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의 꿈’을 안고 처녀출항했던 69t급 소형선망어선 BS22호가 12월2일 오전 부산시 남항에 들어왔다. 선원들은 부지런히 잡은 고기를 부두로 올렸다. 궤짝이 금새 쌓여 3000여개까지 불어났다. 그리 나쁘지 않은 어획량이었다. 그러나 선원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양만 많으면 뭐하노. 한짝에 7000원짜리 방어밖에 없다카이. 기름값이나 빠지것나.”
한 선원이 퉁명스레 뱉어내는 말엔 첫 출항에 대한 실망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이 배 옆에 정박한 198t급 대형선망운반선 BS21호는 고등어 하역을 막 끝냈다. 한 궤짝에 2만원을 받고 팔았지만 양은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배의 성기진 조기장은 “올해는 물때도 안맞는지 잡아봤자 사료로나 쓰는 갈고등어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지 1년이 되어 가는 요즘 부산항에 고기가 안들어온다. 어획량 감소는 어민들의 ‘운명’을 양분했다. 살림이 거덜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어민들이 숱하게 나오는가 하면 어업을 포기해 떼돈을 번 사람도 생겨났다.
‘파산’ 아니면 ‘노다지 공돈’. 한국의 수산업은 이 사이에서 난파하는 배처럼 비틀대고 있다.
전국어민총연합 김광룡사무처장은 금년 1월22일 한일어업협정 발효 후 1년 동안 바다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일본수역 내 조업은 까다로운 입어조건까지 겹쳐 확보된 쿼터량의 17%만 따오고 있다. 큰 배들이 일본주변 황금어장에서 사실상 내쫓긴 것이다. 그러자 이 배들이 한반도 연근해로 몰렸다. 바다가 미어터질 지경이 됐다. 제살깎기 경쟁이 벌어졌다. 남이 채낚이 낚싯대를 올려놓은 곳에 통발을 치는가 하면 가자미를 잡던 배가 오징어 어장에 뛰어들었다. 쌍끌이-외끌이 등 17개 업종으로 구분돼 있던 어선들이 고기떼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업종 파괴 바람’이 분 것이다. 고기가 잘 잡힐 리 없다. 이런 상태가 1년 동안 계속됐다. 버틸 만큼 버티다 어민들이 하나 둘씩 손을 들고 있다.”
부산공동어시장의 9월 위판물량은 2만9000여t. 지난해 같은 기간의 71%에 불과한 수준이다. 위판금액으론 67%에 그쳤다. 고등어(지난해 물량의 59%), 참조기(64%), 갈치(61%) 등 고급 생선은 안잡히고 오징어(148%)만 풍년이었다. 그러나 오징어 가격은 지난해의 70% 수준까지 폭락했다.
부족분은 수입수산물이 채웠다. 부산 세관에 따르면 1∼8월까지 수산물 수입량은 4억6684만달러. 지난해 같은 기간 수입량의 208%에 이른다.
한일어업협정에 따른 수산업의 피해규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부산시는 1412억원, 수협중앙회 수산경제연구원은 5000억원, 한나라당은 무려 1조7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어업협상 주무부서였던 해양수산부가 조사한 피해 규모는 8000억원 정도. 한일어업협상 직전인 지난해 말 해양수산부가 내놓은 예상피해규모 1390억원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금액이다. 해양수산부는 어민실직자 수를 2만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전국어민총연합의 유종구회장은 오징어채낚이어선인 ‘한일어업협정 백지화호’의 선주다. 그가 11월 한달간 바다에서 조업한 결과는 참담했다. 기름값 1050만원, 어구비 1000만원 등 4000만원의 ‘출어 경비’가 들어 갔는데 수입은 2000여만원에 불과했다. 유회장은 지난 1년간 순식간에 2억원의 빚을 졌다. 그는 최근 한일어협 무효를 주장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냈다.
