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 동안 진행한 술기행의 마지막편이다. 순전히 술과 기행이라는 두 글자가 어울릴 것 같아 시작한 일이었다. 술 좋은 곳은 물이 좋고, 물 좋은 곳은 산이 좋고, 산 좋은 곳은 경치도 좋을 터이니,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해보자는 게 의도였다. 술에 취해 경치를 제대로 완상한 겨를이 없었지만, 술기행은 이름만큼이나 멋진 여행이었다.
다룰 만한 우리 술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아주 센 소주 한잔을 권하면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쌀과 율무로 빚은 증류 소주, 옥로주가 서울 가까운 곳에 있다. 술도가는 물을 찾아 용인시 백암면 박곡리에 터를 잡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옥로주는 술도가 주인을 따라 유람을 많이 했다.
1993년에 옥로주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에서였다. 그래서 술 이름도 당정(堂井) 옥로주(玉露酎)라 했다. 특별한 것은 술 酒(주)자가 아니라, 세 번 거듭 내린 진한 술을 뜻하는 酎(주)자다. 사전에는 소주를 燒酒라고 적었지만, 소주 회사들은 대개 燒酎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酎자에는 진한 술이라는 뜻과 세 번 거듭 내린 술이라는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어서다.
첫번째 옥로주 기능보유자가 된 유양기씨는 일제 시대부터 주류업에 관여해 왔다. 주류업을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버지 유행룡씨가 술을 잘 빚어서였다. 유행룡씨는 전라북도 남원군 산동면에서 살다가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로 이사오면서부터 주변에서 많이 나는 율무를 원료로 술을 빚었다. 유양기씨는 아버지에게서 술 내리는 법을 배워 장날이면 화개장터에 술을 내다 팔았다. 그러다가 1936년 하동읍 내 일본인이 운영하던 단포 양조장에 들어가 증류식 소주를 내렸다. 그 뒤 광복이 되자 단포양조장을 인수해 옥천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꿔 1947년부터 30도 소주 옥로주를 시판했다.
술 이름은 옥 같은 이슬이 소주 고리에서 떨어진다 하여 옥로주라 했다. ‘신식 상표’인 셈이다. 그래서 옥로주는 따로 옛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에 옥천 양조장에서 양철로 된 소주 고리에 열전도율이 높은 구리로 된 냉각관을 사용했다. 누룩 대용으로 흑국균(黑麴菌)을 써서 술도가는 마치 탄광처럼 온통 검댕투성이였다.
유양기씨는 1965년에 양곡정책으로 쌀로 술을 빚을 수 없자 술도가를 그만두었고, 1990년에 쌀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되자 다시 술을 빚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물을 찾아 용인에 술도가 터를 잡고 난 뒤인 9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큰딸인 유민자씨가 옥로주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옥로주는 45도로 안동소주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 독주다. 술빛은 투명한데 향이 진하고 그윽하며, 맛은 독하고 쓰면서도 고소하다. 이 술의 특징은 율무에 있다. 율무는 차로도 많이 마시지만, 한의원에서 의이인(薏苡仁)이라 하여 약으로 사용한다. 고혈압과 동맥경화증을 잘 다스리고, 이뇨제, 강장제, 건위제로 쓰이고 기침에 효험이 있다.
전국을 일주하며 술기행을 다녀보니, 우리 술의 가장 큰 특징은 누룩으로 쌀을 삭혀서 만든 쌀술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약재를 넣거나 다른 곡물을 더 넣어 변화를 준다. 옥로주도 마찬가지인데, 쌀과 율무를 6 대 4로 섞어 술을 빚는다. 전통 술에서 율무를 넣는 경우는 드물긴 하지만, 강원도 횡성에 의이인주 약주가 있고, 전라도 화순의 의이인주 소주가 있다.
