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지역할거정치의 벽에 도전해온 민주당 노무현부총재가 ‘4·13총선’에서 낙마했다.
그는 한국정치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다. 그만큼 낙선을 거듭하고도 유명세와 지지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치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낙선은 오히려 훈장이었던 셈이다.
YS(김영삼전대통령)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초선의원이었던 그는 91년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가지 않았다가 92년 14대 총선에서 떨어졌다. 95년 ‘6·27지방선거’ 때는 민주당후보로 부산시장에 도전했다가 분루를 삼켰다. 이후 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어렵게 금배지를 달았지만 16대총선을 앞두고 다시 부산 북-강서을로 선거구를 옮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배를 마셨다. 더욱이 그로서는 이번 부산 출마가 차기대권 도전까지 염두에 둔 회심작이었기 때문에 패배의 충격이 더욱 큰 듯했다. 그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선거 바로 다음날인 4월14일 저녁 부산 북구 덕천동 자택에서 노부총재를 만났다. 까맣게 변한 얼굴은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었다.
개표일인 지난 13일 오후 6시 어디에 있었나. 방송의 출구조사 발표는 보았나.
“집에 있었다. TV를 돌려가면서 봤다.”
낙선으로 나왔을텐데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나.
“‘졌구나’ 생각하고 너무 놀랐다.”
낙선하리라는 생각을 안했나.
“해본 적이 없었다.
” 한나라당의 아성으로 불리는 부산에 민주당후보로 출마했는데 낙선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안했다는 말인가.
“경험적으로 여론조사는 정확한 과학이라고 믿고 있다. 한국갤럽과 또 하나의 여론조사기관의 여러 차례 반복된 조사 결과를 봐왔는데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앞섰다.”
마지막 조사는 언제 한 것인가.
“4월10일에 한 것인데 상대보다 8% 정도 앞섰다. 오차범위는 4%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95년 부산시장선거 때에도 여론조사에서는 우세를 보였으나, 실제 결과는 낙선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때는 처음 한번 앞선 뒤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동표까지 정리돼 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부동표가 30%에서 40%대로 증가했다가 10%수준으로 줄었지만 내가 계속 앞섰다. 상대후보와의 격차는 4, 5%에서 출발해서 7.2, 8%로 점차 늘어났다.”
그럼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었다는 얘기인가.
“나중에 보니까 마지막날(4월12일) 분위기가 안좋았던 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다. ‘왜 이때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하느냐’는 게 주였다. 그때는 예사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회담 발표로 인한 영남유권자의 견제심리를 패인으로 보는 것 같다.
“아니면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강서구의 대저동 명지동 강동동은 지역구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지역인데 내가 9, 10% 지고 있었다. 녹산동 가락동 천가동은 10% 지역인데 팽팽했다. 나머지 60% 지역은 내가 거의 20%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개표결과는 지역차이 없이 15∼20% 진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이 여론조사까지는 이성적 판단을 했는데 막판에 견제심리가 발동한 것 같다.”
선거 패배를 확인한 뒤 어제 오늘(13~14일)에는 무엇을 했나.
“어젯밤(13일) 12시에 지구당에 나갔다. 사람들에게 할말도 없고…(이 대목에서 그는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잊어버리자’고 했다. 오늘(14일) 4개 사무소를 한바퀴 돌면서 해단식을 했다. 그리고 ‘길게 보면 민심이라는 것이 천심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역사의 흐름이지만 한 시기 한 순간 거꾸로 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 다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믿자. 그냥 한번의 선거로 받아들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울과는 연락이 없었나.
“오늘(14일) 오후에 김대중대통령에게 전화를 드려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 대통령은 “다 그리 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셨다. 항상 대통령이 딱딱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목소리에서는 아주 애석해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선거에 진 후 ‘나는 부산을 택했는데 부산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런 게 아니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부산 사람들이 새로운 선택을 할 준비가 돼 있는데도 선택할 만한 정치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래서 부산에 내려왔는데 아직 부산 사람들이 준비가 안돼있던 것 같다.’”
정말 유권자들의 선택에 불만이 없나.
“유권자들의 선택에 대해 할말이 없다. 옛날에 충신은 임금한테 듣기 싫은 소리를 한참 하다가 귀양을 가고, 귀양을 가면 아침마다 북쪽을 보고 절을 했다. 그래야 충신이었다. 지금은 임금의 자리에 국민이 올라가 앉아 있다. 그런데 감히 내가 어떻게 섭섭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금에게 ‘직간(直諫)한다’ ‘충간(忠諫)한다’는 말은 있다. 내가 부산에서 출마한 것은 어떤 의미에선 직간-충간으로 볼 수 있다.”