선주 이상득씨도 고급어종은 안잡히고 오징어나 멸치값은 폭락해 1년만에 망한 경우다. 마지막 ‘한방’을 노린 그는 배도 수선하고 어구도 새로 마련했다. 그러나 기름값을 구하지 못해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는 배도 가족도 다 버리고 자취를 감췄다.
선원들은 대개 판매수익을 일정비율로 나눠 급여를 받는다. 밑지는 장사가 태반인 요즘 월 20만∼30만원 받고 일하는 선원들이 많다. 이들은 공공근로사업 등 정부의 실업대책에서도 소외돼 있다.
계속되는 저임금을 견디다 못해 선원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유종구회장의 배에서 일하고 있는 이모씨(42)는 1년여 동안 생계유지조차 힘들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아야 했다. 부인은 결국 가출했다. 그는 지금 배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부산 남항 근처 20여개 여인숙은 가족과 재산을 잃은 뱃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다. 이곳의 월 16만원짜리 방은 40, 50대 선원들로 만원이다. 물때가 되어 배가 일제히 출항하면 여인숙은 텅텅 빈다. 11월25일 남항에 정박한 한 범선 위에서 선원 강신재씨(45)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때 선주로 잘 나가던 그는 어획량 감소로 배를 잃고 선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부인과 헤어져 남항부근 S여인숙으로 흘러들어 왔다. 여인숙 주인은 “강씨는 매일 술을 마시다 병이 들었다”고 말했다. 강신재씨는 사망 당시 숙박료 45만원도 밀린 상태였다.
어민 24%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
부산 남항엔 채낚이-선망-상어유자망-연승-트롤-쌍끌이-외끌이어선 등이 출입한다. 최근엔 항구에 붙박이처럼 장기 정박하는 배들이 부쩍 늘었다. 바다로 나가봤자 기름값도 안나올 것이 뻔해 아예 조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12월1일 남항 앞 소형 어선의 갑판 위에 선주 겸 선장 정종순씨(65)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배 위에서 하루종일 바다나 보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과다. 보름 전 그는 거제도 방면으로 출항했다. 한일어업협정 이후 대마도어장 접근이 봉쇄되자 궁여지책으로 가본 것이다. 그는 “4일 동안 50만원어치를 건져올렸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정씨는 아예 출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수협에 4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데 현재로선 갚을 능력이 없다.
장어와 꽃게잡이 어민들은 정씨와 거의 비슷한 운명이다. 한일어협 이전 장어-꽃게로는 경남 통영이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이곳은 서일본어장이 날아가면서 업종 자체가 멸망했다. 통발어선 230여척 중 장어와 꽃게통발 92척이 조업을 포기했다. 경남 사천시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사천지역 2300여어선 중 70%가 어획고 감소로 출어하지 않고 있다. 4500여 선원이 일손을 놓았고 이 지역 수산업 종사자 5162세대의 24%에 이르는 1250세대가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했다.
소형어선 선장 남영식씨는 고등학생인 딸의 학비도 대지 못할 지경이다. 지난해 동해의 황금어장 대화퇴와 동지나해의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험한 파도와 싸워가며 ‘그물 한방’으로 수백∼수천만원을 벌던 기억이 꿈만 같다. 남씨는 이젠 더이상 동지나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빚에 쪼들려 배를 수협과 새마을금고에 차압당했기 때문이다.
동지나해에서 보름 전 돌아온 기관장 이종건씨의 월수입은 60만원 정도. 가족을 볼 낯이 없다. 이씨의 동료선원들은 일을 그만두면 퇴직금은 고사하고 그동안 끌어다 쓴 돈을 회사에 값아야 하는 처지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러나 요즘 항구에선 이런 모습과는 정반대의 ‘요지경’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부산소재 수산물냉동회사인 D물산의 이모전무는 최근 한 모임에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한 선주가 트롤어선 감척보상신청을 냈는데 보상금으로 20여억원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 선주는 “헌 배 내주고 이만한 현금이 들어왔으니 노다지를 캔 것이나 다름없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른 트롤저인망어선의 선주도 감척신청을 했다. 그의 뱃값은 7억원. 그는 여기에 웃돈을 얹어 13억원을 보상받게 됐다.
