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곰사업’이 파행을 겪고 있다. 불곰사업은 한국 정부가 지난 1991년 당시 소련(현 러시아) 정부에 제공한 경협차관의 원리금·이자 상환액 일부를 현물(방산물자)로 들여오는 러시아제 무기도입 사업의 암호명이다. 그런 점에서 불곰사업의 파행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1차 사업(95∼98년)에 이어 내년부터 2차 사업이 집행되는 불곰사업의 시작과 끝을 들여다본다.
불곰사업의 뿌리는‘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정부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한 노태우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소련과의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치인들이 보인 저자세 외교와 정부가 보인 협상전략 부재는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특히 한국 정부는 불확실성의 협상전술을 내세운 소련에 대해 ‘이면보상 전략’으로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면서도 상환조건을 명시하지 않는 등 경제적 실리를 희생함으로써 ‘달러와 수교를 교환한 매수외교’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91년 당시 한-소 정부간 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가 소련에 제공하기로 한 경협차관 총액은 무려 30억 달러.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91년 5월부터 12월까지 산업은행이 주관한 현금차관 10억 달러와 수출입은행 소비재 차관 4억7000만 달러 등 총 14억7000만 달러를 제공했으나 91년 말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잔여분에 대해 지급을 중단했다. 현금차관 10억 달러는 정부 보증하에 주관은행인 산업은행(1억5000만 달러)과 외환·조흥·한일·상업·서울·제일·장기신용은행(이상 각 1억1000만 달러씩) 그리고 신한·한미은행(이상 각 4000만 달러씩)이 제공했다. 현금 및 소비재 차관의 상환조건은 각각 ‘3년 거치 5년 균등분할’ 및 ‘2년 거치 전액’ 상환.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이 끝내 와해됨으로써 수교 대가인 대소 경협차관은 노태우 정부를 승계한 김영삼 정부의 큰 부담으로 남게 됐다.
다행히 92년 연방 해체 후 구소련의 채무를 승계한 러시아 정부가 이미 제공된 차관의 상환책임을 보증함으로써 한-러 상환협상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93년 처음 만기가 도래한 채권에 대한 상환실적이 95년 6월 당시 현금 1910만 달러와 알루미늄 1270만 달러어치일 만큼 극히 저조했다. 만성적인 경화 부족 상태인 러시아 정부는 국제 현물시장에서 현금화가 쉬운 원자재 상환을 기피하는 대신 자국 내 실업문제 완화를 위해서도 헬기, 방산물자 등의 공산품 상환을 원했다. 한-러 정부는 95년 7월 당시 홍재형-다비도프 부총리간에 현금상환을 대신할 현물상환 협정을 처음 체결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일단 93년 만기 도래분(원금과 연체이자를 합쳐 4억5000만 달러)부터 원자재, 헬기, 방산물자 등으로 95년부터 98년까지 연차적으로 상환하기로 했는데 이 가운데 방산물자 도입사업이 바로 ‘불곰사업’이다.
이처럼 불곰사업은 여타의 해외무기 도입사업과 달리 처음부터 군의 소요(所要)가 아닌 정치·외교적 논리에 의해 군에 ‘할당’된 성격이 강했다. 이렇다 보니 규모 있는 전력 확보사업이 되지 못했다. 이는 95년 7월 경협차관 상환협정 체결 이후 첫 국정감사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은 95년 9월25일 당시 국방부·합참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정호용 의원과 이양호 국방장관이 불곰사업에 대해 나눈 질의·응답 내용이다.
“러시아로부터 T-86 전차하고 또 BMP-3 경전차, 휴대용 대공미사일, 대전차 유도탄 등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품목은 국방부에서 요구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쪽에서 주겠다는 것입니까?”
