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7일부터 3일간 청주에서 유네스코 MOW(memory of the world, 세계의 기억사업) 제5차 국제자문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우리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이하 직지)을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경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권고하였다. 아직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공식발표가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자문위가 결정을 번복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세계기록유산으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로써 한국은 지난 95년 제3차 회의에서 통과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과 함께 모두 4개의 세계기록유산을 등재하게 되었다.
이번에 한국이 신청한 2건의 기록물 중 직지가 비교적 쉽게 통과된 반면, 승정원일기는 예상 외로 자문위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이번 회의를 준비해 온 유네스코한국위원회(김여수 사무총장)는 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인데다 프랑스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등재가 어려울 것으로 보았고, 승정원일기에 대해서는 낙관했다. 그러나 막상 회의를 시작하자 위원들은 승정원일기 쪽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 출납기관으로 비서실 역할을 한 승정원에서 1623년(인조 원년) 3월12일부터 1910년(순종 4년) 8월까지 장장 288년 동안 국왕의 공식일정과 여러 사건들을 날마다 기록한 일기다. 서울대 규장각에 총 3243책이 있으며 국보303호로 지정되었다.
승정원일기에 대해 국제자문위원회는 세 가지 방향에서 질문을 던졌다. 첫째 이 기록물이 1995년 승인된 조선왕조실록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둘째 국제적 영향력과 가치보다는 국내적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가, 셋째 과연 문화간 교류를 담고 있는가.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위원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적극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의 주서(注書)나 가주서(假注書)가 기록을 담당하는데 한 달에 한 책씩 만드는 게 원칙이었다(분량에 따라 책수는 가감했다). 여기에는 동양 군주제 사회의 정치와 정책입안과정 및 권력구조에 대한 생생한 자료를 담았다. 288년간에 걸친 승정원일기는 단일 기록으로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다. 국내 한 역사학자는 초서에 능한 한학자가 날마다 9시간씩 승정원일기를 읽는다 해도 총 9491일, 즉 26년이 걸린다고 한다. 심사기준의 하나인 시간과 형태 면에서 방대한 승정원일기는 세계적 가치가 충분했다.
영국·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도 그들의 정치외교를 기록한 정사(正史)를 가지고 있지만 승정원일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했다. 사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외국의 여러 정사(正史)와 많이 다르다. 대부분의 정사가 공식행사와 사안에 대한 회의록 성격을 지녔고 원(原)사료라기보다 이를 정리한 2차적 사료의 성격이 강한 반면, 승정원일기는 신하와 국왕의 면담 내용, 왕의 건강상태와 같은 사적인 기록, 천문기록 등 모든 내용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게 특징이다. 사진·영상매체가 없던 그 시대의 사회상·사건을 입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정교한 일종의 ‘사료식 시청각 자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실록에는 왕이 수원에 행차한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는 몇 일, 몇 시에 누구와 함께 갔으며 말은 몇 번 바꿔 탔고, 준비한 가마는 무엇이며 행차중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심지어 왕이 기침은 몇 번 했고 상태는 어떠했는지 마치 의사가 진단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 승정원일기는 천문과학의 보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770년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측우기로 잰 비의 양을 기록하고 있어 기후변화와 기상예측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지진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상세히 날짜별로 기록해 한반도에서의 지진현황과 그 추이를 연구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로 활용된다. 이러한 기술방식상의 특징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심사기준 중 ‘희귀성’ 부분에서 가치를 인정 받았다.
아울러 승정원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비록 한반도에 그치고 있지만 서세동침(西勢東侵)의 격동기에 외국문물 수용에 대한 의견과 고뇌, 결정 내용, 사적인 감정 등을 그대로 기술했다. 또한 이러한 내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적 접변과 충돌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특징을 잘 표현하는 대표성을 띠고 있다. 즉 승정원일기만 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의 충격을 조선왕조는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 영향에 대해 어떤 반응과 우려를 표했는지 알 수 있다. 천주교에 대한 왕의 견해, 서구 열강의 한반도 진출과 관련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등등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국제자문위원들이 승정원일기에 대해 질의한 서지학적 가치, 유산적 가치, 문화교류 및 영향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질문은 포괄적 분석방법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는 우리가 문화재를 통합적 개념으로 해석하기보다 미시적인 접근, 즉 미술사적 관점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사료적 가치를 평가하려는 국제적 동향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답습해 온 관행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승정원일기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동서양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도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다.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를 우리 나라가 세계기록유산에 신청함으로써 지금까지 유산을 갖고 있는 소장국이 신청해 온 관례를 깬 것이다. 앞으로 많은 국가들이 한국의 예를 따라 자국 영토 내에 없는 기록물 중 세계적 가치를 지닌 자료를 유네스코에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선정을 계기로 직지에 대한 세계적 평가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선 올해 11월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개최하는 정기총회 기간 중 직지와 구텐베르크 성경을 소개하는 전시물을 세우고 이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독일 구텐베르크박물관, 청주 고인쇄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특별전과 회의가 이어진다. 한국문화의 홍보에 있어서 경제적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커다란 수확을 거둔 셈이다. 한국에서 개최한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기록을 그다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영화 필름, 테이프, 음반, 포스터, 안내책자, 상표 등 역사서적에서 현대상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보관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화상품 개발을 서두르고 있으나 여기에 근본이 되는 것이 콘텐츠 개발이며 이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록유산이라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기록은 역사의 얼굴이자 자원이다. 선조들이 이룬 장인정신과 창조정신을 디지털 시대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다.