해양수산부는 뱃값에다 3년치 순소득의 90%를 손실지원금 명목으로 선주들에게 주는 감척보상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한일어협으로 어장이 좁아진 만큼 어선수를 줄여 경쟁력을 키우려는 목적이다. 지금까지 들어 온 감척신청 선박수는 744척. 2004년까지 우리나라 어선의 26%가 감척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744척에 대한 실사 결과 당초 잡아놓은 감척지원용 예산 1555억원은 턱없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사작업에 참여한 K씨는 “감척지원금으로 투입되는 비용이 무려 34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해양수산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K씨는 자신이 직접 보상명세 산정과정을 확인해 본 결과 보상금이 상당히 부풀려 있었다고 말했다. 고기가 안잡혀 감척신청을 했다는 배가 지난 3년간 막대한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해양 수산부는 올해 말까지 감척지원금을 모두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감척사업에는 문제가 적지 않다. 그냥 놔둬도 퇴출될 배에 국민세금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안겨다 준다는 건 재검토돼야 한다. 감척사업은 남아 있는 어선들의 재기의욕을 꺾는 부작용도 야기한다. 해양수산부는 ‘97년 이후 일본수역에서 조업실적이 있는 배’로 감척보상자격을 정했다. 감척보상자격이 있는 배들 대부분은 바다에 나가 어장을 개척하기보다는 아예 출어를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감척자격이 안되는 소형 어선들 사이에선 ‘한일어협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영세 어민’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돼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다.”(부경대 김병호교수)
전문가들은 “감척사업을 지금보다 훨씬 엄격히 시행하라”고 주장한다. 대신 조업중인 어선이 배의 규모를 줄여 고정비용을 감축할 수 있도록 유도하라는 주문이다. 조업어선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부경대 이상고교수는 “수산정책은 내년의 한일어업협상-한중어업협상-해외어장개척-어자원보호사업을 통해 ‘어장’을 실질적으로 늘리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래야 수산업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2월 초순은 예년 같으면 고기 물때가 다시 열리는 ‘풍어기’(豊漁期)다. 그러나 어민들은 항구에 배를 동여맨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들이 다시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가게 되는 날은 언제일까.
한 선원이 퉁명스레 뱉어내는 말엔 첫 출항에 대한 실망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이 배 옆에 정박한 198t급 대형선망운반선 BS21호는 고등어 하역을 막 끝냈다. 한 궤짝에 2만원을 받고 팔았지만 양은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배의 성기진 조기장은 “올해는 물때도 안맞는지 잡아봤자 사료로나 쓰는 갈고등어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지 1년이 되어 가는 요즘 부산항에 고기가 안들어온다. 어획량 감소는 어민들의 ‘운명’을 양분했다. 살림이 거덜나고 가정이 해체되는 어민들이 숱하게 나오는가 하면 어업을 포기해 떼돈을 번 사람도 생겨났다.
‘파산’ 아니면 ‘노다지 공돈’. 한국의 수산업은 이 사이에서 난파하는 배처럼 비틀대고 있다.
전국어민총연합 김광룡사무처장은 금년 1월22일 한일어업협정 발효 후 1년 동안 바다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일본수역 내 조업은 까다로운 입어조건까지 겹쳐 확보된 쿼터량의 17%만 따오고 있다. 큰 배들이 일본주변 황금어장에서 사실상 내쫓긴 것이다. 그러자 이 배들이 한반도 연근해로 몰렸다. 바다가 미어터질 지경이 됐다. 제살깎기 경쟁이 벌어졌다. 남이 채낚이 낚싯대를 올려놓은 곳에 통발을 치는가 하면 가자미를 잡던 배가 오징어 어장에 뛰어들었다. 쌍끌이-외끌이 등 17개 업종으로 구분돼 있던 어선들이 고기떼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업종 파괴 바람’이 분 것이다. 고기가 잘 잡힐 리 없다. 이런 상태가 1년 동안 계속됐다. 버틸 만큼 버티다 어민들이 하나 둘씩 손을 들고 있다.”