부산 출마의 뜻을 굳힌 계기는 무엇인가.
“99년 1월 한나라당의 마산집회를 보고 결정했다. 이회창총재가 남의 동네에 와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도대체 저렇게 정치할 수가 있나. 맞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보면 ‘투지’가 생기나.
“이런 것도 있었다. 나와 이인제 김근태씨 등이 차기 경쟁선상에 있는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을 통해 좀더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거운동은 어떤 식으로 했나.
“9월부터 국회에서 회의가 없는 날은 지역구에서 살았다. 11월말부터는 국회에서 표결이 없는 날에는 회의가 있어도 안가고 지역구를 누볐다. 지역에 표가 좀 있다는 사람은 모두 만났다. 그리고 동네마다 민원 해결을 안한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다녔다.
선거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 평가하나. 과거 선거 때와 비교해달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지역을 누비고 조직을 꾸린 적이 없었다.”
당선자가 된 한나라당 허태열후보를 어떻게 보나.
“보통의 후보였다. 대중적 지명도나 대중연설, 살아온 밑천은 내가 훨씬 강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그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쪽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DJ가 부산경제를 죽이려고 삼성자동차와 금융기관을 문닫게 했다고 주장했다. 4월2일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살림살이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렇죠? 더 나아지신 분 계십니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아! 저기 몇 분 계시네요. 혹시 전라도에서 오신 것 아닙니까? 하하 농담입니다.’”
민주당 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이인제선대위원장, 김근태 노무현부총재 등 세 사람을 꼽는 이른바 ‘50대 트로이카’라는 표현에 동의하나.
“대선이 불과 2년 남았다. 세 사람이 가장 유력하게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을 것이다.”
노부총재가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낙선했다. 그 때문에 트로이카 구도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지 않나.
“아무래도 나한테 불리해진 게 아니겠는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없어서 지금은 전망도 잘 할 수가 없다.”
김부총재를 어떻게 평가하나.
“인품에 대해서 존경하고 역량에 대해서도 신뢰하고 있다. 그의 후원회에 가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토대로 해서 철학과 전략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이위원장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를 보는 눈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의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냐는 데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인제씨는 3당 통합을 따라간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나와는 길이 다르다.”
앞으로의 계획은.
“선거는 인간을 너무 피폐하게 만든다. 당분간 정말 쉬고 싶다.”
그는 한국정치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다. 그만큼 낙선을 거듭하고도 유명세와 지지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치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낙선은 오히려 훈장이었던 셈이다.
YS(김영삼전대통령)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초선의원이었던 그는 91년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가지 않았다가 92년 14대 총선에서 떨어졌다. 95년 ‘6·27지방선거’ 때는 민주당후보로 부산시장에 도전했다가 분루를 삼켰다. 이후 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어렵게 금배지를 달았지만 16대총선을 앞두고 다시 부산 북-강서을로 선거구를 옮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배를 마셨다. 더욱이 그로서는 이번 부산 출마가 차기대권 도전까지 염두에 둔 회심작이었기 때문에 패배의 충격이 더욱 큰 듯했다. 그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선거 바로 다음날인 4월14일 저녁 부산 북구 덕천동 자택에서 노부총재를 만났다. 까맣게 변한 얼굴은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었다.
개표일인 지난 13일 오후 6시 어디에 있었나. 방송의 출구조사 발표는 보았나.
“집에 있었다. TV를 돌려가면서 봤다.”
낙선으로 나왔을텐데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나.
“‘졌구나’ 생각하고 너무 놀랐다.”
낙선하리라는 생각을 안했나.
“해본 적이 없었다.
” 한나라당의 아성으로 불리는 부산에 민주당후보로 출마했는데 낙선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안했다는 말인가.
“경험적으로 여론조사는 정확한 과학이라고 믿고 있다. 한국갤럽과 또 하나의 여론조사기관의 여러 차례 반복된 조사 결과를 봐왔는데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앞섰다.”
마지막 조사는 언제 한 것인가.
“4월10일에 한 것인데 상대보다 8% 정도 앞섰다. 오차범위는 4%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95년 부산시장선거 때에도 여론조사에서는 우세를 보였으나, 실제 결과는 낙선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때는 처음 한번 앞선 뒤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동표까지 정리돼 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부동표가 30%에서 40%대로 증가했다가 10%수준으로 줄었지만 내가 계속 앞섰다. 상대후보와의 격차는 4, 5%에서 출발해서 7.2, 8%로 점차 늘어났다.”
그럼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었다는 얘기인가.
