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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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주역서 현실 정치 중심으로

정치학과 61학번·법대 64학번 쟁쟁한 인물들…30년 넘은 지금 “그명성 그대로”

  • 입력2005-11-29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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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주역서 현실 정치 중심으로
    한국정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학과 세대로는 어디를 꼽을 수 있을까.

    학교라면 서울대, 특히 서울대 법대와 문리대를 꼽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 만한 통계적 근거도 있다. 두 곳은 ‘4·13총선’에서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낸 단과대학들이다.

    단연 1위는 53명의 금배지를 만들어낸 법대다(법학과와 행정학과, 사법학과와 공법학과 출신을 하나로 합한 수치). 그리고 문리대가 26명으로 뒤를 이었다(문리대의 후신인 인문대 사회대 출신 5명은 문리대에 포함시켰음).

    세대로는 이른바 ‘6·3세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스무살이 갓 넘은 열혈 대학생으로 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65년 한일협정 조인 및 비준 저지투쟁에 몸을 던졌던 이들이 바로 ‘6·3세대’다.



    그렇다고 이들의 포효가 과거형인 것만은 아니다. 이제 50대 중후반의 나이로 각계, 특히 정계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세대도 바로 이들 세대다.

    결국 앞 얘기를 요약하면 오늘의 한국정치의 중심에 서울대 법대와 문리대 출신 ‘6·3세대’가 있다는 결론도 가능해 보인다.

    ‘6·3세대’에는 여러 학번이 있다. 61∼65학번(학번은 입학연도를 가리킴)이 그것이다. 하지만 모든 학번이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가장 두각을 나타낸 그룹으로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61학번과 서울대 법대 64학번을 들 수 있다.

    64년 시위의 선두에 섰던 쪽이 정치학과 61학번이라면 65년 이후 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쪽은 법대 64학번이다.

    민족주의를 외치며 노도와 같이 달렸던 이들은 졸업 후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일부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는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어떤 이는 언론인으로, 다른 이는 학문의 길로,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판검사와 변호사로….

    그렇게 흩어졌던 이들이 이제 하나둘씩 다시 모이고 있다. 35, 36년의 세월 속에 명망가가 된 이들이 중년의 현실 정치인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

    정치학과 61학번은 42명이다(60학번은 30명이었으나 61년도에 정원을 10명 늘렸고 동점자 3명을 모두 합격시켰다).

    같은 학번의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정원이 200명을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매우 작은 숫자다. 하지만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쟁쟁함이 느껴진다.

    강황석(전 동아일보논설위원) 권근술(한겨레신문논설고문) 김도현(전 문화체육부차관) 김문원(전 국회의원) 김정남(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 김중태 김학준(인천대총장) 성유보(전 한겨레신문편집위원장) 송업교(전 국회의원) 송진혁(중앙일보논설고문) 송철원(21세기시민연합대표) 심경보(주이집트대사) 유종열(자민련지구당위원장) 이부영(한나라당의원) 최환(변호사) 현승일(16대 당선자) (가나다순).

    정치학과 61학번은 고3 때 4·19혁명을 두 눈으로 지켜봤고 대학 4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이끈 세대다. 젊은날의 경험에 바탕한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남달라서인지 정치인이나 언론인의 길을 가는 이들이 많다.

    현재의 선두주자는 이부영의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80년대 재야운동의 간판으로 떠올랐고 90년 현실정치에 뛰어든 뒤 내리 3선을 했다. 차세대 정치지도자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대학시절에는 선두가 아닌 후미에 있었다. 데모를 하면 열심히는 쫓아다녔지만 정치학과에 하도 ‘잘난 놈’들이 많아 기도 못 폈다고 한다.

    재학시절에 날린 인물은 ‘6·3 삼총사’로 불리는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씨다. 이들은 64년 ‘3·24 데모’에서 ‘6·3 계엄령’에 이르는 70여 일간의 전국적 투쟁을 주도했다.

    현승일씨는 졸업 후 동양통신기자를 거쳐 미국 유타주립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민대 총장을 역임한 뒤 정치인으로 변신,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후보로 대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80년대 재야단체인 민추협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김도현씨는 YS정부에서 문화체육부차관을 지냈으며,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후보로 서울에서 출마했으나 낙마했다.

    전체적으로 정치학과 61학번의 ‘4·13’총선 성적표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신아일보 기자출신으로 11, 13대 의원을 지낸 김문원씨와 5, 6공에서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린 뒤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에서 물러난 최환씨, 미국 뉴욕대 정치학 박사로 경희대교수를 지낸 유종렬씨 등 3인은 자민련후보로 ‘4·13’총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성유보 송철원씨 등은 과거 현실정치 진입을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켜 있는 상태.