부산공동어시장의 9월 위판물량은 2만9000여t. 지난해 같은 기간의 71%에 불과한 수준이다. 위판금액으론 67%에 그쳤다. 고등어(지난해 물량의 59%), 참조기(64%), 갈치(61%) 등 고급 생선은 안잡히고 오징어(148%)만 풍년이었다. 그러나 오징어 가격은 지난해의 70% 수준까지 폭락했다.
부족분은 수입수산물이 채웠다. 부산 세관에 따르면 1∼8월까지 수산물 수입량은 4억6684만달러. 지난해 같은 기간 수입량의 208%에 이른다.
한일어업협정에 따른 수산업의 피해규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부산시는 1412억원, 수협중앙회 수산경제연구원은 5000억원, 한나라당은 무려 1조7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어업협상 주무부서였던 해양수산부가 조사한 피해 규모는 8000억원 정도. 한일어업협상 직전인 지난해 말 해양수산부가 내놓은 예상피해규모 1390억원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금액이다. 해양수산부는 어민실직자 수를 2만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전국어민총연합의 유종구회장은 오징어채낚이어선인 ‘한일어업협정 백지화호’의 선주다. 그가 11월 한달간 바다에서 조업한 결과는 참담했다. 기름값 1050만원, 어구비 1000만원 등 4000만원의 ‘출어 경비’가 들어 갔는데 수입은 2000여만원에 불과했다. 유회장은 지난 1년간 순식간에 2억원의 빚을 졌다. 그는 최근 한일어협 무효를 주장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냈다.
선주 이상득씨도 고급어종은 안잡히고 오징어나 멸치값은 폭락해 1년만에 망한 경우다. 마지막 ‘한방’을 노린 그는 배도 수선하고 어구도 새로 마련했다. 그러나 기름값을 구하지 못해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는 배도 가족도 다 버리고 자취를 감췄다.
선원들은 대개 판매수익을 일정비율로 나눠 급여를 받는다. 밑지는 장사가 태반인 요즘 월 20만∼30만원 받고 일하는 선원들이 많다. 이들은 공공근로사업 등 정부의 실업대책에서도 소외돼 있다.
계속되는 저임금을 견디다 못해 선원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유종구회장의 배에서 일하고 있는 이모씨(42)는 1년여 동안 생계유지조차 힘들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아야 했다. 부인은 결국 가출했다. 그는 지금 배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부산 남항 근처 20여개 여인숙은 가족과 재산을 잃은 뱃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다. 이곳의 월 16만원짜리 방은 40, 50대 선원들로 만원이다. 물때가 되어 배가 일제히 출항하면 여인숙은 텅텅 빈다. 11월25일 남항에 정박한 한 범선 위에서 선원 강신재씨(45)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때 선주로 잘 나가던 그는 어획량 감소로 배를 잃고 선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부인과 헤어져 남항부근 S여인숙으로 흘러들어 왔다. 여인숙 주인은 “강씨는 매일 술을 마시다 병이 들었다”고 말했다. 강신재씨는 사망 당시 숙박료 45만원도 밀린 상태였다.
어민 24%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
부산 남항엔 채낚이-선망-상어유자망-연승-트롤-쌍끌이-외끌이어선 등이 출입한다. 최근엔 항구에 붙박이처럼 장기 정박하는 배들이 부쩍 늘었다. 바다로 나가봤자 기름값도 안나올 것이 뻔해 아예 조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12월1일 남항 앞 소형 어선의 갑판 위에 선주 겸 선장 정종순씨(65)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배 위에서 하루종일 바다나 보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과다. 보름 전 그는 거제도 방면으로 출항했다. 한일어업협정 이후 대마도어장 접근이 봉쇄되자 궁여지책으로 가본 것이다. 그는 “4일 동안 50만원어치를 건져올렸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정씨는 아예 출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수협에 4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데 현재로선 갚을 능력이 없다.
