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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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피… 중동은 神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

평화협상 가로막는 여섯 가지 걸림돌… 국제사회도 무대책, 팔레스타인 주민 처절한 생존싸움

  • 입력2005-06-09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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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피… 중동은 神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
    세계의 화약고’는 이제 발칸반도에서 중동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중동지역에서는 지난 9월 말 이후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500만 유태인과 300만 팔레스타인 주민 사이의 생존을 건 싸움 때문이다. 300명이 넘는 사망자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돌멩이나 기껏해야 소총을 들고 이스라엘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름하여 인티파다(intifada), 봉기 또는 투쟁이다. 지난 1987년의 인티파다 이래 가장 큰 유혈사태다.

    300명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유혈사태의 씨앗은 지난 7월 미 클린턴 대통령을 중재자로 한 캠프 데이빗 평화협상이 결렬되면서 뿌려졌다.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사이의 평화협상이 보름 만에 결렬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유혈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걱정해왔다.

    캠프 데이빗 협상 결렬, 유혈의 불씨

    피… 피… 중동은 神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
    지난 10년간을 끌어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회담을 통해 양측은 많은 타협안을 이끌어낸 게 사실이다. 90년대 초부터 두 당사자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접촉해 1993년 역사적인 원칙선언(DOP, 이른바 오슬로협정)에 서명했다.

    이 평화회담을 통해 당시 PLO 의장 아라파트는 제한된 영토 안에서나마 자치정부와 의회를 구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로도 양측은 이스라엘군의 부분 철수와 행정권 이양에 합의한 가자-제리코 협정(1994년)을 비롯,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관한 임시협약(1995년), 와이리버 각서(1998년), 샴 엘-셰이크 각서(1999년) 등에 서명했다.



    이런 합의각서들은 팔레스타인 의회 모하마드 호우라니 의원(헤브론)의 말대로 “감질날 정도로 단계적으로 조금씩 이스라엘로부터 양보를 받아내는 그런 과정”이었다. 협정에 서명이나, 문서로만 남은 사항들도 있다. 강경파인 리쿠드당의 당시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 클린턴의 압력 아래 마지못해 서명한 98년의 와이리버 각서는 팔레스타인 자치영역을 13% 넓히기로 했으나, 그후 이런저런 구실로 사문화됐다.

    중동 평화협상을 가로막는 여섯 가지 걸림돌을 하나씩 살펴보자.

    ▶1.팔레스타인 국가건설

    이스라엘 강온파 입장 엇갈려

    30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바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이스라엘 쪽 반응은 엇갈린다. 온건파들은 원칙적으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다만, 협상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꼬리표를 단다.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도 이런 입장이다. 이스라엘 쪽에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이 국가안보다. 팔레스타인에 독립국가가 들어설 경우, 주변의 ‘잠재적인 적국’인 아랍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에 무기를 공급해 이스라엘을 궁지에 빠뜨릴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다.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강경-보수파들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은 아예 논의의 대상으로조차 삼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를테면 필자가 현지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도어 골드 전 유엔대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독립국가를 갖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지난 7월 캠프 데이빗 평화협상에 나설 때 아라파트는 “평화협상의 성패와 관계없이 오는 9월13일을 데드라인으로 삼아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 건국을 선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년 전 와이리버 각서에서도 양측이 99년 5월까지 이와 관련한 협상을 매듭짓는다고 명시했고, 99년 9월의 샴 엘-셰이크 각서에서는 1년 안에 포괄적인 협정을 맺는다고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9월13일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특히 미 클린턴 행정부의 강경한 반대에 부닥쳐 그날을 그냥 넘겼다. 언제까지 건국 선포를 연기한다는 시한 설정도 없이.

    팔레스타인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9월13일이 아무 일 없이 넘어가자, 아라파트를 향해 “지금껏 지나치게 이스라엘과 미국 눈치를 보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런 때에 극우강경파인 아리엘 샤론이 동예루살렘을 방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려 지금의 유혈사태로 증폭된 셈이다.

    6일전쟁뒤 유엔안보리 결의안 242

    주권국가 건설은 당연하다고 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신생국가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적어도 1967년 6일전쟁 이전의 팔레스타인 영토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물론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꼽히는 동예루살렘이 포함된다. 이런 주장의 한결같은 근거는 6일전쟁 뒤 국제사회가 점령지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보리결의안 242다.

