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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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산업’ 황제로 등극하나

셀레라 제노믹스 크레이그 벤터 회장…‘게놈지도’ 2년만에 완성, 선두주자로 우뚝

  • 입력2005-07-20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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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오 산업’ 황제로 등극하나
    6월26일 ‘신이 창조한 생명의 언어’를 발표하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옆에는 미국 국립보건연구소의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와 셀레라 제노믹스의 크레이그 벤터 회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여기서 작은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왜 똑같은 연구를 두 개의 그룹에서 수행한 것일까? 그리고 거대한 국립연구소와 일개 벤처기업이 어떻게 나란히 설 수 있는가?

    구약성경의 다윗은 3m 키의 거인 골리앗을 단 한 번의 돌팔매로 쓰러뜨렸다. 미 국립보건연구소가 골리앗이었다면 셀레라 제노믹스와 벤터 박사는 현대의 다윗이었다. 그는 ‘슈퍼 컴퓨터’라는 돌팔매로 국립연구소라는 골리앗에 맞서서 승리했다. 당초 2005년에 완성될 예정이었던 이 방대한 프로젝트가 5년이나 앞당겨진 것은 그가 설립한 셀레라 제노믹스 때문이었다. 셀레라 제노믹스는 불과 2년 만에 인간 게놈의 지도를 해독해내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렇다고 해서 벤터 박사가 ‘새벽부터 자정까지 연구에만 파묻혀 사는 세상물정 모르는 천재 과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의 특이한 인생유전은 한 과학자의, 아니 인간의 창의성과 담대함이 얼마나 원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크레이그 벤터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핑을 즐기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좋아하는 수영을 실컷 하기 위해 해군 수영팀에 입대했으나 수영팀은 곧 해체되고 말았다. 그는 수영 대신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다낭의 야전병원에서 위생병으로 일했다.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목격한 수천 명의 죽음은 한 젊은이의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CNN TV와의 인터뷰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절감했고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생명의 소중함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택한 분야는 휴먼 바이올로지(인간생물학)였다. 1968년 베트남에서 돌아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샌디에이고 캠퍼스에 입학한 벤터는 6년 만에 학부와 생화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보통 10년 이상 걸리는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해 버린 것이다.



    국립보건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한 벤터는 1990년대 초, 단시간 내에 수백 개의 유전자를 발견할 수 있는 EST란 기술을 개발했다. 벤터는 이 기술로 발견한 유전자에 특허를 출원하는 돌출적인 행동을 했다(미국은 유럽과 달리 발명뿐만 아니라 발견에도 특허를 부여한다). 국립보건연구소 소장인 버나딘 힐리 박사는 벤터의 특허 출원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독창적 발명이 아닌 기존 사실의 발견에 특허를 출원하는 것은 과학자의 도의가 아니라는 반론이 당시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제임스 왓슨 박사에 의해 제기되었다. 왓슨은 1953년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수상한 탁월한 과학자였다.

    학계의 대선배 왓슨에게 ‘대들었던’ 경력은 벤터에게도 치명적인 결함으로 남았다. 왓슨이 특허 논란으로 게놈 프로젝트 팀을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프랜시스 콜린스가 임명되자 동료들은 벤터를 사기꾼, 허풍쟁이라고 부르며 따돌리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유전자를 발견하려는 벤터의 야심찬 연구계획서는 제출하는 족족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쫓기듯이 국립보건연구소를 떠나야만 했다.

    국립보건연구소의 ‘왕따’ 사건은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었다. 벤처사업가로 변신한 벤터는 1998년 미국 외 18개국이 연합해서 진행중이던 게놈 프로젝트를 앞지를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이오 벤처기업 셀레라 제노믹스를 세웠다. 이때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8년이나 늦게 게놈 프로젝트에 뛰어든 셀레라 제노믹스는 시간과 인원의 열세 속에서 2년 만에 18개국 과학자들과 미 국립보건연구소를 추월하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어떻게 이런 ‘불가능한 작전’이 가능했을까. 벤터는 슈퍼 컴퓨터를 사용하는 ‘샷건(Shotgun) 방식’으로 게놈 프로젝트에 접근했다. 이 방식은 유진 마이어라는 컴퓨터 전문가가 개발한 것이다. 바이오 인포메틱스 분야의 개척자인 마이어는 셀레라 제노믹스에 스카우트되어 게놈 프로젝트의 컴퓨터 분석을 지휘했다.

    인간 유전자의 해독 방법을 서울시민 전체의 주소록을 만드는 것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 18개국 연합 과학자들과 국립보건연구소가 사용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 개의 퍼즐조각(유전자에 해당)으로 나뉜 서울시의 지도(게놈에 해당) 부분들이 어느 구, 어느 동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찾는다. 모든 조각들을 서울시 지도에 짜맞춘 뒤 각 조각의 상세한 주소록을 작성한다. 반면, 셀레라 제노믹스는 각각의 조각이 어느 구 어느 동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찾는 과정을 생략하고 무작위로 조각들을 선정해 주소를 작성했다. 퍼즐조각들을 전체 지도에 맞추는 과정은 슈퍼 컴퓨터에 맡겼다. “1년이 걸리던 일을 우리는 한 주일 만에 할 수 있다”던 벤터의 장담대로 슈퍼 컴퓨터는 국립보건연구소의 연구성과를 간단히 따라잡아 버렸다.

    국립보건연구소는 게놈 프로젝트에 10년을 소비했다. 벤터의 샷건 방식은 기존의 연구시간을 5분의 1로 단축시켰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다. 하지만 샷건 방식은 수많은 유전자들의 조각을 짜맞추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벤터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샷건 방식을 택했다. 이 점에서 그는 뛰어난 과학자인 동시에 대담한 사업가인 셈이다. 국립보건연구소의 방식은 정확도에서는 분명 벤터를 앞선다. 속도 경쟁에서는 벤터가 승리했지만 향후의 승리는 아직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학계로부터 거부당한 좌절감, 그리고 경쟁심리가 불러일으킨 열정’이 벤터를 이끈 원동력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대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의 벤터는 ‘바이오 산업을 지배하는 두 명의 왕’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을 꼽은 비즈니스 위크의 기사에 대해 “왕은 나 한 사람뿐이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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