옥로주는 밑술을 만들고 나서, 덧술을 3번 한다. 부글부글 끓던 술이 사그라질 때면 고두밥을 넣어 다시 한번 발효시키면 술이 확실하게 되고 증류하는 술의 양도 많다고 한다. 증류하기 전 단계의 술은 15도쯤 되는데, 발효주가 약하면 증류도 빨리 끝난다. 율무는 덧술할 때 쪄서 넣는데, 유민자씨는 “술이 부드러워지고 구수한 냄새가 나고, 또 주변에서 많이 재배하다 보니 율무를 넣었을 것이다”고 했다. 율무는 쌀보다 3배가 비싸니 재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용모양의 술병이 요란스럽기는 해도, 옥로주 제조장은 평화로워 보였다. 추석을 앞두고 있어 통신판매용 술을 포장하고 있고, 발효 탱크에 술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유민자씨 남편은 방송국에서 정년퇴직하고, 수도권일보의 편집국장을 하고 있어 여느 술도가보다는 정보에도 밝고 수완이 좋아 제조장을 수월하게 꾸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남편인 곽무련씨는 “눈물겹도록 고생했다”고 한다. IMF 사태를 고스란히 당하고 조금 있던 부동산도 날려 지난 일은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는 웬만큼 회복하여 앞을 보고 달릴 수 있게 된 듯싶은데, 여느 민속주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이 앞에 있으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소주를 빚는 제조장은 1000만 원어치를 팔면 531만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것도 이번 달에 팔면 다음 달에 바로 내야 한다. 그러니 “될 수 없어요. 쌀값, 도자기값, 세금 내면 남는 게 없어요”라는 푸념이 입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10년 전 까지만 해도 쌀을 낭비한다고 쌀술을 못 만들게 했는데, 이제 쌀이 남아돌아 아침밥을 먹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 쌀술을 못 만들던 시절에도 쌀술을 만들어 수출하고 거기에서 생기는 이익으로 우리 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있었다. 우리의 술은 쌀로 만드니, 쌀술을 개발해야만 세계에 내놓을 만한 우리 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민속주 정책은 우리 술에 대한 배려가 없다. 부침을 거듭하는 민속주 술도가들이 안정된 투자와 생산과 유통을 이룰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옥로주의 곽무련씨는 언론계에 있다 보니 그런 절실함을 깊이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민속주 술도가 사람이 아우성치면서 스스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술도가에서 가까운 백암면 옥산리에 있는 한택식물원이 내년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에 분주하다. 백암면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시 경계를 막 넘어서면 중부고속도로의 일죽 나들목 옆에 죽산리가 있다. 이 마을에 고려시대에 번창한 봉업사라는 절터가 있다. 주민 말로, 이곳은 금강산처럼 8만 9암절이 있었다고 한다. 석탑과 당간지주, 석불이 흩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매산리 태평 미륵불은 웅장하고 섬세하다. 비록 어깨가 좁고, 팔이 짧긴 하지만, 큰 눈과 큰 귀, 긴 머리장식과 굴곡진 옷장식이 인상적이다. 미륵불 앞에서라도 답답한 술도가 사람이 잘 되어 달라고 두손을 모아야 할 처지다. 어디 기댈 데가 따로 없어서다.
술기행을 막음하려 드니 민속주들의 열악하지만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눈에 어려 마음이 그리 편치 못하다. 추석이 다가오니 반짝 호경기를 맞겠지만 단순히 남에게 선사하는 술이 아니라, 내가 마시기 위해 손에 들고 오는 그런 친근한 술이 될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다룰 만한 우리 술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아주 센 소주 한잔을 권하면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쌀과 율무로 빚은 증류 소주, 옥로주가 서울 가까운 곳에 있다. 술도가는 물을 찾아 용인시 백암면 박곡리에 터를 잡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옥로주는 술도가 주인을 따라 유람을 많이 했다.
1993년에 옥로주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에서였다. 그래서 술 이름도 당정(堂井) 옥로주(玉露酎)라 했다. 특별한 것은 술 酒(주)자가 아니라, 세 번 거듭 내린 진한 술을 뜻하는 酎(주)자다. 사전에는 소주를 燒酒라고 적었지만, 소주 회사들은 대개 燒酎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酎자에는 진한 술이라는 뜻과 세 번 거듭 내린 술이라는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어서다.
첫번째 옥로주 기능보유자가 된 유양기씨는 일제 시대부터 주류업에 관여해 왔다. 주류업을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버지 유행룡씨가 술을 잘 빚어서였다. 유행룡씨는 전라북도 남원군 산동면에서 살다가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로 이사오면서부터 주변에서 많이 나는 율무를 원료로 술을 빚었다. 유양기씨는 아버지에게서 술 내리는 법을 배워 장날이면 화개장터에 술을 내다 팔았다. 그러다가 1936년 하동읍 내 일본인이 운영하던 단포 양조장에 들어가 증류식 소주를 내렸다. 그 뒤 광복이 되자 단포양조장을 인수해 옥천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꿔 1947년부터 30도 소주 옥로주를 시판했다.
술 이름은 옥 같은 이슬이 소주 고리에서 떨어진다 하여 옥로주라 했다. ‘신식 상표’인 셈이다. 그래서 옥로주는 따로 옛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에 옥천 양조장에서 양철로 된 소주 고리에 열전도율이 높은 구리로 된 냉각관을 사용했다. 누룩 대용으로 흑국균(黑麴菌)을 써서 술도가는 마치 탄광처럼 온통 검댕투성이였다.