    이스라엘군은 그동안 시나이반도(1982년), 남부레바논(2000년)에서 물러났으나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 그리고 골란고원을 점령중이다. 바라크 수상은 6일전쟁 이전의 영토 안으로 이스라엘군을 모두 철수시킨다는 것은 고려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국경선 문제는 유대인 정착촌 철거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피… 피… 중동은 神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
    ▶3.동예루살렘

    양쪽 모두 ”영원한 수도”주장

    “동예루살렘 같은 어려운 문제는 뒤로 미루고 풀기 쉬운 것들부터 풀어나갔어야 했다.” 텔 아비브 현지에서 시몬 페레스(77) 지역개발장관을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9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총리를 지낸 노동당 원로로서 같은 당 바라크총리의 협상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했다. 페레스가 보기에는 지난 7월 캠프 데이빗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동예루살렘이란 걸림돌 탓이었다. 93년 당시 외무장관으로서 오슬로평화회담에서 아라파트와 마주앉았던 페레스는 “바라크 총리가 모든 문제를 일괄 타결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다된 협상을 그르쳤다”고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9월 말 시작돼 석달째 끌면서 많은 희생자를 낳은 이번 유혈사태의 원인도 잘 알려져 있듯이 동예루살렘 문제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통치권 아래 들어온 것은 1967년의 이른바 6일전쟁을 통해서다. 그전까지는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쪽 시각에서 보면, 동예루살렘(아랍어로는 알 쿠즈)은 앞으로 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다. 그러나 이스라엘측은 대부분의 외교공관들이 행정수도인 텔아비브에 있지만, 영원한 종교적인 수도는 예루살렘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지금대로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까지의 양측 협상과정에서 하나의 타협안이 거론되고는 있다. 팔레스타인 수도를 예루살렘 외곽에 자리한 아부 디스(Abu Dis)로 한다는 것이다. 아부 디스는 예루살렘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어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와도 가깝다. 현재 이곳 아부 디스에 짓고 있는 건물이 장차 팔레스타인 의회 건물로 쓰일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그러나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은 동예루살렘이 곧 탄생할 신생국가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돼야 한다는 원칙론에서 물러날 뜻이 없어 보인다.

    이스라엘의 해묵은 빚

    지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면서 벌인 이른바 ‘독립전쟁’은 현지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하심 카티브 교수(비르 제이트대학·정치학)의 말대로라면,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때 이스라엘 무장세력들은 100만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피난민을 낳았다. 필자가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유대인)은 집집마다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정든 마을들을 떠났다”고 증언한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려 했을 때 이스라엘 쪽에서는 그들의 귀환을 막았다. 이렇듯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난은 50년 넘게 이어진다.

    1967년의 6일전쟁은 또 다른 난민행렬을 낳았다. 지금도 250만(팔레스타인측 주장으론 400만)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관할지역과 이웃 아랍국가들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등에 퍼져 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난민수용소에서 살고 있다.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은 그동안 일관되게 유엔결의안 194에 근거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원상회복, 즉 귀환을 주장해왔다. 아울러 돌아가지 않고 외국에 그대로 머물거나, 신생 팔레스타인 국가 안에 살기를 희망하는 난민들에게는 이스라엘측의 적절한 보상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그러나 난민 귀환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난민 귀환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국 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협상하면서도 계속 넓혀 나갔다”

    중동 현지를 취재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점 하나는 팔레스타인 곳곳에 세워진 유대인 정착촌들이 대부분 외부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요새화돼 있다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붉은 타일을 한 현대식 주택들이 반듯반듯하게 지어져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유대인 정착촌이다.

    1948년 독립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 그리고 주변 아랍국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 이스라엘은 전세계 유대인들의 이민을 적극 추진해왔다. 특히 1967년 6일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의 지배권은 팔레스타인은 물론 골란고원, 시나이사막으로까지 넓어졌다.

    이 땅들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동구 공산권과 러시아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곳곳에 이른바 정착마을을 조성해 나갔다. 이들은 원주민들인 주변마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경작지를 넓혀 나갔다. 현재 요르단강 서안지구에는 20만명 남짓, 가자지구에는 6000명쯤의 정착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군의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자체적으로도 무장을 한, 말하자면 준군사집단(paramilitary)의 성격을 지녔다.

    바라크 총리로서도 아라파트측과의 평화협상에서 정착촌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정착민들의 반발이 큰 걸림돌이다. 이스라엘 곳곳에 정착촌들이 퍼져 있기 때문에 경계선을 어디로 정하기가 쉽지 않다. 140개 가량의 정착민촌은 고작 100∼200명 단위의 소규모지만, 그런 데일수록 “우리가 그동안 고생해 왔는데…” 하며 반발이 크다.

