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63

2020.11.06

박사 학위 없어도 노벨상 받았던 여성 과학자 [궤도 밖의 과학-33]

  •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nasabolt@gmail.com

    입력2020-10-27 11: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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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리아모기. [동아DB]

    말라리아모기. [동아DB]

    역대 최악의 전쟁이자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남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무려 6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망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무섭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전쟁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일이 또 있다. 바로 전염병이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온몸에서 열이 나며 피를 철철 흘릴 것만 같은 에볼라 바이러스는 1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에이즈나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사망자수는 이미 국가 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수를 훌쩍 넘어섰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진 천연두조차도 박멸되기 직전까지 5억 명이 넘는 인간을 사지로 내몰았다. 사진 속 사람의 형체가 모니터의 픽셀 한 개만큼 작게 보일 만큼 거대한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을 관람객으로 빈틈없이 가득 채우면 1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데, 이런 경기장이 5000개가 있어야 비로소 5억 명이 완성된다. 솔직히 체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류에게 큰 해를 끼친 끝판왕은 따로 있다. 바로 모기를 타고 옮겨 다니는 ‘말라리아’다. 말라리아는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돼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이다. 출혈열을 일으키는 에볼라바이러스조차도 말라리아에 비하면 그리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전체 인원의 무려 80배가 넘는 사람들이 매년 말라리아로 죽어가고 있다. 말라리아는 이탈리아어로 ‘나쁜’을 뜻하는 ‘말(mal)’과 공기를 뜻하는 ‘아리아(aria)’를 합친 말로, 전염 경로를 모르던 과거엔 말라리아가 마치 나쁜 공기를 통해 퍼지는 것처럼 여겨져 생겨난 이름이다. 말라리아의 가장 친한 동료는 그리스어로 쓸모없다는 뜻을 갖는 학질모기인데, 이 녀석의 암컷과 늘 범죄현장에 동행한다. 학질모기가 일단 사람을 물게 되면, 피 냄새를 맡은 말라리아는 혈관을 향해 달려간다. 몸 안에 들어오면 간세포로 침투한 뒤, 꾸준히 1만 번이 넘는 복제를 거듭한다. 적당히 세력을 늘리는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적혈구로 자리를 옮겨 헤모글로빈을 맛있게 잡아먹는다. 먹다가 버린 찌꺼기 단백질은 적혈구 표면으로 나가 적혈구끼리 서로 달라붙고 엉겨버리게 만든다. 한참을 그렇게 혈관 속에서 문젯거리를 키우다가 다시 모기가 찾아오면 올라타고 다음 희생양을 찾아 떠나버린다. 

    1944년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감비아의 군 병원에서는 흥미로운 검사결과를 훑어보고 있었다. 학질모기에 물려도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현지 주민들의 혈액을 분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조사 대상의 5분의 1이 뭔가 특이한 모양의 적혈구 유전자를 갖고 있었고, 그 덕분에 말라리아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거나 걸려도 가볍게 앓고 나서 완치되었다. 그들이 보유한 초승달처럼 날카롭게 휘어진 모양의 적혈구를 겸상(낫 모양) 적혈구라고 불렀다. 드디어 인류는 처음으로 말라리아의 무력에 저항할 방법을 찾았다. 바로 인위적으로 겸상 적혈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몸 안에 모든 적혈구가 비정상적인 모양이라면, 제대로 산소를 운반하지 못해 금방 사망할 수 있다. 그래서 정상 적혈구와 겸상 적혈구가 적당히 반반씩 섞여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절반의 적혈구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자 심장에 무리가 갔고, 말라리아로 죽지는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경우가 계속 생겼다. 감수하기엔 너무 큰 문제였다. 이후 민간요법의 성분으로부터 다양한 치료제가 나오기도 했지만, 약의 부작용이 심하거나 말라리아가 약에 내성을 갖춰서 제대로 듣지 않았다. 3000만 년 전부터 존재해오던 모기와 함께, 인간을 해롭게 하기 위한 적응 기간을 충분히 갖고 진화해온 말라리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누구든 이 심각한 전염병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자신의 몸으로 임상시험을 했던 식물화학자

