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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10년 전쟁’ 국력 소모한 제국 ‘명백한 운명’의 몰락

TV드라마로 읽는 미국의 전쟁과 국방전략… 지상군 감축·예산삭감, 안보에도 실리와 계산 득세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10년 전쟁’ 국력 소모한 제국 ‘명백한 운명’의 몰락

#1 이라크에서 알카에다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했던 미군 해병대 하사가 8년 만에 극적으로 적진에서 구출된다. 영웅의 생환에 온 나라가 환호하고 하원의원 출마까지 제안받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붙잡혀 있는 동안 가까워졌던 알카에다 간부의 아이가 미국의 무인 폭격에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 응징을 다짐한 그는 당시 폭격과 은폐를 주도했던 미국 부통령과 핵심 안보당국 인사들을 일거에 몰살하기 위한 자살 폭탄테러 계획을 하나하나 진행해나간다. 바로 ‘미국 제일의 적’ 알카에다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가며.

2011년 10월 2일 처음 방송된 미국 케이블채널 쇼타임의 12부작 드라마 ‘홈랜드(Homeland)’ 시즌1 줄거리다. 미국이 지난 10년간 중동에서 수행해온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며 ‘영웅은 없다’고 공공연히 설파하는 이 문제작은 매회 평균 420만 명이 시청하며 ‘2011년 가장 핫한 드라마’로 떠올랐다. 평론가들의 극찬 역시 끊이지 않아 1월 15일 열린 제6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시리즈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

#2 “미국은 10년간의 전쟁이 끝나면서 전략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지상군 병력의 대규모 감축과 해외 주둔기지의 규모 축소를 골자로 하는 새 국방전략 지침 서문에서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이 밝힌 내용이다. 1월 5일 백악관과 미 국방부(펜타곤)가 함께 발표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유지-21세기 국방의 우선순위’라는 제목의 이 14쪽짜리 문서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강도 높은 예산삭감 압력에 시달리는 초강대국 미국의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향후 10년간 최소 4780억 달러에서 최대 1조 달러까지 예산을 감축해야 하는 펜타곤은 현재 57만 명 규모인 육군을 49만 명 수준까지 줄일 예정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선택한 방책이 바로 ‘2개의 전쟁 동시수행 정책’ 폐기. 중동과 아시아에서 한꺼번에 대규모 섬멸전을 수행할 능력을 유지한다는 20여 년간의 방침을 사실상 포기하는 셈이다. 국방전략의 초점을 아시아로 옮겨오면서 한반도 안보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부연설명을 달았지만, 새 국방전략 문서는 동맹국의 협조와 더 많은 기여를 공공연히 요구한다. ‘이제 세계의 경찰은 없다, 보호받고 싶다면 돈을 내라’라는 청구서가 변화한 세상에서 미국이 자신의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한 카드인 셈이다.



‘10년 전쟁’ 국력 소모한 제국 ‘명백한 운명’의 몰락

2011년 하반기 ‘가장 핫한 미드’로 떠오른 케이블채널 쇼타임의 12부작 드라마 ‘홈랜드(Homeland)’ 포스터(왼쪽). 1999~2006년 NBC에서 방송된 드라마 ‘웨스트윙(West Wing)’의 출연진.

9·11테러 이후 10년. 미국은 달라졌다. ‘선과 악의 전쟁’을 외치며 “누구 편인지 선택하라”고 을러대던 시대가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치러온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들끓고, 비어가는 곳간에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로 상징되는 국민의 분노가 쌓이자, 워싱턴은 이제 옳고 그름의 명분 대신 지난 세기 유지해왔던 우위를 연장해나갈 수 있을지 그 실리를 챙기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제국의 초조함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정부문서나 당국자들의 언급이 아니라, 최근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TV드라마다. 앞서 소개한 ‘홈랜드’의 주요 설정만 해도 10년 전이라면 반미를 목적으로 만든 정치 선전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는 9·11테러 직후 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폭스TV의 드라마 ‘24’와 비교해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하루 동안에 발생한 일을 한 시간짜리 24개 에피소드로 나눠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24’의 주인공 잭 바우어는 테러조직에 맞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을 지켜내는 고전적 영웅 그 자체다.

