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김대중대통령의 구상이 ‘베를린 선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물론 북한 당국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정부가 북한의 농업구조개선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직접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대북 정책의 전환점으로도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 대북 제안을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위원장 앞으로 전달한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이며 ‘편법’이라는 점에서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번 베를린선언은 남북 당국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박재규 통일부장관 명의로 된 공식서한을 ‘민간단체’인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에 전달했다. 정부의 공식 서한을 민간단체에 전달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김용순은 조선노동당 비서, 조평통 부위원장 등 여러 직함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민간단체’ 성격을 강조하는 아태평화위원장 직함을 선택해 공문을 수령토록 한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에 대해 양영식 통일부차관은 “북한의 민간단체와 당국을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아태평화위원회를 통일부와 상대할 만한 기구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의 태도는 남북경협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정부는 98년 현대그룹이 북한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관광사업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아태평화위원회가 아닌 ‘북한 당국’의 보증을 요구했었다. 이로 인해 현대는 북한 백학림 사회안전상(한국의 경찰청장과 유사한 직책)으로부터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받아오는 등 별도의 ‘공’을 들여야 했다. 따라서 정부가 아태평화위원회를 정부의 상대기구로 ‘격상’시켜 준 것은 향후 민간경협에서도 북한 아태평화위원회가 발행한 ‘문서’를 사업승인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만들 수 있는 근거를 남긴 것이다.
정부는 북한이 아태평화위원회를 민간단체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 농구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한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민간 행사에 왜 정부가 끼여드느냐”며 정부 대표로 참석한 양영식 통일부차관을 끝까지 외면했었다. 이로 인해 이번 대북 제안의 전달과정에서 정부가 ‘북한 당국’과 사전 협의를 갖고 북한측의 요구에 따라 아태평화위원회를 카운터파트로 정하지 않았느냐는 추론도 제기된다. 공식적인 당국간 접촉을 꺼리는 북한이 “아태평화 위원회와 협의한다면 남한과도 만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정부로서도 고민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과거 통일부의 카운터파트이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이 최근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인데 도대체 누구에게 전달하란 말이냐”며 전달경로를 선정하는 데 고충이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북한과 일본의 수교교섭을 위한 예비회담 과정에서도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실질적인 중계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은 당시 김용순의 직함을 노동당 비서로 밝히고, 일본의 정당 대표단과 북한의 노동당 대표단의 회담진행 소식을 전했었다는 점을 정부는 간과하는 것 같다.
이번 베를린선언은 묘하게도 지난 95년 김영삼전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유사점이 많다. 집권 2년차를 지난 시점, 통일독일의 중심지인 베를린이라는 장소, 대북 지원과 협력의사를 강조한 대북 제의 내용 등이 YS 때와 흡사하다. 분단국가의 대통령으로서 통일국가를 방문한 대통령의 진한 감동이 이같은 절차상의 무리를 가져오게 하지 않았느냐는 게 북한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시각이다.
95년 베를린선언 후 김전대통령은 쌀 15만t의 대북지원을 선언했으나(95년 6월), 씨아펙스호의 인공기 게양사건(6월29일)과 삼선비너스호의 선원 억류사건(8월2일)이라는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 북한은 당시 협상대표인 전금철이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이었다는 점을 들먹이며 회담 개최 사실조차도 부인했었다. 이번 대북 제안을 아태평화위원회라는 ‘민간단체’에 전달한 정부의 선택에 대한 걱정도 바로 이같은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 대북 제안을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위원장 앞으로 전달한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이며 ‘편법’이라는 점에서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번 베를린선언은 남북 당국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박재규 통일부장관 명의로 된 공식서한을 ‘민간단체’인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에 전달했다. 정부의 공식 서한을 민간단체에 전달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김용순은 조선노동당 비서, 조평통 부위원장 등 여러 직함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민간단체’ 성격을 강조하는 아태평화위원장 직함을 선택해 공문을 수령토록 한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에 대해 양영식 통일부차관은 “북한의 민간단체와 당국을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아태평화위원회를 통일부와 상대할 만한 기구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의 태도는 남북경협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정부는 98년 현대그룹이 북한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관광사업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아태평화위원회가 아닌 ‘북한 당국’의 보증을 요구했었다. 이로 인해 현대는 북한 백학림 사회안전상(한국의 경찰청장과 유사한 직책)으로부터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받아오는 등 별도의 ‘공’을 들여야 했다. 따라서 정부가 아태평화위원회를 정부의 상대기구로 ‘격상’시켜 준 것은 향후 민간경협에서도 북한 아태평화위원회가 발행한 ‘문서’를 사업승인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만들 수 있는 근거를 남긴 것이다.
정부는 북한이 아태평화위원회를 민간단체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 농구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한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민간 행사에 왜 정부가 끼여드느냐”며 정부 대표로 참석한 양영식 통일부차관을 끝까지 외면했었다. 이로 인해 이번 대북 제안의 전달과정에서 정부가 ‘북한 당국’과 사전 협의를 갖고 북한측의 요구에 따라 아태평화위원회를 카운터파트로 정하지 않았느냐는 추론도 제기된다. 공식적인 당국간 접촉을 꺼리는 북한이 “아태평화 위원회와 협의한다면 남한과도 만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정부로서도 고민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과거 통일부의 카운터파트이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이 최근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인데 도대체 누구에게 전달하란 말이냐”며 전달경로를 선정하는 데 고충이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북한과 일본의 수교교섭을 위한 예비회담 과정에서도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실질적인 중계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은 당시 김용순의 직함을 노동당 비서로 밝히고, 일본의 정당 대표단과 북한의 노동당 대표단의 회담진행 소식을 전했었다는 점을 정부는 간과하는 것 같다.
이번 베를린선언은 묘하게도 지난 95년 김영삼전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유사점이 많다. 집권 2년차를 지난 시점, 통일독일의 중심지인 베를린이라는 장소, 대북 지원과 협력의사를 강조한 대북 제의 내용 등이 YS 때와 흡사하다. 분단국가의 대통령으로서 통일국가를 방문한 대통령의 진한 감동이 이같은 절차상의 무리를 가져오게 하지 않았느냐는 게 북한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시각이다.
95년 베를린선언 후 김전대통령은 쌀 15만t의 대북지원을 선언했으나(95년 6월), 씨아펙스호의 인공기 게양사건(6월29일)과 삼선비너스호의 선원 억류사건(8월2일)이라는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 북한은 당시 협상대표인 전금철이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이었다는 점을 들먹이며 회담 개최 사실조차도 부인했었다. 이번 대북 제안을 아태평화위원회라는 ‘민간단체’에 전달한 정부의 선택에 대한 걱정도 바로 이같은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