이번에 한국이 신청한 2건의 기록물 중 직지가 비교적 쉽게 통과된 반면, 승정원일기는 예상 외로 자문위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이번 회의를 준비해 온 유네스코한국위원회(김여수 사무총장)는 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인데다 프랑스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등재가 어려울 것으로 보았고, 승정원일기에 대해서는 낙관했다. 그러나 막상 회의를 시작하자 위원들은 승정원일기 쪽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 출납기관으로 비서실 역할을 한 승정원에서 1623년(인조 원년) 3월12일부터 1910년(순종 4년) 8월까지 장장 288년 동안 국왕의 공식일정과 여러 사건들을 날마다 기록한 일기다. 서울대 규장각에 총 3243책이 있으며 국보303호로 지정되었다.
승정원일기에 대해 국제자문위원회는 세 가지 방향에서 질문을 던졌다. 첫째 이 기록물이 1995년 승인된 조선왕조실록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둘째 국제적 영향력과 가치보다는 국내적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가, 셋째 과연 문화간 교류를 담고 있는가.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위원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적극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의 주서(注書)나 가주서(假注書)가 기록을 담당하는데 한 달에 한 책씩 만드는 게 원칙이었다(분량에 따라 책수는 가감했다). 여기에는 동양 군주제 사회의 정치와 정책입안과정 및 권력구조에 대한 생생한 자료를 담았다. 288년간에 걸친 승정원일기는 단일 기록으로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다. 국내 한 역사학자는 초서에 능한 한학자가 날마다 9시간씩 승정원일기를 읽는다 해도 총 9491일, 즉 26년이 걸린다고 한다. 심사기준의 하나인 시간과 형태 면에서 방대한 승정원일기는 세계적 가치가 충분했다.
영국·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도 그들의 정치외교를 기록한 정사(正史)를 가지고 있지만 승정원일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했다. 사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외국의 여러 정사(正史)와 많이 다르다. 대부분의 정사가 공식행사와 사안에 대한 회의록 성격을 지녔고 원(原)사료라기보다 이를 정리한 2차적 사료의 성격이 강한 반면, 승정원일기는 신하와 국왕의 면담 내용, 왕의 건강상태와 같은 사적인 기록, 천문기록 등 모든 내용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게 특징이다. 사진·영상매체가 없던 그 시대의 사회상·사건을 입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정교한 일종의 ‘사료식 시청각 자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실록에는 왕이 수원에 행차한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는 몇 일, 몇 시에 누구와 함께 갔으며 말은 몇 번 바꿔 탔고, 준비한 가마는 무엇이며 행차중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심지어 왕이 기침은 몇 번 했고 상태는 어떠했는지 마치 의사가 진단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 승정원일기는 천문과학의 보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770년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측우기로 잰 비의 양을 기록하고 있어 기후변화와 기상예측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지진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상세히 날짜별로 기록해 한반도에서의 지진현황과 그 추이를 연구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로 활용된다. 이러한 기술방식상의 특징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심사기준 중 ‘희귀성’ 부분에서 가치를 인정 받았다.
아울러 승정원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비록 한반도에 그치고 있지만 서세동침(西勢東侵)의 격동기에 외국문물 수용에 대한 의견과 고뇌, 결정 내용, 사적인 감정 등을 그대로 기술했다. 또한 이러한 내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적 접변과 충돌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특징을 잘 표현하는 대표성을 띠고 있다. 즉 승정원일기만 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의 충격을 조선왕조는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 영향에 대해 어떤 반응과 우려를 표했는지 알 수 있다. 천주교에 대한 왕의 견해, 서구 열강의 한반도 진출과 관련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등등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국제자문위원들이 승정원일기에 대해 질의한 서지학적 가치, 유산적 가치, 문화교류 및 영향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질문은 포괄적 분석방법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는 우리가 문화재를 통합적 개념으로 해석하기보다 미시적인 접근, 즉 미술사적 관점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사료적 가치를 평가하려는 국제적 동향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답습해 온 관행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승정원일기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동서양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도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다.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를 우리 나라가 세계기록유산에 신청함으로써 지금까지 유산을 갖고 있는 소장국이 신청해 온 관례를 깬 것이다. 앞으로 많은 국가들이 한국의 예를 따라 자국 영토 내에 없는 기록물 중 세계적 가치를 지닌 자료를 유네스코에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선정을 계기로 직지에 대한 세계적 평가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선 올해 11월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개최하는 정기총회 기간 중 직지와 구텐베르크 성경을 소개하는 전시물을 세우고 이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독일 구텐베르크박물관, 청주 고인쇄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특별전과 회의가 이어진다. 한국문화의 홍보에 있어서 경제적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커다란 수확을 거둔 셈이다. 한국에서 개최한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기록을 그다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영화 필름, 테이프, 음반, 포스터, 안내책자, 상표 등 역사서적에서 현대상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보관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화상품 개발을 서두르고 있으나 여기에 근본이 되는 것이 콘텐츠 개발이며 이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록유산이라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기록은 역사의 얼굴이자 자원이다. 선조들이 이룬 장인정신과 창조정신을 디지털 시대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