“나중에 보니까 마지막날(4월12일) 분위기가 안좋았던 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다. ‘왜 이때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하느냐’는 게 주였다. 그때는 예사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회담 발표로 인한 영남유권자의 견제심리를 패인으로 보는 것 같다.
“아니면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강서구의 대저동 명지동 강동동은 지역구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지역인데 내가 9, 10% 지고 있었다. 녹산동 가락동 천가동은 10% 지역인데 팽팽했다. 나머지 60% 지역은 내가 거의 20%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개표결과는 지역차이 없이 15∼20% 진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이 여론조사까지는 이성적 판단을 했는데 막판에 견제심리가 발동한 것 같다.”
선거 패배를 확인한 뒤 어제 오늘(13~14일)에는 무엇을 했나.
“어젯밤(13일) 12시에 지구당에 나갔다. 사람들에게 할말도 없고…(이 대목에서 그는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잊어버리자’고 했다. 오늘(14일) 4개 사무소를 한바퀴 돌면서 해단식을 했다. 그리고 ‘길게 보면 민심이라는 것이 천심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역사의 흐름이지만 한 시기 한 순간 거꾸로 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 다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믿자. 그냥 한번의 선거로 받아들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울과는 연락이 없었나.
“오늘(14일) 오후에 김대중대통령에게 전화를 드려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 대통령은 “다 그리 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셨다. 항상 대통령이 딱딱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목소리에서는 아주 애석해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선거에 진 후 ‘나는 부산을 택했는데 부산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런 게 아니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부산 사람들이 새로운 선택을 할 준비가 돼 있는데도 선택할 만한 정치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래서 부산에 내려왔는데 아직 부산 사람들이 준비가 안돼있던 것 같다.’”
정말 유권자들의 선택에 불만이 없나.
“유권자들의 선택에 대해 할말이 없다. 옛날에 충신은 임금한테 듣기 싫은 소리를 한참 하다가 귀양을 가고, 귀양을 가면 아침마다 북쪽을 보고 절을 했다. 그래야 충신이었다. 지금은 임금의 자리에 국민이 올라가 앉아 있다. 그런데 감히 내가 어떻게 섭섭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금에게 ‘직간(直諫)한다’ ‘충간(忠諫)한다’는 말은 있다. 내가 부산에서 출마한 것은 어떤 의미에선 직간-충간으로 볼 수 있다.”
부산 출마의 뜻을 굳힌 계기는 무엇인가.
“99년 1월 한나라당의 마산집회를 보고 결정했다. 이회창총재가 남의 동네에 와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도대체 저렇게 정치할 수가 있나. 맞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보면 ‘투지’가 생기나.
“이런 것도 있었다. 나와 이인제 김근태씨 등이 차기 경쟁선상에 있는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을 통해 좀더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거운동은 어떤 식으로 했나.
“9월부터 국회에서 회의가 없는 날은 지역구에서 살았다. 11월말부터는 국회에서 표결이 없는 날에는 회의가 있어도 안가고 지역구를 누볐다. 지역에 표가 좀 있다는 사람은 모두 만났다. 그리고 동네마다 민원 해결을 안한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다녔다.
선거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 평가하나. 과거 선거 때와 비교해달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지역을 누비고 조직을 꾸린 적이 없었다.”
당선자가 된 한나라당 허태열후보를 어떻게 보나.
“보통의 후보였다. 대중적 지명도나 대중연설, 살아온 밑천은 내가 훨씬 강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그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쪽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DJ가 부산경제를 죽이려고 삼성자동차와 금융기관을 문닫게 했다고 주장했다. 4월2일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살림살이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렇죠? 더 나아지신 분 계십니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아! 저기 몇 분 계시네요. 혹시 전라도에서 오신 것 아닙니까? 하하 농담입니다.’”
민주당 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이인제선대위원장, 김근태 노무현부총재 등 세 사람을 꼽는 이른바 ‘50대 트로이카’라는 표현에 동의하나.
“대선이 불과 2년 남았다. 세 사람이 가장 유력하게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을 것이다.”
노부총재가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낙선했다. 그 때문에 트로이카 구도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지 않나.
“아무래도 나한테 불리해진 게 아니겠는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없어서 지금은 전망도 잘 할 수가 없다.”
김부총재를 어떻게 평가하나.
“인품에 대해서 존경하고 역량에 대해서도 신뢰하고 있다. 그의 후원회에 가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토대로 해서 철학과 전략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이위원장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를 보는 눈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의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냐는 데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인제씨는 3당 통합을 따라간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나와는 길이 다르다.”
앞으로의 계획은.
“선거는 인간을 너무 피폐하게 만든다. 당분간 정말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