“원래 정부에서는 원자재로 (상환)요구를 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알루미늄 등 이런 것을 요구했는데, 제일 좋은 것은 현금상환이겠지만 현금은 안 되고, 두 번째가 원자재인데 원자재도 다 줄 수 없으니까 일부를 방산물자로 변제해 줄 것을 러시아측에서 요청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채권자(한국)가 아닌 채무자(러시아)가 다른 방법으로는 못 갚겠다고 해 도리 없이 방산물자 도입, 즉 불곰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의원들이 걱정한 대로 불곰사업으로 들여온 러시아 무기는 교육훈련용 또는 연구용으로는 양이 너무 많고 전력화용으로는 너무 적은 데다 향후 군수지원 문제나 운용 문제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여건이 안 되어 복잡한 문제만 야기할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한국군 무기체계가 미제 일변도여서 미국의 견제가 예상되는 데다 괜히 무기체계의 혼선만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실 군에서도 어차피 러시아제 무기를 전력화 대상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량 다품종’ 도입을 계획했었다. 장영달 의원(국방위·민주당) 보좌관은 “당초 군이 1차 불곰사업 대상으로 선정한 러시아 무기 쇼핑 리스트는 54개 품목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판다’는 러시아의 배짱에 밀려 T-80U 전차와 BMP-3 장갑차, 그리고 Metis-M 대전차 미사일과 IGLA 휴대용 대공미사일 등 4개 품목을 들여오는 것으로 대폭 축소되었다”고 말했다.
실제 러시아 경협차관의 무기 상환을 둘러싸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적’이 아니라 ‘우방’인 미국이었다. 합참의 한 관계자는 그 배경으로 “미국으로서는 최대 고객인 한국이 값싸고 괜찮은 러시아 무기에 입맛을 들일 경우 자국의 무기시장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한-미 연합작전의 상호운용성과 피아 식별의 중요성을 내세워 러시아제 무기를 전력화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당시 여당 국방위원들은 불곰사업의 목표와 관련해 미국의 비위를 거슬리는 ‘쓸모없는 무기’보다는 무형의 첨단 방산기술을 습득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또 정부 일각에서는 러시아측이 원자재 상환을 기피함에 따라 95∼96년 철강재 상환분(9000만 달러)을 대신해 중장기 핵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옐로 케이크’라고 부르는 농축우라늄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야당 국방위원들은 미국 무기체계의 종속을 견제하는 차원에서라도 러시아 무기의 전력화를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당시는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구매압력이 드세 일부 의원들은 국방부에 경협차관 상환의 일환으로 러시아제 S300PMU 지대공 미사일의 도입을 검토하라고 요청했다.
무기구매 창구의 다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외 구매무기의 미국 의존도는 80% 수준. 따라서 불곰사업은 외자 구매선 다변화의 한 방안으로 추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방 당국의 의지 부족으로 미국의 무기 구매압력에 대한 지렛대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실패했다.
국방부가 러시아에 해외 군수무관을 처음 파견한 것이 97년 9월로 이는 불곰사업을 앞두고 러시아제 무기 정보와 가격동향 등에 관한 준비가 전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당시 해외 군수무관은 17명으로 이중 미국에 13명,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4개국에 각 1명씩 파견되어 있었다). 또 한국군 미사일방어체계 구축사업인 SAM-X와 관련해 시험평가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패트리어트 미사일 구매 압력을 가하고 러시아가 이에 반발하자 국방부는 이를 무기한 연기했다. 이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의지가 없었던 셈이다.