    1966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도된 많은 행동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대학 입시의 측면에서는 근본적인 평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누구나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목적에 맞는 긍정적인 결과가 있었다면 좋겠지만, 부정입학이 일상이 되어버렸고 기초과학을 위한 연구 수준은 급격하게 추락했다. 그 와중에 말라리아는 서서히 대륙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1967년 5월 23일,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를 위한 전국 단위의 회의를 열어 비밀리에 치료제 개발을 지시했다. 회의 날짜에서 이름을 따온 ‘523 임무’였다. 다른 과학기술 연구가 대부분 중단된 덕분에 군사 임무였던 이것만 남아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투유유도 여기에 투입되었다. 그녀는 1951년부터 베이징의학원에서 약학을 공부했고, 졸업한 뒤 운 좋게도 중국 전통 약초와 서양의학을 함께 연구하는 중국중의과학원에서 일했다. 1969년 중국 정부는 523 임무에 그녀를 보조 연구원으로 배정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살이었다.



    중국인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자 투유유. [차이나뉴스닷컴]

    중국인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자 투유유. [차이나뉴스닷컴]

    능력을 인정받아 그녀를 필두로 정식 연구팀이 꾸려진 이후, 그녀는 수십만 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을 실험했으나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이후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피해가 점점 커지자 투유유는 위험한 현장으로 보내졌다. 어쩔 수 없이 두 어린 딸은 남겨두고 떠났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어린 머피를 두고 인류를 지키기 위해 우주선을 타야 했던 쿠퍼처럼, 딸들을 사랑했기에 어린아이들을 무자비하게 사지로 이끄는 이 치명적인 질병의 치료제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수천 가지의 천연 식물을 활용한 중국 전통의 치료법을 연구했다가 결국 오래된 고서에서 숨겨진 단서를 찾아냈다. 바로 국화 쑥 속의 한해살이풀인 개똥쑥이었다. 뜯어서 손으로 비비면 개똥 냄새가 나는 이 풀 속에 있는 아르테미시닌이라는 성분은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아르테미시닌은 열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신선한 개똥쑥에서 나온 즙을 써야 했는데, 말려서 열을 가하는 형태로 추출을 시도했으니 쓸만한 게 남아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수백 번의 시행착오 중에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혹시 높은 온도에서는 성분이 손상되는 게 아닐까? 그녀는 저온에서 활성화되는 다이에틸 에터(Diethyl ether)라는 무색의 액체를 이용해 아르테미시닌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쥐와 원숭이를 이용한 동물실험에서도 유의미한 효과가 있었다. 이제 사람에게 임상시험을 할 차례였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그녀는 추출한 아르테미시닌을 자신에게 직접 투여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한 방법이었지만, 몇 시간 안에 열이 내리고 말라리아가 혈액 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치료제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영웅의 정체

    중국 정부는 귀중한 연구 성과를 군사기밀로 취급했으며, 문화대혁명 때문에 연구내용을 발표할 학회나 학술지도 없었다. 1977년에야 겨우 발표된 투유유의 연구결과 논문에 그녀의 이름은 익명으로 처리되었다. 행실이 워낙 겸손하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투유유의 업적은 조용히 가려졌다. 중국은 아르테미시닌의 발견을 자국의 10대 과학기술 성과로만 성대하게 발표했다. 그렇게 한 이름 없는 과학자는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2011년 중국인 최초로 미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래스커 상(Lasker Award)을 받으며 드디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 특히나 생존이 어려운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한 아르테미시닌을 발견한 공로로 2015년엔 워렌 알퍼트 재단 상까지 받았다. 조국은 그녀를 감추며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세계인들의 시각은 확실히 달랐다. 같은 해, 드디어 그녀는 순수한 국내파 중국인 최초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중국인 여성 최초의 노벨상이었다.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이 연구의 성공은 혼자가 아닌 연구팀 전체가 일궈낸 결과물이며, 중국 전통 의학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라고 공을 돌렸다. 소감을 남겼다. 

    몇 차례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말라리아와 인류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말라리아를 미리 대비하기 위한 백신이나 모기를 불임으로 만들어서 모기의 수 자체를 줄이는 연구도 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인 탓에 투유유는 다른 노벨상 수상자들과 달리 박사학위는 물론 석사학위조차 없었다. 중국 과학계의 최고 실력자를 상징하는 원사의 칭호도 없었으며, 해외 유학 경험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3무 과학자라고 불렀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치지 않았던 그녀는 여전히 인류에 공헌할 무언가를 찾고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시했던 그녀를 닮은 과학자가 계속 나오길.


    궤도_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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