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2002.10.10

“아이요? 자연에서 뒹굴며 키워요”

전원생활 최승은씨 교육법 잔잔한 감동 … 경쟁 없이도 큰아이 ‘민족사관고’ 합격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2-10-02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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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요? 자연에서 뒹굴며 키워요”

    집 앞 들판에서 막내 보천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최승은씨. 최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 대신 집 근처에서 마음껏 논다.

    시인이자 주부인 최승은씨(40)는 요즘 집 바로 뒤 공터에 나타나는 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 안팎을 사방으로 쏘다니는 늦둥이 보천이가 걱정인 것. “뱀 나온다!”고 겁을 줘도 네 살배기 보천이는 영 무서운 줄을 모른다.

    최씨의 집은 경기 용인 명지대 캠퍼스 안에 있다. 남편인 명지대 김정명 교수(사회체육)와 함께 8년 전 겨울 이곳에 목조주택을 지었다. 경치 좋고 공기는 맑지만 몇 가구의 이웃을 제외하면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땅벌떼와 뱀이 예사로 나타나고 밤이면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 칠흑처럼 깜깜하다. 최씨 부부는 이곳에서 중학교 3학년, 2학년인 보광, 보희, 그리고 막내 보천이와 함께 산다. 학원 하나 없는 외딴 동네에 살면 아이들 교육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최씨는 이곳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가 아이들 교육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거창하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다기보다는 아이들이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큰 선물일 것 같아서요.”

    경치 좋은 외딴 동네 8년 전 이사와

    “아이요? 자연에서 뒹굴며 키워요”

    아버지인 김정명 교수와 막내 보천이, 장남 보광이

    최씨 부부의 교육관은 남다르다. 자연 속에서 살기, 흥미가 있는 일 하기, 놀이와 여행, 운동, 예능 열심히 하기. 그래서 최씨의 아이들은 학원을 거의 가본 일이 없다. 집에 오면 이제 막 아기 티를 벗은 막내와 놀거나 엄마와 농구, 축구를 하고 밤마다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산책한다. 선행학습이나 학원, 특기교육에 시달리는 요즘 아이들에 비하면 참 한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생활 속에서도 장남인 보광이는 올해 민족사관고 국제반에 합격했다. 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민사고 국제반은 토플 620점, 내신 상위 3% 이상(서울 및 신도시는 5%, 읍 단위는 1%)인 우수한 학생들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그 밖에 영어 에세이 시험과 수학 심층면접도 봐야 한다. 보광이는 지난 겨울 처음으로 두 달간 토플 학원을 다닌 뒤 토플 667점(CBT 290)을 받아 민사고에 합격했다.

    보광이가 ‘민사고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다. “아이 아빠와 저는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고만 했어요. 사실 저희는 분당이나 강남 등의 학원에 보내줄 여건이 못 되는데다 보광이가 6학년 때 막내 보천이가 태어나 큰 아이들에게 거의 신경을 쓸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집에 오면 빨래 널어라, 아기 봐라 하고 심부름 시키기에 바빴죠.”

    보광이는 혼자서 영어 에세이를 써 보고 대학 도서관에 다니며 시험 준비를 했다. 부모는 이런 아이를 곁에서 지켜볼 뿐, 가끔 컴퓨터 채팅이나 게임에 빠져서 밤을 새도, 가요를 듣느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살아도 별다른 잔소리 없이 놔두었다.

    물론 심각한 위기도 없지 않았다. 소위 ‘사춘기’가 온 것이다. 학교 갈 때마다 늘 엄마에게 다정하게 뽀뽀하고 가던 아이가 성난 얼굴로 문을 쾅 닫고 나갈 때는 최씨도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김교수는 “아이를 믿고 놔두자. 우리도 저만 할 때 그랬다”며 아이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고 평상으로 되돌아왔다.

    최씨는 “부모는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가 함께 공유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부모가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아, 아이에게 지금 엄마가 필요하구나’ 하고 감지할 수 있어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바로 다시 학원에 보내버리면 엄마는 아이를 관찰할 시간이 없죠.”

    최씨가 고마워하는 것은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보다도 착하고 감성적인 청소년으로 커주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저녁에 항상 하던 산책을 하는데 보광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어요. ‘엄마, 내가 나중에 커서 힘든 일이 생기면 어렸을 때 엄마랑 우리집에서 산책하면서 별 보던 생각을 할 거야. 그러면 어떤 어려운 일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아이가 너무 믿음직스러웠어요.”

    보광이의 동생 보희도 과천외고에서 열린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탁월하다. 학원도 안 다니는 최씨의 아이들이 어떻게 영어 공부를 했을까. 아이들은 1998년 교환교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1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며 미국 학교에 다닌 일이 있다. 그러나 최씨의 생각으로는 이때의 경험보다는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영화를 많이 본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인어공주’나 ‘백설공주’ 같은 디즈니 만화 비디오를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 동네 아이들, 엄마들과 함께 디즈니 만화영화의 대본을 구해 역할놀이를 한 것도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봐요.”

    흥미를 느낄 때만 배우게 한다

    “아이요? 자연에서 뒹굴며 키워요”

    ‘엄마는 항상 아이 곁에 있는 사람.’ 최씨의 교육철학은 평범하지만 분명 남다르다

    미국 생활을 통해서 배운 것은 영어보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이었다고 최씨는 회고한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 때문에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시절, 최씨 부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어가며 적금을 깨 아이들과 함께 미국 대륙 횡단 여행과 남미 여행을 떠났다. “그때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렌터카에 텐트와 김치, 쌀을 싣고 미국 전역을 돌았으니까요. 칠흑처럼 깜깜한 국립공원에서 새벽 두세 시에 텐트를 치고, 늦은 저녁을 해 먹고…. 그런 와중에서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부쩍 컸죠.” 이 여행 속에서 아이들은 음악과 만났다. 남미 여행중 탱고 쇼를 보고 보광이가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부모를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이 악기를 그만둘 시점인 초등학교 6학년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지만 보광이는 2년 만에 용인 청소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흥미를 느낄 때만 배우게 한다’는 최씨 부부의 교육철학이 빛을 발한 셈이다.“아이들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것보다는 삶에 감사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어른으로 컸으면 좋겠어요. 보광이가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는데 제 바람 같아서는 국제기구 같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과학으로 봉사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싶어요.”최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우리집 교육철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보통 이야기다’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 최씨의 아이 키우기는 정말 평범했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뒹구는 것.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이 같은 평범함을 망각한 채 무한한 경쟁 속에 아이를 내몰고 있지 않나. 최씨의 아이들은 그 같은 경쟁 없이도 아이들은 잘 자란다는 부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요즘 엄마는 아이의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든가, 원석을 갈고 닦는 조련사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말들을 많이 하죠. 하지만 제 생각에 엄마는 항상 아이 곁에 있는 사람, 아이가 힘들어할 때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이 돼야 해요.”‘엄마는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사람.’ 최씨의 말 속에 담긴 진실이 종소리처럼 울린다. 잔잔하게, 그리고 따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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