국방부는 그동안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 보유의 첨단 무기체계 및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북한 무기체계를 간접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장차 북한이 보유할 가능성이 큰 무기체계에 대한 성능연구 및 대응 전술개발과 유사시 전력화를 고려하여, 최소 단위로 구매가 가능한 T-80U 전차와 BMP-3 경전차 그리고 소량의 휴대용 대전차 유도탄 및 휴대용 대공미사일 등을 도입대상 장비로 선정했다”(97년 10월 김동진 국방장관의 국정감사 답변)는 것. 그러나 불곰사업과는 별도로 추진된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 도입사업인 ‘636사업’이 해군의 반대로 무산되고, 2차 불곰사업의 무기 선정에 무기중개상이 끼어든 과정을 보면 이 ‘임자 없는 사업’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고 파행을 거듭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정부는 98년 8월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계기로 경협차관 상환일정이 더 늦어지자 해군이 추진중인 차기잠수함(KSS-2) 사업(6척)의 일환으로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3척) 도입을 추진했다. 이른바 ‘636사업’이 그것이다. 이 또한 휴대용 유도탄으로 찔끔찔끔 받아서는 좀처럼 상환액이 줄어들지 않아 경협차관을 한몫에 상계하려는 한국 정부와 고사 직전의 방산업체를 가동시켜 실업난을 해소하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군 실사단의 보고를 토대로 한 해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지난해 10월2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는 ‘636사업’을 중단하고 러시아 방산물자 추가 도입방침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10월17일 국방부는 정책회의에서 러시아 방산물자 도입을 위한 2차 불곰사업 추진을 공식 결정했다.
이후 한-러 정부는 2000년 11월 군사기술·방산·군수 공동위원회를 개최한 데 이어 지난 10월까지 도입무기 선정 및 상환비율 등을 둘러싼 네 차례의 실무협의를 진행했다. 국방부가 국회에 보고한 그동안의 협의결과에 따르면, 한-러 정부가 잠정 합의한 2차 불곰사업 품목은 △BMP-3 경전차 37대 △T-80U 전차 2대(수리 부속용) △Metis-M 156기 △생도 실습기 23대 △공기부양정 2척 △대형 수송기 3대 등으로 총 5억3000만 달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부가 ‘636사업’의 중단을 최종 결정하기 직전인 지난해 9월 무기 중개업체 I사가 러시아 무기수출 회사인 로스보오루졔니예(현 러시아 국영 무기수출 회사인 로스오보론엑스포르트의 전신)사와 수송기 등 6개 품목에 대해 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정보 유출 의혹이 제기되었다.
문제는 I사라는 무기 중개업체가 지난 6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문일섭 전 국방부 차관에게 뇌물을 제공한 서충일씨가 ‘고문’으로 재직한 회사라는 점이다. 문 전 차관은 예비역 소장 출신으로 육사 동기인 서충일씨로부터 98년 12월과 99년 4월 각각 1000만원씩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지난 9월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뇌물을 대가로 문 전 차관이 사전 유출한 불곰사업 정보를 토대로 I사가 러시아 무기수출 회사와 판매권을 ‘싹쓸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6일 국회 국방위의 국방부 예산안 심의에서도 일부 의원들은 불곰사업과 관련해 문일섭 전 차관의 특정업체 비호 의혹을 집중 추궁했다. 특히 정재문 의원(한나라당)은 “그동안 러시아와는 전혀 연고가 없던 I사가 지난해 10월2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2차 불곰사업이 결정되기 직전인 9월7일 러시아 국영무기수출 회사인 로스보오루졔니예와 전격적으로 대리점권을 체결했다”며 문일섭 전 차관의 I사 비호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