‘10년 전쟁’ 국력 소모한 제국 ‘명백한 운명’의 몰락

9·11테러 직후 인기를 끌었던 폭스TV의 ‘24’ DVD.

2010년 시즌8을 끝으로 막을 내린 ‘24’ 역시 200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시리즈 작품상을 수상하며 시즌마다 1000만 명을 넘나드는 시청자 수를 자랑했다. 아랍계 테러 용의자에 대한 고문도 마다하지 않는 테러방지조직 CTU(Counter Terrorist Unit) 소속의 주인공이 대통령 암살 시도와 핵 테러, 생화학 공격 위협 등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막아내는 시리즈의 주요 내용은 9·11테러 이후 미국 전체에 몰아친 불안감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이런 ‘24’가 종영한 바로 이듬해에 정반대의 설정을 담은 ‘홈랜드’가 화제작으로 떠오른 현실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이 바로 ‘24’가 겨눴던 테러리스트가 되는 완전한 역설이다.

‘홈랜드’는 이와 함께 전장에서 돌아온 미군 병사들이 겪는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같은 다양한 후유증도 다룬다. “테러리스트를 섬멸한다”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뛰어들었던 전쟁의 명분은 흔들리고, 전투 당시 경험했던 참혹한 일은 끊임없는 악몽으로 되살아나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8년간의 수감생활로 아내와의 성생활마저 불가능해진 주인공 니컬러스 브로디 하사의 모습은 미국이 감추고 싶어 하는 전쟁의 가장 큰 생채기를 처참하게 드러낸다.

더욱 기묘한 것은 브로디 하사가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유일한 존재인 CIA 여성요원 캐리 매티슨의 모습이다. ‘24’의 잭 바우어와 흡사해야 할 것 같지만 그는 실제로는 약물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정신질환자다. 브로디 하사에 대한 의심 때문에 조직에서 쫓겨난 매티슨의 정서적 불안정은 ‘24’가 전체 시리즈에 걸쳐 옹호했던 ‘조국 수호자 들’에 대한 신화를 철저히 깨부순다.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노이로제가 돼 스스로를 갉아먹는 매티슨의 모습이야말로 테러에 대한 불안이 미국이 자랑해왔던 모든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지난 10년의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더욱이 두 사람이 서로를 속이고 속는 과정에서 연민과 동정, 애정을 느끼는 일련의 흐름은 아무것도 확신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의인이 승리하지 못하는 시대

‘모든 명분이 무너져 내린 시대’에 대한 고뇌는 또 다른 미국 드라마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의 지점까지 나아간다. 9·11테러를 전후해 화제를 모았던 또 하나의 시리즈물이 1999년부터 2006년까지 NBC를 통해 방송된 ‘웨스트윙(West Wing)’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행정부가 아니라 민주당 행정부가 백악관을 차지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설정을 담은 이 대체역사물은 한마디로 정치적 판타지 그 자체다. 주인공인 바틀렛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선한 의지와 치열한 토론을 통해 미국이 당면한 갖가지 난제를 풀어나가는 데 사력을 다하는 이상적인 정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대통령이던 부시는 ‘오답’이라 해도 분명 어딘가에는 ‘정답’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웨스트윙’의 핵심 가치였던 셈이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고, ‘웨스트윙’ 제작사는 그의 당선을 기념해 전체 시리즈 DVD를 반값에 판매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의 고민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정답은 여전히 안갯속에 놓여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던 ‘웨스트윙’의 믿음이 사실은 현실과 거리가 먼 환상에 불과했음이 입증된 셈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바마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이 드라마가 민주당 대선 승리가 확실시되던 시점에 종영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드라마가 등장한다. 2011년 4월 HBO를 통해 첫 방송된 시리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이 그것이다. 중세시대를 모티프로 하는 가상의 세계 ‘세븐 킹덤’이 배경을 이루는 이 작품은 외형상 판타지물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왕위와 권력을 둘러싸고 수많은 인물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정치 드라마다. 흡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연상케 하는 협잡과 배신, 헛된 약속과 음모가 난무하는 이 드라마 역시 초반부터 회당 시청자 수 300만 명을 넘기며 일찌감치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

