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1

2015.01.12

탈영 北 병사 中 주민 살해, 왜?

‘이웃사촌’ 북·중 접경지대, 잇따른 사건에 공포 휩싸여

  • 구자룡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bonhong@donga.com

    입력2015-01-12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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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영 北 병사 中 주민 살해, 왜?

    2014년 12월 26일 북·중 국경을 넘은 북한군 병사가 교전 끝에 붙잡혀 치료를 받다 1월 3일 숨진 허룽시 인민병원.

    한 해가 저물어가던 2014년 12월 29일 오후 지인으로부터 짧은 e메일이 왔다. ‘허우룡(60) 부부와 이창록(70) 부부 4명, 두만강변 마을에서 북한에서 넘어온 군인 총 맞고 사망.’ 민감한 사안의 특성상 전화로는 물어볼 수 없어 몇 명이나 넘어왔는지, 장교인지, 시간은 언제이고 장소는 어디인지 등등의 추가 질문을 e메일에 실어 보냈다. 베이징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인 지린(吉林)성 옌지(延吉). 2~3일은 족히 걸릴 출장을 떠나려면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했다.

    이튿날 아침 ‘북한군 병사가 중국 군경과의 총격전 끝에 체포’라는 소식이 추가됐다.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대에서는 이러저러한 사고가 비일비재하지만, 무장 군인에 의해 조선족 동포 4명이 살해되고 총격전까지 벌어졌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 오후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구해 옌지로 출발했다. 무장 탈영한 북한 병사가 중국 변경에서 4명을 살해한 사건의 취재는 그렇게 시작됐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2014년 12월 27일 오후 6~7시쯤 지린성 허룽(和龍)시 난핑(南坪)진 난핑촌 지디(吉地)둔 마을에 26세 북한 병사가 권총과 칼을 들고 침입했다. 병사는 먼저 차모 씨 집에 들어가 혼자 있던 차씨를 위협해 100위안(약 1만8000원)을 빼앗고 약간의 음식을 얻어먹은 뒤 “꼼짝 말고 엎드려 있으라”고 위협하고 나왔다.

    “불안해서 못 살겠다”

    병사는 이어 허우룡 씨 집에 들어가 마당에 나와 있던 허씨와 부엌에 있던 그의 아내를 권총을 쏴 살해했다. 왜 총을 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병사는 마지막으로 이창록 씨 집에 들어가 방에 있던 이씨 부부의 머리를 권총으로 때려 무참히 살해했다. 중국 ‘신징(新京)보’는 병사가 이씨 집에 들어가기 전 장모 씨 집에 들어갔으나 장씨가 신고장치를 누르자 급히 달아났다고 보도했다. 병사는 마을을 벗어나기 전 한 가정집 냉장고에서 돼지고기를 훔쳐 달아났다고 마을 사람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중국은 2005년부터 옌볜(延邊) 국경 마을의 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집마다 신고장치를 설치했다. 한 가구에서 신고장치를 누르면 변방부대와 다른 9가구에 동시에 경고음이 울리는 장치다. 상당수 마을 주민이 “불안해서 못 살겠다”며 떠났을 정도로 이번 사건은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범인에게 돈을 준 차씨도 정신적인 충격이 심해 다른 곳으로 후송, 안정을 취하고 있다.

    북한 병사는 범행 후 두만강 상류 쪽으로 달아나다 이날 밤 12시를 전후해 푸둥거우(釜洞溝)촌 한 계곡에서 중국군과 경찰이 쏜 총에 복부를 맞고 붙잡혔다. 병사는 허룽시 인민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으나 1월 3일 사망했고, 시신은 북한으로 넘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망해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할 수 없게 됐지만, 사병인 그가 장교용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뤄 부대에서 훔쳤거나 장교를 해치고 빼앗은 뒤 국경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들어간 차씨 집에서 돈을 얻은 후 그대로 나온 것으로 봐서 탈북 비용을 마련하려고 침입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주민과 충돌 등 돌발 상황이 생기자 총으로 주민들을 살해한 것이라는 관측이다.

    지디둔 등 변경 마을의 조선족 동포 가정은 자녀가 대도시나 한국으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허씨 경우도 한국에서 일하던 아들이 사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함북 무산군 칠성리와 마주 보는 이 마을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강 양쪽의 주민이 ‘국경이 무색하게’ 허물없이 지내던 곳이었다고 마을 주민들은 전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한 조선족 교포에 따르면 1970년대 초 북한 지역 산에서 불이 나면 초등학생까지 동원해 두만강을 건너 불을 끄러 갔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출입국 수속도, 검문도 없었다.

    북한 최대 노천 광산이 있는 무산군 인근의 두만강은 제법 폭이 넓어 겨울이면 이곳에서 북한 측이 주최하는 빙상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중국 아이들도 강으로 나가 구경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중국에서 치안을 맡은 ‘치보(治保)주임’이 아이들에게 북한에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 시작했다. 80년대에는 ‘월경 벌금’도 생겼다. 북한에서 넘어온 주민이 중국 쪽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고 가거나 소, 돼지 등 가축을 훔쳐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양쪽의 국경 경비도 한층 강화됐다.

    탈영 北 병사 中 주민 살해, 왜?
    중국 내 파장 만만찮아

    북한 주민의 ‘월경 구걸’이 늘어도 군인들만큼은 ‘공화국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며 밥을 얻어먹으러 오지 않았다. 군인마저 이 대열에 동참한 것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게 마을 주민들의 말이다. 한때는 북한과 평화롭게 공존하던 농촌 마을은 이제 공포의 마을로 변했다. 인근에서는 2014년 9월 3일 새벽 1시 30분쯤 26세 북한 남성이 건너와 60대 부부와 20대 아들 등 일가족 3명을 망치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동아일보’가 북한 무장 탈영병 사건을 처음 보도한 1월 5일 가진 정례 브리핑에서 이 사건을 공식 확인하며 “이미 북한 측에 항의했다. 공안이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당국은 이 사건을 개인의 돌발 행동으로 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북한 측에 항의했다고 공식 확인함에 따라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1월 6일에는 중국 관영매체가 북한 탈영병의 조선족 살해 사건을 주요 기사로 다루면서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관영 신화통신과 홍콩 ‘밍(明)보’ 등 중화권 언론도 일제히 보도에 나섰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 자매지 ‘환추(環球)시보’는 사건 내용을 자세히 다룬 기사를 거의 한쪽 면에 걸쳐 소개했다.

    환추시보는 사설을 통해 중국 당국도 비판했다. ‘동아일보가 보도하기 전 당국은 아무 소식도 내놓지 않았다. 범인이 북한 정부나 국민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법에 따라 처벌될 범죄자인데, 관련 정보를 공개하는 것과 중·조(북·중) 관계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논지였다. ‘중국과 외국 간 분쟁이 외국 또는 제3국에서 먼저 발표되는 것은 정부와 언론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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