최소 단위로 구매가 가능한 소량의 휴대용 대전차 유도탄 및 휴대용 대공미사일 등을 도입대상 장비로 선정했다는 1차 불곰사업 때의 기준이 2차 불곰사업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것도 의혹 대상이다. 특히 국방부는 올 7월 Metis-M 사업의 미사일 구입량을 1만2000발로 늘려 업계를 놀라게 했다. 업계에서는 유효기간이 10년인 미사일을 한꺼번에 1만2000발 구입하는 것은 특정업체를 봐주기 위한 막대한 국고낭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636사업의 대체안으로 불곰사업을 계획할 때 I사의 Metis-M은 91기(8600만 달러), L사의 제독헬기는 18대(1억1900만 달러)로 제안됐다. 그러나 올 1월, 2차 한-러 실무협의를 앞두고 제독헬기는 6대(5000만 달러)로 축소되는 대신, Metis-M은 156기(1억78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갑자기 군 내부에서 제독헬기를 제외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소요를 6대로 삭감한 것이다. 이어 올 7월에는 제독헬기의 구입을 아예 백지화하는 대신, Metis-M의 미사일 구입량을 1만2000발로 늘려 Metis-M 구입사업은 2억7100만 달러로 급증하게 됐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I사 이모 사장은 “서충일 장군은 사병 시절 중대장으로 모셨던 관계로 형님처럼 가깝게 모신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의 ‘고문’직을 가진 적은 없다”면서 “문 전 차관과 서장군과의 관계도 뇌물과 정보를 주고받는 그런 사이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사장은 “우리 회사가 처음 잠수함 도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2차 불곰사업이 시행되리라는 것을 예측한 것이지 특정인으로부터 정보를 빼내 에이전트십을 따낸 것은 아니다”면서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한편 국방부 관계자도 “제독헬기 사업이 백지화하면서 I사가 Metis-M 계약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면서 “제독헬기 사업은 최초 러시아의 카모프-32 헬기를 검토했으나 성능 검토 결과 우리 군이 보유한 헬기로 대체 가능하다고 판단, 별도 구매가 불필요한 것으로 결정되어 정상적인 소요검토 절차에 의거해 삭제되었다”고 밝혔다. 또 Metis-M의 경우도 국방부는 현재까지 세부 구매계획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며, I사가 판매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국방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연내 열리게 될 제5차 실무협의에서 한-러 정부간 MOU를 공식 체결할 때까지는 불곰사업을 둘러싼 의혹이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또 당초 2대 8로 예상했던 현금 및 현물상환 구매비율이 러시아측 주장대로 5대 5로 결정날 것으로 보여 그에 따른 비판도 예상된다. 즉 러시아에 준 빚 대신 무기 100원어치를 들여오는데 50원은 현물로 주지만 50원은 현금을 주고 사가라는 것. 요컨대 한국에 제공할 무기를 생산할 공장을 돌리려면 그만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뭐 주고 뺨 맞는다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
불곰사업의 뿌리는‘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정부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한 노태우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소련과의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치인들이 보인 저자세 외교와 정부가 보인 협상전략 부재는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특히 한국 정부는 불확실성의 협상전술을 내세운 소련에 대해 ‘이면보상 전략’으로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면서도 상환조건을 명시하지 않는 등 경제적 실리를 희생함으로써 ‘달러와 수교를 교환한 매수외교’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91년 당시 한-소 정부간 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가 소련에 제공하기로 한 경협차관 총액은 무려 30억 달러.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91년 5월부터 12월까지 산업은행이 주관한 현금차관 10억 달러와 수출입은행 소비재 차관 4억7000만 달러 등 총 14억7000만 달러를 제공했으나 91년 말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잔여분에 대해 지급을 중단했다. 현금차관 10억 달러는 정부 보증하에 주관은행인 산업은행(1억5000만 달러)과 외환·조흥·한일·상업·서울·제일·장기신용은행(이상 각 1억1000만 달러씩) 그리고 신한·한미은행(이상 각 4000만 달러씩)이 제공했다. 현금 및 소비재 차관의 상환조건은 각각 ‘3년 거치 5년 균등분할’ 및 ‘2년 거치 전액’ 상환.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이 끝내 와해됨으로써 수교 대가인 대소 경협차관은 노태우 정부를 승계한 김영삼 정부의 큰 부담으로 남게 됐다.