    정치학과는 아니지만 문리대 61학번 중에는 문리대 학생회장을 지낸 김덕룡의원(사회학과)과 홍사덕의원(외교학과) 등 중진정치인들이 있다.

    ‘문리대(인문대와 사회대)는 데모하면 출세하지만 법대는 데모하면 망한다.’

    학생운동의 시대였던 60∼80년대 법대생들에게 경구처럼 전해져온 말이다. 체제유지를 위한 학문인 법학의 성격이나 고시라는 특별한 부담을 생각하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는 얘기다.

    64년 내내 문리대는 계속된 시위로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법대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그런 법대가 65년 들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하이라이트는 65년 6월 하순 법대의 한 강의실에서 진행된 200시간에 걸친 무기한 집단 단식농성이었다. 여기에는 법대생 200여 명을 포함, 400여 명이 참여했다.

    ‘서울 법대생의 최후항전’으로 불렸던 이 농성은 64학번 강경파에 힘입은 바 크다. 64학번 강경파가 지도부격인 62, 63학번에게 이전의 가두투쟁이 거듭 실패로 끝난 것을 강력히 항의하면서 농성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날의 현장에 있었던 법대 64학번(총 160명·법학과 100명, 행정학과 60명) 중에는 이제 꽤나 유명인사가 된 이들이 있었다.

    우선 법대 64학번 ‘4인방’으로 불렸던 최기선(인천시장) 문희상(16대 당선자) 홍정표(주인도네시아대사) 조병윤씨(명지대지방자치대학원장)가 농성장을 굳게 지켰다. 훗날 법대 학생회장과 부회장이 되는 한나라당 정형근, 안상수의원도 적극가담자였다. 11대 전국구의원과 환경처장관을 지낸 황산성씨도, 15대 의원인 김길환씨도 농성을 한 64학번이다.

    초강경파였던 최기선씨는 65년 위수령이 내려진 뒤에도 맹휴를 주동하다 제적된다. 늦깎이 졸업 후 외환은행, 경남기업 중동건설현장 등을 돌아다니던 그는 79년 ‘10·26’ 이후 YS의 공보비서로 정계에 입문한다. 13대 의원을 지낸 뒤 14대엔 낙마했지만 두 차례의 인천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문희상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사업의 길로 나선다. 숭문당 서점 및 출판사를 경영하던 그는 80년 ‘서울의 봄’ 때 DJ캠프에 합류했다. 그의 역대 총선 성적표는 2승2패다(13, 15대 낙선, 14, 16대 당선)

    서울대와 파리 제2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조병윤씨는 94년 강원 명주-양양 보선 출마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홍정표씨는 2회 외무고시에 수석합격한 뒤 외무부 2차관보를 거쳐 대사로 일하고 있다.

    정형근의원은 훗날 법대 학생회장 겸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66년 삼성재벌 밀수 규탄 데모와 67년 ‘6·8’부정선거 규탄 데모 등을 주동, 무기정학을 당한다. 70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가 된 뒤 안기부 수사국장, 안기부 제1차장 등의 길을 간다. 검사가 된 안상수의원은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주임검사로 양심적 수사를 해 세인의 기억에 남게 된다.

    법대 64학번은 ‘4·13’총선에서 4명의 재선의원을 탄생시켰다. 민주당 문희상의원, 한나라당 정형근 안상수 최연희의원이 그들이다. 반면 YS정부에서 청와대 민정 제1비서관으로 일했고 15대 때 신한국당후보로 금배지를 달았던 김길환씨는 16대엔 당적을 바꿔 민주당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다. 총선 직전 자민련에 입당, 부총재가 된 황산성씨는 비례대표 8번을 받았으나 자민련이 참패하는 바람에 낙선했다. 13, 14대 의원을 지낸 장석화변호사는 주요 정당의 공천장을 얻지 못하자 출마를 포기했다.

    법대 64학번은 학생운동에만 열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학번에 비해 한량 기질도 훨씬 강했고 공부도 잘해 사시합격생도 많이 배출했다는 게 졸업생들의 회고담이다.

    64학번의 기질을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4학년 때인 67년 졸업사진을 찍으러 태릉에 갔다가 40, 50명이 금남의 집인 서울여대에 몰려갔다. 기숙사 앞에서 ‘창문을 열어다오’ 등의 노래를 부르다 기숙사감의 신고로 육사 헌병이 출동했고 결국 경찰서로 연행돼 하룻밤을 세웠다. 경찰서에서도 이들의 노래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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