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언론에서는 얼마 전까지 수능은 자격고사 수준이라고 하더니 또 얼마 전에는 심층면접이 중요하다고 했다. 요즘은 수능 점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 판을 제대로 꿰뚫어 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수능 난이도의 널뛰기는 발빠른 사교육시장을 수능 전문기관으로 키워낼 것이다. 충격적인 점수 하락은 학생과 학부모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 여파로 사교육기관을 찾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수능. 그에 따른 사회적 소모가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