다행히 92년 연방 해체 후 구소련의 채무를 승계한 러시아 정부가 이미 제공된 차관의 상환책임을 보증함으로써 한-러 상환협상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93년 처음 만기가 도래한 채권에 대한 상환실적이 95년 6월 당시 현금 1910만 달러와 알루미늄 1270만 달러어치일 만큼 극히 저조했다. 만성적인 경화 부족 상태인 러시아 정부는 국제 현물시장에서 현금화가 쉬운 원자재 상환을 기피하는 대신 자국 내 실업문제 완화를 위해서도 헬기, 방산물자 등의 공산품 상환을 원했다. 한-러 정부는 95년 7월 당시 홍재형-다비도프 부총리간에 현금상환을 대신할 현물상환 협정을 처음 체결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일단 93년 만기 도래분(원금과 연체이자를 합쳐 4억5000만 달러)부터 원자재, 헬기, 방산물자 등으로 95년부터 98년까지 연차적으로 상환하기로 했는데 이 가운데 방산물자 도입사업이 바로 ‘불곰사업’이다.
이처럼 불곰사업은 여타의 해외무기 도입사업과 달리 처음부터 군의 소요(所要)가 아닌 정치·외교적 논리에 의해 군에 ‘할당’된 성격이 강했다. 이렇다 보니 규모 있는 전력 확보사업이 되지 못했다. 이는 95년 7월 경협차관 상환협정 체결 이후 첫 국정감사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은 95년 9월25일 당시 국방부·합참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정호용 의원과 이양호 국방장관이 불곰사업에 대해 나눈 질의·응답 내용이다.
“러시아로부터 T-86 전차하고 또 BMP-3 경전차, 휴대용 대공미사일, 대전차 유도탄 등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품목은 국방부에서 요구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쪽에서 주겠다는 것입니까?”
“원래 정부에서는 원자재로 (상환)요구를 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알루미늄 등 이런 것을 요구했는데, 제일 좋은 것은 현금상환이겠지만 현금은 안 되고, 두 번째가 원자재인데 원자재도 다 줄 수 없으니까 일부를 방산물자로 변제해 줄 것을 러시아측에서 요청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채권자(한국)가 아닌 채무자(러시아)가 다른 방법으로는 못 갚겠다고 해 도리 없이 방산물자 도입, 즉 불곰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의원들이 걱정한 대로 불곰사업으로 들여온 러시아 무기는 교육훈련용 또는 연구용으로는 양이 너무 많고 전력화용으로는 너무 적은 데다 향후 군수지원 문제나 운용 문제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여건이 안 되어 복잡한 문제만 야기할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한국군 무기체계가 미제 일변도여서 미국의 견제가 예상되는 데다 괜히 무기체계의 혼선만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실 군에서도 어차피 러시아제 무기를 전력화 대상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량 다품종’ 도입을 계획했었다. 장영달 의원(국방위·민주당) 보좌관은 “당초 군이 1차 불곰사업 대상으로 선정한 러시아 무기 쇼핑 리스트는 54개 품목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판다’는 러시아의 배짱에 밀려 T-80U 전차와 BMP-3 장갑차, 그리고 Metis-M 대전차 미사일과 IGLA 휴대용 대공미사일 등 4개 품목을 들여오는 것으로 대폭 축소되었다”고 말했다.
실제 러시아 경협차관의 무기 상환을 둘러싸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적’이 아니라 ‘우방’인 미국이었다. 합참의 한 관계자는 그 배경으로 “미국으로서는 최대 고객인 한국이 값싸고 괜찮은 러시아 무기에 입맛을 들일 경우 자국의 무기시장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한-미 연합작전의 상호운용성과 피아 식별의 중요성을 내세워 러시아제 무기를 전력화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당시 여당 국방위원들은 불곰사업의 목표와 관련해 미국의 비위를 거슬리는 ‘쓸모없는 무기’보다는 무형의 첨단 방산기술을 습득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또 정부 일각에서는 러시아측이 원자재 상환을 기피함에 따라 95∼96년 철강재 상환분(9000만 달러)을 대신해 중장기 핵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옐로 케이크’라고 부르는 농축우라늄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야당 국방위원들은 미국 무기체계의 종속을 견제하는 차원에서라도 러시아 무기의 전력화를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당시는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구매압력이 드세 일부 의원들은 국방부에 경협차관 상환의 일환으로 러시아제 S300PMU 지대공 미사일의 도입을 검토하라고 요청했다.