‘왕좌의 게임’이 드러내는 정치의 본질은 누구도 정통성을 갖지 못한 세상의 비정함이다. 선대왕을 죽인 뒤 왕위에 오른 군주를 둘러싸고 제후와 대신들은 물론 왕비조차 권력을 노리며 계략을 세우기에 분주하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비밀과 약점을 지닌 이들은 서로 짧은 거래를 통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며 힘겨루기를 벌인다.

‘10년 전쟁’ 국력 소모한 제국 ‘명백한 운명’의 몰락

2011년 4월 HBO에서 첫 방송된 시리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한 지독한 회의가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시즌1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의 죽음이다. 드라마를 통틀어 유일하게 신의와 헌신이라는 가치를 위해 운명을 맡겼던 그는 왕비의 함정에 빠져 성난 군중 앞에서 속절없이 참수당한다. ‘선한 의지’의 어이없는 몰락은 옳은 것이 승리하지 않는 세상, 혹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세상을 고스란히 구현한다. 21세기 현실정치를 다룬 ‘웨스트윙’이 판타지에 가까웠다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무대로 하는 ‘왕좌의 게임’은 훨씬 리얼리티 높은 정치극인 셈이다.

“겨울이 오고 있다”

‘Manifest Destiny.’ 우리말로는 흔히 ‘명백한 운명’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깔린 특유의 정서적 배경을 가리킨다. 19세기 서부 개척의 와중에 인디언들을 정복해 교화하는 것은 신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운명이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취지에서 처음 사용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지구촌 곳곳에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 미국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종교 자유를 쟁취하려고 세운 청교도들의 나라라는 도덕적 자신감과 오랜 기간 지속된 경제적 번영이 맞물려 강도 높은 ‘세계 개입’을 정당화하고 낙관하게 만들었던 제국의 모토였다.

그리고 21세기, ‘명백한 운명’의 마지막 적자(嫡子)였던 네오콘은 처참하게 몰락했고, 이제 이 말은 미국의 평범한 드라마 시청자들조차 믿지 못하는 낡은 구호로 전락했다. 지난 세기의 정체성이 사그라진 뒤 남은 것은 최소한의 위치를 지켜내려는 안간힘이다. 1월 24일 오바마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세계가 변하고 있고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미국은 세계 현안에서 빠질 수 없는 단 하나의 필수국가”라고 언급한 것은 새롭게 형성되는 체스판 위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눈물겨운 고백인 셈이다.

‘미국의 세기’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워싱턴이 엄청난 군사비를 투입하며 눈짓만으로 세상을 좌우하던 시대는 다시 오기 어렵다.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려고 아시아·태평양으로의 귀환을 선언한 워싱턴의 새 국방전략은 한국을 비롯한 이 지역의 동맹국에 더 많은 기여와 지출을 요구한다. 그 어느 때보다 실리와 계산을 따지고 드는 미국 앞에서 ‘선한 의지’와 ‘동맹의 신의’만을 되뇌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흐름이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뚜렷한 명분의 시대, 선과 악이라는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었던 ‘24’와 ‘웨스트윙’의 시대가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마치 등장인물 누구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홈랜드’와 ‘왕좌의 게임’ 속 음울한 정서와도 맥이 닿는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말로 다가오는 빙하기를 경계하는 스타크 가문의 가훈(家訓)이 유독 을씨년스러운 세상인 것이다.



주간동아 822호 (p32~34)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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