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구 한 공동주택에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동아DB]
#2 30대 한 모 씨는 2021년 1월 전세보증금 1억3000만 원에 인천 미추홀구 구축 빌라에 입주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지난해 10월 다른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연락하는 과정에서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알아보니 집주인은 한 씨와 전세계약을 체결한 그 달 1100여 채 주택을 보유한 ‘빌라왕’ 김 모 씨(지난해 10월 사망)에게 집을 팔았다. 한 씨는 전 집주인이 김 씨 일당의 전세사기 의도를 알고도 집을 팔았다고 의심하고 있다.
인천 미추홀구 한 주택 현관문 앞에 전세사기 피해 사망자를 추모하는 조화가 놓여 있다. [뉴스1]
보증금 반환 소송 이겨도 돈 못 받아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 특별법)을 6월 1일부터 시행하는 등 지원책을 내놓았지만 전세사기 피해자 상당수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피해 유형이 다양한 데다, 피해자마다 사정이 제각각이라 지원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세사기 일당과 소송이 길어지면서 피해자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수도권 일대에 주택 2700여 채를 보유한 ‘건축왕’ 남 씨 일당의 경우 최근 인천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공소장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검찰이 우리를 범죄조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사기 일당이 증인을 계속 신청하는 등 ‘시간 끌기’에 돌입했다는 게 피해자들의 하소연이다.상당수 피해자는 전세사기 피의자를 상대로 한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피의자들이 “파산했다”며 버티거나, 수감 또는 사망한 상태라 강제집행 절차를 밟기가 여의치 않아 실질적인 피해 회복이 요원한 상황이다. A 씨도 4월 권 씨를 상대로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이겼지만 돈을 돌려받지는 못했다. 그는 권 씨 일당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보고 경매로 집을 낙찰받을 작정이다. 전세자금 대출을 연장한 후 높은 이자를 물고 있는 A 씨는 대환대출을 알아보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A 씨는 “최근 전세피해지원센터에 대환대출을 문의했더니 ‘기존 전세자금대출을 연장해서 안 된다’고 했다”면서 “전세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세자금대출을 연장해 8% 넘는 이자를 부담하고 있는데, 정부 발표와 센터, 은행 창구의 설명이 다 달라서 혼란스럽다”고 토로했다.
전세보증금을 떼인 피해자가 보증금 반환을 요구하자 집주인이 위장이혼으로 책임을 회피한 경우도 있다. 김연신 씨(53)는 2016년 1월 제주 서귀포시 한 주택에 보증금 1억5000만 원을 주고 입주했다가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떼였다. 집을 비우고 이사 가기로 한 당일 갑작스레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통보받은 것이다. 김 씨는 2020년 7월 전세금 반환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여태까지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집주인이 전세보증금 반환을 피하려고 재산을 아내에게 넘긴 후 위장이혼을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6월 14일 기자와 만난 김 씨는 “집주인은 자기 명의 재산인 덤프트럭을 아내에게 넘기고 곧 이혼했지만, 전처가 트럭을 판 돈으로 개업한 편의점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고, 월세도 전처로부터 받고 있다”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김 씨가 집주인 신상을 인터넷 사이트 ‘나쁜 집주인’에 공개하고 1인 시위에 나서자 집주인 측은 그를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고소했다.
위장이혼으로 보증금 반환 피하는 경우도
전세사기 일당과 송사를 벌여도 실익이 적다는 판단에 ‘임대차 승계거부’ 소송으로 각자도생에 나선 피해자도 적잖다. 전 집주인과 전세사기 일당 간 임대인 지위 자동승계 자체를 거부하고 기존 임대인에게 임차보증금 반환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전 집주인을 상대로 임대차 승계거부 소송에 나선 한 모 씨는 “전세사기 일당에 동조한 기존 집주인도 보이스피싱 전달책처럼 적어도 사기 공범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전셋집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집주인의 태도가 이상했던 점을 떠올렸다. 집을 구경하고 전세계약을 맺는 내내 집주인은 한 씨와 눈조차 맞추려 하지 않았고, 질문을 해도 부동산공인중개사가 대신 대답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전 집주인을 추궁하자 “김 씨 일당이 시가보다 높은 금액에 전세 세입자를 구해줄 테니, 1600만 원을 ‘복비’ 명목으로 달라고 했다” “김 씨 일당이 집 매매 사실을 세입자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실토했다는 게 한 씨 주장이다.전세사기 피해가 광범위하다 보니 당국 지원에도 사각지대가 많다. ‘건축왕’ 남 씨 일당이 전세계약금 수십억 원을 빼돌린 인천 J아파트가 대표적 사례다. 남 씨 일당은 “2년간 새집에서 전세로 살아보고 전세 가격 그대로 분양 우선권을 받을 수 있다”며 세입자를 모집해 100여 명으로부터 각각 전세계약금 3400만~4000만 원을 받았다. 실상은 ‘깡통전세 분양’이었고 피해 금액은 총 40억 원에 달한다. 문제는 아파트가 공정률 95%로 거의 완공됐으나 지난해 남 씨가 운영하던 건설사의 부도로 소유권이 신탁회사로 넘어가 공사가 중단됐다는 것이다. 전세사기 특별법에 따른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전입신고 확정일자를 받아야 하는데, 이 아파트의 경우 입주 전 상태라 지원책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 ‘인천 J아파트 입주전계약사기 피해자 모임’ 대표 장 모 씨는 “남 씨 일당으로부터 전세사기를 당한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데도 아파트가 미준공 상태라 대항력이 없는 피해자들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한 80대 피해자의 경우 계약금뿐 아니라 전세금 3억 원 이상을 완납해 전 재산을 날리는 등 피해가 심각하다”고 토로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대책에 대해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전세사기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은행 창구와 전세피해지원센터를 찾은 상당수 피해자가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며 “국가가 보증금 채권을 우선 매입한 후 주택을 팔거나 피의자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이 전세사기 피해자의 빠른 일상 회복을 돕는 근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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