무기구매 창구의 다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외 구매무기의 미국 의존도는 80% 수준. 따라서 불곰사업은 외자 구매선 다변화의 한 방안으로 추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방 당국의 의지 부족으로 미국의 무기 구매압력에 대한 지렛대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실패했다.
국방부가 러시아에 해외 군수무관을 처음 파견한 것이 97년 9월로 이는 불곰사업을 앞두고 러시아제 무기 정보와 가격동향 등에 관한 준비가 전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당시 해외 군수무관은 17명으로 이중 미국에 13명,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4개국에 각 1명씩 파견되어 있었다). 또 한국군 미사일방어체계 구축사업인 SAM-X와 관련해 시험평가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패트리어트 미사일 구매 압력을 가하고 러시아가 이에 반발하자 국방부는 이를 무기한 연기했다. 이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의지가 없었던 셈이다.
국방부는 그동안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 보유의 첨단 무기체계 및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북한 무기체계를 간접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장차 북한이 보유할 가능성이 큰 무기체계에 대한 성능연구 및 대응 전술개발과 유사시 전력화를 고려하여, 최소 단위로 구매가 가능한 T-80U 전차와 BMP-3 경전차 그리고 소량의 휴대용 대전차 유도탄 및 휴대용 대공미사일 등을 도입대상 장비로 선정했다”(97년 10월 김동진 국방장관의 국정감사 답변)는 것. 그러나 불곰사업과는 별도로 추진된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 도입사업인 ‘636사업’이 해군의 반대로 무산되고, 2차 불곰사업의 무기 선정에 무기중개상이 끼어든 과정을 보면 이 ‘임자 없는 사업’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고 파행을 거듭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정부는 98년 8월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계기로 경협차관 상환일정이 더 늦어지자 해군이 추진중인 차기잠수함(KSS-2) 사업(6척)의 일환으로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3척) 도입을 추진했다. 이른바 ‘636사업’이 그것이다. 이 또한 휴대용 유도탄으로 찔끔찔끔 받아서는 좀처럼 상환액이 줄어들지 않아 경협차관을 한몫에 상계하려는 한국 정부와 고사 직전의 방산업체를 가동시켜 실업난을 해소하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군 실사단의 보고를 토대로 한 해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지난해 10월2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는 ‘636사업’을 중단하고 러시아 방산물자 추가 도입방침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10월17일 국방부는 정책회의에서 러시아 방산물자 도입을 위한 2차 불곰사업 추진을 공식 결정했다.
이후 한-러 정부는 2000년 11월 군사기술·방산·군수 공동위원회를 개최한 데 이어 지난 10월까지 도입무기 선정 및 상환비율 등을 둘러싼 네 차례의 실무협의를 진행했다. 국방부가 국회에 보고한 그동안의 협의결과에 따르면, 한-러 정부가 잠정 합의한 2차 불곰사업 품목은 △BMP-3 경전차 37대 △T-80U 전차 2대(수리 부속용) △Metis-M 156기 △생도 실습기 23대 △공기부양정 2척 △대형 수송기 3대 등으로 총 5억3000만 달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부가 ‘636사업’의 중단을 최종 결정하기 직전인 지난해 9월 무기 중개업체 I사가 러시아 무기수출 회사인 로스보오루졔니예(현 러시아 국영 무기수출 회사인 로스오보론엑스포르트의 전신)사와 수송기 등 6개 품목에 대해 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정보 유출 의혹이 제기되었다.