    최근에 실시된 이스라엘측의 한 여론조사로는 유대인 정착민 가운데 10%만이 정착촌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 이전에 실시된 다른 한 조사로는, 3분의 1 가량의 정착민이 정부가 적절한 보상을 해준다면 옮겨갈 뜻이 있음을 밝혔다. 아무튼 정착민의 절대 다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현 위치를 지키겠다는 각오다.

    정착민촌 처리를 둘러싸고 이스라엘 안에서도 견해 차이가 크다. 좌파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정착촌을 떠나라고 말한다. 물론 이주비를 비롯해 적절한 보상금을 전제한 주장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정착민 다수는 물론이고, 그동안 정착촌 사업을 지원해왔던 리쿠드당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무슨 소리냐고 반발한다. 매국노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발행되는 영자 일간지인 ‘예루살렘포스트’의 한 기자는 이스라엘 정부가 정착촌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비판하면서 언젠가는 국가적 화근이 될 걸 내다봤어야 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지난 1979년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면서, 그곳 유대인 정착민들을 어렵사리 강제 철거시킨 경험이 있다.

    아라파트의 평화협상팀이 이스라엘쪽 태도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보는 데는 까닭이 있다. 불신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행해온 유대인 정착촌 장려정책에서도 비롯되었다. 93년 오슬로 평화회담 이후로도 이스라엘 정부는 정책적으로 정착촌 확대를 지원해온 게 사실이다. 특히 리쿠드당 집권 초인 96년 9월에는 3000호의 정착민 주택 건설이, 11월에는 1200호의 주택 건설이 추진됐다.

    이처럼 리쿠드당 집권 2년반 사이에 동예루살렘 동쪽 요르단강 서안지구 곳곳에 정착촌이 들어선 결과로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민은 1992년 11만명, 95년 14만명에서 지금은 20만명으로 늘어났다. 아라파트의 대변인 마르완 카나파니는 이런 통계만 봐도 지난 7년 동안 평화협상을 하면서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속여온 것을 알 수 있다며 분개한다.

    이스라엘이 80% 독점

    팔레스타인 지역은 많은 곳이 사막지대나 다름없다. 곳곳이 돌산 투성이다. 척박한 땅을 일구려면 물이 필수적이다. 유대인 정착촌을 지나다보면, 밭에다 스프링클러로 물을 흠뻑 뿌려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곳엔 물이 넘친다. 팔레스타인 쪽의 형편은 어떤가.

    필자는 그곳에서 물 한 모금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라파트 수반이 머무는 행정 중심지인 가자 시내조차 물이 귀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낮은 소득을 감안하면, 생수를 사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이스라엘의 99년 1인당 소득이 1만8300달러로 한국보다도 높은 데 비해, 팔레스타인은 2000달러에 못 미친다).

    필자가 만난 헤브론 병원의 한 소아과 의사는 비위생적인 물 때문에 병이 난 어린이 환자들이 많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측이 일정한 쿼터를 설정해놓고 수도관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물의 80%를 쓰고, 팔레스타인은 나머지 20%만 쓸 수 있도록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는 11월 말에 최근 사태와 관련해 ‘내년 봄 조기총선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여론조사기관들의 조사로는 내일 당장 선거가 치러질 경우 우파인 제1야당 리쿠드당이 바라크 총리의 노동당을 2대 1로 앞설 것이란 분석이다. 바라크 총리는 내년 봄 총선을 의식해서라도 팔레스타인쪽과 평화협상에 주력해 잃은 인기를 만회하려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조기선거 발표 직후 바라크 총리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인정하되, 예루살렘을 포함한 세부적인 국경선 문제와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최장 3년 시한으로 뒤로 미루자는 새 협상안을 내놓았다.

    바라크 총리 새 협상안 선거용(?)

    그러나 팔레스타인 쪽은 모든 현안들을 한꺼번에 푸는, 이른바 포괄적(comprehesive) 평화협상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바라크의 제안은 내년 봄으로 예정된 선거용일 뿐이라는 비판과 함께. 팔레스타인측도 고민이다. 내년 총선에서 매파가 압도적인 리쿠드당이 이길 경우, 중동 평화협상은 더욱 꼬일 전망이다. 지금껏 살펴본 쟁점현안들을 그들이 양보하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제3, 제4의 인티파다(intifada)와 아울러 또 다른 유혈사태가 벌어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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