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소재 한 마스크 제조 공장에서 수술용 마스크를 생산하고 있다. [뉴시스]
생산 증대와 함께 과거 ‘사재기’ 해놨던 마스크까지 시장에 풀리면서 공급 과잉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현재는 영세 업체를 중심으로 폐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중소 업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마스크 업체들의 경우 납품 대금을 받지 못하거나, 생산 계약 해지 통보로 소송에 돌입하는 등 사업이 존폐 위기에 처한 업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갑작스런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으로 마스크 생산 업체 생태계가 무너지면 지금껏 힘겹게 쌓아놓은 마스크 생산 공급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스크 공급만이 무너진 상태에서 ‘2차 팬데믹’까지 오면 올해 초와 같은 마스크 부족 현상이 또 다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업계를 중심으로 ‘마스크 생산 업체의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의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마스크 생산업체의 재고는 심각한 상황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10월 4주(19~25일) 의약외품 마스크 총생산량은 1억7839만개(보건용 마스크 1억3396만개, 비말차단용 마스크 3342만개, 수술용(덴탈) 마스크 1101만개)다. 7월 2주(1억1491만개)와 비교하면 55.2%나 늘었다.
공급이 늘면서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마스크 가격에 대한 통계청 집계가 처음 시작된 2월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보건용 마스크(KF94)의 온라인 판매가격은 2월 4주 4221원에서 7월 4주 1644원으로 크게 하락했고, 오프라인 가격은 약국 1590원, 마트 1967원으로 조사됐다. 현재(10월 4주 기준) 온라인 판매가격은 913원, 오프라인 판매가격은 1496원이다. 비말차단용 마스크(KF-AD)도 공급이 본격화된 6월 4일 1145원에서 7월 4주 850원으로 가격이 하락했고, 현재는 580원에 판매되고 있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나 마스크 공급량을 늘리고자 생산설비를 새로 들이는 등 거액을 투자한 업체들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마스크 제조 및 수업 업체 올 초 대비 3배 이상 늘어
공적 마스크를 유통했던 도매업체들은 7월 11일 공적 마스크 판매 종료 이후 4300만 장의 재고를 떠안고 있다. 마스크는 팔리지 않는 상황에 보관비용까지 누적돼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내용은 10월 13일 진행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자 보건복지부는 국감 일주일 뒤인 20일 “정부가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공적마스크 물량을 해소하기 위해 지자체, 공공기관 등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더 큰 문제는 공적 마스크 이외의 일반 마스크 재고 물량이다. 올 들어 마스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면서 마스크 창업 바람이 불기 시작해, 현재는 공급 과잉에 내몰린 상태다. 식약처 자료에 의하면 ‘의외약품 마스크 제조 및 수입 업체’는 지난해 말 188개소에서 올해 9월말 현재 627개소로 3배 이상 늘었다.
같은 기간 보건용 마스크 제조업체는 121개에서 394개로 225.6% 늘었고, 수입 업체는 26개에서 38개로 증가했다. 수술용 마스크의 경우 제조업체가 26개에서 119개로 357.7% 늘었고, 수입업체도 47개에서 53개로 증가했다. 비말차단용 마스크는 올해 292개, 수입업체 29개가 신규 등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의약외품’으로 식약처 인증을 받은 것에 한정된 수치로, 산업단지 공장설립온라인지원시스템(팩토리온)에 따르면 9월말 기준 마스크 공장 수는 1100여개에 달한다.
이처럼 마스크 업체 내 과잉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영업선이 탄탄하지 않은 신생 업체나 소규모 업체는 판로를 찾지 못하거나 원가를 맞추지 못해 폐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식약처 인증 업체 중 현재까지 폐업한 곳은 2곳이지만, 업계는 미인증 업체들까지 감안하면 실제로 폐업하거나 휴업에 들어간 곳은 수십 군데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인천 남동산업단지에서 덴탈 마스크를 제조하다 최근 폐업을 선언한 최모 대표는 “마스크 사업은 망할 일이 없다고 해서 대출을 받아 공장을 지었는데, 마스크 한 장 팔아 10원도 안 남는 상황에서 더는 사업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내 3대 산업단지로 불리는 시화·반월·남동산단을 비롯해 경기 양주· 평택·화성·포천, 충북 음성 등 전국 곳곳에서 마스크 생산을 접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업체들이 많다”고 전했다.
“40억 들여 마스크 생산 설비 늘렸는데, 일방적 계약 파기”
정세균 국무총리가 10월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마스크 수출 규제를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뉴시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최근 들어 속출하고 있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마스크가 돈이 된다’는 소문에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다가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마스크 생산 기계를 판매해서 수수료를 챙긴다는 계산에서 제조업체에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마스크 재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10월 23일부터 의약외품 마스크 수출 규제를 폐지했다. 그동안 정부는 국내 마스크 수급을 위해 월평균 생산량의 50% 범위 내에서만 수출을 허용해왔다. 하지만 수출 규제가 풀린다고 해서 마스크 재고 문제가 풀릴지는 미지수다. 한국산 마스크의 수출 경쟁력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스크 생산업체 관계자는 “현재 보건용 마스크의 경우 국내 생산량의 2~3% 정도만 수출되고 있다”며 “그동안 식약처도 ‘수출 50% 제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정식 수출 계약인 경우에는 50% 이상도 승인해줬다”고 밝혔다. 문제는 가격. 현재 국산 KF94 마스크와 비슷한 중국산 KN95 마스크 수출 가격은 200원대로 국산품의 5분의1 수준 밖에 안 된다. 마스크 생산업체 관계자는 “국산 보건용 마스크 수출이 원활하려면 200~300원으로 가격대를 맞춰야 하는데, 이를 맞출 수 있는 업체는 그리 많지 않다”고 밝혔다.
“중국산에 맞서기 힘들어, 구조조정 불가피”
결국 한국산 마스크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품질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마스크가 ‘전략물자’의 성격을 띠게 된 만큼 방위산업체 지정과 유사한 방법으로 일정한 품질을 갖춘 마스크 업체들을 ‘정부 인증 업체’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교수는 이어 “중국산에 가격으로 맞서기는 힘들어도, 품질로 충분히 승산이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비싸도 한국산 마스크를 선택하게 하려면 품질이 담보돼야한다”며 “코로나 2차 팬데믹 혹은 유사 전염병이 생겨났을 때, 마스크 수급에 원활하게 대처하기 위해 우량 업체들을 집중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갑작스레 생산설비를 늘린 업체에 대해서는 적정 수준의 보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초 정부가 나서서 마스크 공급을 독려한 만큼 기계 구입 및 생산 설비에 들어간 비용 중 일부분은 보존해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정부가 시장가를 직접 통제하지 않더라도 기계를 사느라 빚더미에 올라앉은 업체들은 어느 정도 구제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이어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해 마스크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건 시장체제에 맞지 않는 만큼 나머지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 향후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