문제는 I사라는 무기 중개업체가 지난 6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문일섭 전 국방부 차관에게 뇌물을 제공한 서충일씨가 ‘고문’으로 재직한 회사라는 점이다. 문 전 차관은 예비역 소장 출신으로 육사 동기인 서충일씨로부터 98년 12월과 99년 4월 각각 1000만원씩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지난 9월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뇌물을 대가로 문 전 차관이 사전 유출한 불곰사업 정보를 토대로 I사가 러시아 무기수출 회사와 판매권을 ‘싹쓸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6일 국회 국방위의 국방부 예산안 심의에서도 일부 의원들은 불곰사업과 관련해 문일섭 전 차관의 특정업체 비호 의혹을 집중 추궁했다. 특히 정재문 의원(한나라당)은 “그동안 러시아와는 전혀 연고가 없던 I사가 지난해 10월2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2차 불곰사업이 결정되기 직전인 9월7일 러시아 국영무기수출 회사인 로스보오루졔니예와 전격적으로 대리점권을 체결했다”며 문일섭 전 차관의 I사 비호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
최소 단위로 구매가 가능한 소량의 휴대용 대전차 유도탄 및 휴대용 대공미사일 등을 도입대상 장비로 선정했다는 1차 불곰사업 때의 기준이 2차 불곰사업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것도 의혹 대상이다. 특히 국방부는 올 7월 Metis-M 사업의 미사일 구입량을 1만2000발로 늘려 업계를 놀라게 했다. 업계에서는 유효기간이 10년인 미사일을 한꺼번에 1만2000발 구입하는 것은 특정업체를 봐주기 위한 막대한 국고낭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636사업의 대체안으로 불곰사업을 계획할 때 I사의 Metis-M은 91기(8600만 달러), L사의 제독헬기는 18대(1억1900만 달러)로 제안됐다. 그러나 올 1월, 2차 한-러 실무협의를 앞두고 제독헬기는 6대(5000만 달러)로 축소되는 대신, Metis-M은 156기(1억78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갑자기 군 내부에서 제독헬기를 제외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소요를 6대로 삭감한 것이다. 이어 올 7월에는 제독헬기의 구입을 아예 백지화하는 대신, Metis-M의 미사일 구입량을 1만2000발로 늘려 Metis-M 구입사업은 2억7100만 달러로 급증하게 됐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I사 이모 사장은 “서충일 장군은 사병 시절 중대장으로 모셨던 관계로 형님처럼 가깝게 모신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의 ‘고문’직을 가진 적은 없다”면서 “문 전 차관과 서장군과의 관계도 뇌물과 정보를 주고받는 그런 사이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사장은 “우리 회사가 처음 잠수함 도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2차 불곰사업이 시행되리라는 것을 예측한 것이지 특정인으로부터 정보를 빼내 에이전트십을 따낸 것은 아니다”면서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한편 국방부 관계자도 “제독헬기 사업이 백지화하면서 I사가 Metis-M 계약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면서 “제독헬기 사업은 최초 러시아의 카모프-32 헬기를 검토했으나 성능 검토 결과 우리 군이 보유한 헬기로 대체 가능하다고 판단, 별도 구매가 불필요한 것으로 결정되어 정상적인 소요검토 절차에 의거해 삭제되었다”고 밝혔다. 또 Metis-M의 경우도 국방부는 현재까지 세부 구매계획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며, I사가 판매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국방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연내 열리게 될 제5차 실무협의에서 한-러 정부간 MOU를 공식 체결할 때까지는 불곰사업을 둘러싼 의혹이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또 당초 2대 8로 예상했던 현금 및 현물상환 구매비율이 러시아측 주장대로 5대 5로 결정날 것으로 보여 그에 따른 비판도 예상된다. 즉 러시아에 준 빚 대신 무기 100원어치를 들여오는데 50원은 현물로 주지만 50원은 현금을 주고 사가라는 것. 요컨대 한국에 제공할 무기를 생산할 공장을 돌리려면 그만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뭐 주고 뺨 맞는다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