장어와 꽃게잡이 어민들은 정씨와 거의 비슷한 운명이다. 한일어협 이전 장어-꽃게로는 경남 통영이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이곳은 서일본어장이 날아가면서 업종 자체가 멸망했다. 통발어선 230여척 중 장어와 꽃게통발 92척이 조업을 포기했다. 경남 사천시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사천지역 2300여어선 중 70%가 어획고 감소로 출어하지 않고 있다. 4500여 선원이 일손을 놓았고 이 지역 수산업 종사자 5162세대의 24%에 이르는 1250세대가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했다.
소형어선 선장 남영식씨는 고등학생인 딸의 학비도 대지 못할 지경이다. 지난해 동해의 황금어장 대화퇴와 동지나해의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험한 파도와 싸워가며 ‘그물 한방’으로 수백∼수천만원을 벌던 기억이 꿈만 같다. 남씨는 이젠 더이상 동지나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빚에 쪼들려 배를 수협과 새마을금고에 차압당했기 때문이다.
동지나해에서 보름 전 돌아온 기관장 이종건씨의 월수입은 60만원 정도. 가족을 볼 낯이 없다. 이씨의 동료선원들은 일을 그만두면 퇴직금은 고사하고 그동안 끌어다 쓴 돈을 회사에 값아야 하는 처지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러나 요즘 항구에선 이런 모습과는 정반대의 ‘요지경’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부산소재 수산물냉동회사인 D물산의 이모전무는 최근 한 모임에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한 선주가 트롤어선 감척보상신청을 냈는데 보상금으로 20여억원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 선주는 “헌 배 내주고 이만한 현금이 들어왔으니 노다지를 캔 것이나 다름없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른 트롤저인망어선의 선주도 감척신청을 했다. 그의 뱃값은 7억원. 그는 여기에 웃돈을 얹어 13억원을 보상받게 됐다.
해양수산부는 뱃값에다 3년치 순소득의 90%를 손실지원금 명목으로 선주들에게 주는 감척보상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한일어협으로 어장이 좁아진 만큼 어선수를 줄여 경쟁력을 키우려는 목적이다. 지금까지 들어 온 감척신청 선박수는 744척. 2004년까지 우리나라 어선의 26%가 감척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744척에 대한 실사 결과 당초 잡아놓은 감척지원용 예산 1555억원은 턱없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사작업에 참여한 K씨는 “감척지원금으로 투입되는 비용이 무려 34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해양수산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K씨는 자신이 직접 보상명세 산정과정을 확인해 본 결과 보상금이 상당히 부풀려 있었다고 말했다. 고기가 안잡혀 감척신청을 했다는 배가 지난 3년간 막대한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해양 수산부는 올해 말까지 감척지원금을 모두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감척사업에는 문제가 적지 않다. 그냥 놔둬도 퇴출될 배에 국민세금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안겨다 준다는 건 재검토돼야 한다. 감척사업은 남아 있는 어선들의 재기의욕을 꺾는 부작용도 야기한다. 해양수산부는 ‘97년 이후 일본수역에서 조업실적이 있는 배’로 감척보상자격을 정했다. 감척보상자격이 있는 배들 대부분은 바다에 나가 어장을 개척하기보다는 아예 출어를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감척자격이 안되는 소형 어선들 사이에선 ‘한일어협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영세 어민’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돼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다.”(부경대 김병호교수)
전문가들은 “감척사업을 지금보다 훨씬 엄격히 시행하라”고 주장한다. 대신 조업중인 어선이 배의 규모를 줄여 고정비용을 감축할 수 있도록 유도하라는 주문이다. 조업어선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부경대 이상고교수는 “수산정책은 내년의 한일어업협상-한중어업협상-해외어장개척-어자원보호사업을 통해 ‘어장’을 실질적으로 늘리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래야 수산업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2월 초순은 예년 같으면 고기 물때가 다시 열리는 ‘풍어기’(豊漁期)다. 그러나 어민들은 항구에 배를 동여맨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들이 다시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가게 되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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