유양기씨는 1965년에 양곡정책으로 쌀로 술을 빚을 수 없자 술도가를 그만두었고, 1990년에 쌀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되자 다시 술을 빚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물을 찾아 용인에 술도가 터를 잡고 난 뒤인 9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큰딸인 유민자씨가 옥로주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옥로주는 45도로 안동소주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 독주다. 술빛은 투명한데 향이 진하고 그윽하며, 맛은 독하고 쓰면서도 고소하다. 이 술의 특징은 율무에 있다. 율무는 차로도 많이 마시지만, 한의원에서 의이인(薏苡仁)이라 하여 약으로 사용한다. 고혈압과 동맥경화증을 잘 다스리고, 이뇨제, 강장제, 건위제로 쓰이고 기침에 효험이 있다.
전국을 일주하며 술기행을 다녀보니, 우리 술의 가장 큰 특징은 누룩으로 쌀을 삭혀서 만든 쌀술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약재를 넣거나 다른 곡물을 더 넣어 변화를 준다. 옥로주도 마찬가지인데, 쌀과 율무를 6 대 4로 섞어 술을 빚는다. 전통 술에서 율무를 넣는 경우는 드물긴 하지만, 강원도 횡성에 의이인주 약주가 있고, 전라도 화순의 의이인주 소주가 있다.
옥로주는 밑술을 만들고 나서, 덧술을 3번 한다. 부글부글 끓던 술이 사그라질 때면 고두밥을 넣어 다시 한번 발효시키면 술이 확실하게 되고 증류하는 술의 양도 많다고 한다. 증류하기 전 단계의 술은 15도쯤 되는데, 발효주가 약하면 증류도 빨리 끝난다. 율무는 덧술할 때 쪄서 넣는데, 유민자씨는 “술이 부드러워지고 구수한 냄새가 나고, 또 주변에서 많이 재배하다 보니 율무를 넣었을 것이다”고 했다. 율무는 쌀보다 3배가 비싸니 재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용모양의 술병이 요란스럽기는 해도, 옥로주 제조장은 평화로워 보였다. 추석을 앞두고 있어 통신판매용 술을 포장하고 있고, 발효 탱크에 술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유민자씨 남편은 방송국에서 정년퇴직하고, 수도권일보의 편집국장을 하고 있어 여느 술도가보다는 정보에도 밝고 수완이 좋아 제조장을 수월하게 꾸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남편인 곽무련씨는 “눈물겹도록 고생했다”고 한다. IMF 사태를 고스란히 당하고 조금 있던 부동산도 날려 지난 일은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는 웬만큼 회복하여 앞을 보고 달릴 수 있게 된 듯싶은데, 여느 민속주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이 앞에 있으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소주를 빚는 제조장은 1000만 원어치를 팔면 531만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것도 이번 달에 팔면 다음 달에 바로 내야 한다. 그러니 “될 수 없어요. 쌀값, 도자기값, 세금 내면 남는 게 없어요”라는 푸념이 입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10년 전 까지만 해도 쌀을 낭비한다고 쌀술을 못 만들게 했는데, 이제 쌀이 남아돌아 아침밥을 먹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 쌀술을 못 만들던 시절에도 쌀술을 만들어 수출하고 거기에서 생기는 이익으로 우리 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있었다. 우리의 술은 쌀로 만드니, 쌀술을 개발해야만 세계에 내놓을 만한 우리 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민속주 정책은 우리 술에 대한 배려가 없다. 부침을 거듭하는 민속주 술도가들이 안정된 투자와 생산과 유통을 이룰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옥로주의 곽무련씨는 언론계에 있다 보니 그런 절실함을 깊이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민속주 술도가 사람이 아우성치면서 스스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술도가에서 가까운 백암면 옥산리에 있는 한택식물원이 내년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에 분주하다. 백암면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시 경계를 막 넘어서면 중부고속도로의 일죽 나들목 옆에 죽산리가 있다. 이 마을에 고려시대에 번창한 봉업사라는 절터가 있다. 주민 말로, 이곳은 금강산처럼 8만 9암절이 있었다고 한다. 석탑과 당간지주, 석불이 흩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매산리 태평 미륵불은 웅장하고 섬세하다. 비록 어깨가 좁고, 팔이 짧긴 하지만, 큰 눈과 큰 귀, 긴 머리장식과 굴곡진 옷장식이 인상적이다. 미륵불 앞에서라도 답답한 술도가 사람이 잘 되어 달라고 두손을 모아야 할 처지다. 어디 기댈 데가 따로 없어서다.
술기행을 막음하려 드니 민속주들의 열악하지만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눈에 어려 마음이 그리 편치 못하다. 추석이 다가오니 반짝 호경기를 맞겠지만 단순히 남에게 선사하는 술이 아니라, 내가 마시기 위해 손에 들고 오는 그런 친근한 술이 될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