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1

2010.04.13

커져라 세져라, 어머니에 대한 기억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둑 쌓기’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10-04-08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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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져라 세져라, 어머니에 대한 기억

    Rachel Whiteread, ‘Embankment’, 2005

    미국 뉴욕에 현대미술관 모마(MoMA)가 있다면 영국 런던엔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이 있습니다. 특히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은 과거 발전소의 발전기가 있었던 곳답게 천장까지 5층 건물 높이고 넓이는 3400㎡에 이릅니다. 이 거대한 공간에 소비재 전문 글로벌 기업인 유니레버(Unilever)의 후원으로 2000년부터 해마다 현대미술가들이 작품을 전시합니다. 첫 테이프는 루이스 부르주아가 끊었죠. 원래 5년 동안만 3월과 10월 두 차례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로 했는데, 관객의 반응이 폭발적이라 유니레버 시리즈는 2012년까지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테이트 모던은 템스(Thames) 강변의 둑을 따라 자리합니다. 그런데 2005년 테이트 모던의 입구에 ‘둑 쌓기’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설치됐습니다. 바로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47)의 전시인 ‘둑 쌓기(Embankment)’를 알리는 내용이었죠. 제방 근처에 자리한 미술관의 장소성과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터빈 홀에 들어선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둑 모양을 보고 압도됐지요. 화이트리드는 돌이 아닌 하얀 상자로 둑을 쌓았는데, 대체 이 상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1993년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가장자리가 닳은 낡은 마분지 상자들을 발견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장식품, 사진 등 어머니의 사소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품은 작은 물건들이 든 상자를 보면서 그는 이 기억을 조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반투명한 폴리에틸렌을 이용해 이 종이상자와 똑같이 주조했는데, 작품 표면에 상자의 입구를 봉인했던 테이프며 구멍 자국까지 선명히 남아 있게 했습니다. 그는 이 상자를 수천 개 만들어 터빈 홀에 쌓았습니다. 원래 터빈 홀에 커다란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그는 수직적이고 남근적, 영웅적인 기존 기념비의 정형성에서 벗어나 반기념비적이고 반영웅적, 모성적인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화이트리드의 설치물에는 중심이 따로 없습니다. 영웅적 요소와는 거리가 먼 상자 하나가 모티프였으니까요. 하지만 상자 하나하나는 그 자신이 기념비면서 그것이 쌓여 더 큰 형태의 기념비를 구성합니다. 엄청나게 쌓여 있는 상자는 작가의 어머니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어머니를 기억하는 마음의 물질화이며, 상자들은 서로 다른 상자에 기대 더 큰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마치 기억이 무한대로 증식하는 듯한 시각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죠.

    폴리에틸렌의 반투명성은 우리가 타인의 기억과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완벽히 열어볼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쌓여 있는 상자 사이로 걸어다니며 상자를 손으로 만져볼 수 있습니다. 타인을 기억하는 방법 중 ‘촉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화이트리드의 작품 속을 거닐다 보면 우리는 내면 속 기억의 상자 몇 개를 작품에 올려놓으며 어느새 거대한 기억의 둑 쌓기에 동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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